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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송골매의 마지막 비행'에서 눈에 띈 것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61

[씨네멘터리] '송골매의 마지막 비행'에서 눈에 띈 것
아이유는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수준급이다. 가히 예인이라 할만하다. 지난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로 칸 영화제에도 초청됐다. 다소 평면적 연기로 보이기도 했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아이유는 가수로 출발해 배우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는데, 이는 대중예술계에서 드문 일은 아니다. 특히 대중음악의 중심이 팝송에서 가요로 넘어오던 80년대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만 아이유나 도경수, 수지 등 요즘 엔터테이너들이 노래와 연기를 병행하는 양상과는 달리 80년대에는 가수로서의 인기에 편승한 단발성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가왕’ 조용필은 당대의 트로이카 여배우 중 한 명이었던 유지인과 “그 사랑 한이 되어(1981)”라는 영화를 찍었고, 한때 조용필과 경쟁했던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돌아이(1985)”로 액션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작은 거인 ‘ 김수철은 최인호 원작 ⋅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에서 주연과 음악을 도맡았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던 홍콩 엔터테인먼트 시장도 상황은 비슷해서 3대 가왕으로 불리던 알란 탐, 장국영, 매염방이 모두 가수로 출발해 영화계로 진출했고 가수와 영화배우를 겸업했다. 특히 장국영은 영화배우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의 명작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입만 아픈 일이다. 

미국에서도 엘비스 프레슬리가 한창 때 10년 동안 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정도면 거의 히트곡에 맞춰 영화를 찍어내는 수준으로, 지난해 개봉했던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엘비스”에 이런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 영화 포스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위에서 언급한 솔로 가수 외에도 록 밴드 멤버들이 출연한 영화도 있다. 아예 제목부터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1983).” 김응천 감독의 영화로 구창모와 배철수를 비롯한 송골매 멤버들이 주연으로 나왔다. (후에 인기 탤런트가 되는 강문영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한데, 지금은 어느 플랫폼에서도 볼 수 없다. 관심 있으신 분은 한국영상자료원에 가면 열람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송골매의 영화가 아니라 송골매의 음악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음악성과 대중적 인기를 얻은 록 밴드 송골매의 마지막 콘서트인 ‘40년 만의 비행’이 KBS 설 대기획으로 방송됐다. 40대 이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세대에서 회자되며 큰 화제가 됐다.
 
*  *  *

칠순의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배철수와 구창모의 노래와 연주, 패션 등을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가사 자막이었다. 

송골매 5집의 타이틀곡인 ‘하늘나라 우리님’을 듣는데 ‘곰뷔 님뷔 님뷔 곰뷔 / 천방 지방 지방 천방’이라는 가사를 보자마자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입에는 착 붙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 열심히 사전을 뒤적여봤더랬다. 

당시 어떤 유행가 가사들은 고답적으로 느껴질만큼 우리말에 주목하고 한국어 특유의 운율을 살리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송골매의 노래가 그랬다. ‘곰뷔 님뷔’가 나오는 이 노래의 두 번째 연은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 시조에서 따왔다. 방송 제작진은 아래와 같이 ‘송골매 가사 사전’이라는 자막을 띄워 말뜻을 풀이했다.

-곰뷔 임뷔: ‘곰비임비’의 고어로 ‘물건이 계속 쌓이거나 일이 계속 일어남’을 의미
-천방 지방: ‘천방지축’의 고어로 ‘못난 사람이 종작 없이 덤벙이는 모양’ 을 의미

 
3.4.3.4 / 4.4.3.4
하늘은 매서웁고 / 흰눈이 가득한 날
사랑하는 님 찾으러 / 천상에 올라갈 제


3.4.4.4 / 4.4.4.4
신 벗어 손에 쥐고 / 버선 벗어 품에 품고
곰뷔 님뷔 님뷔 곰뷔 / 천방 지방 지방 천방


3.4.4.4 / 4.4.3.4
한번도 쉬지 않고 / 허위 허위 올라가니
버선 벗은 발일랑은 / 쓰리지 아니한데


4.4.4.3(4)
님 그리는 온 가슴만  / 산득 산득 하~더라
님 그리는 온 가슴만 / 산득 산득 하~더라

'하늘은 매서웁고 흰 눈이 가득한 날.'

'하늘이 매서웁다'는 표현도 기가 막히지만 '하늘나라 우리님’은 머리 속에서 정경이 절로 그려지는 회화적이고 시(詩)적인 도입부로 시작한다. 위에서 보듯이 한국어의 기본 율격인 4.4조를 바탕으로 한 가사 리듬은 배철수 특유의 툭툭 내뱉는 듯한 발성과 어울려 흡사 시조를 읊는 듯한 맛을 낸다. 
 
부사의 사용도 훌륭하다. ‘허위 허위’, ‘산득 산득’처럼 발성이 곧 말뜻을 반영하는 듯한 우리말 부사들은 이날 송골매가 부른 여러 곡에서 새삼스럽게 눈에 띄었다. 

‘덩실덩실’, ‘비틀비틀’ (‘탈춤’) ‘이러구러(‘세상만사’, 이럭저럭 일이 진행되는 모양)’, ‘대굴대굴’, ‘둥실둥실’, ‘헐렁헐렁’, ‘울퉁불퉁’, ‘살그머니(‘이빠진 동그라미’)’ 등이 그것이다. 이런 부사들은 친숙한 단어들인데다 문맥과 발음으로도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송골매 노래 중에는 이런 단어들만 나오는 건 아니다.

송골매 콘서트 '40년 만의 비행'의 한 장면 (제공:KBS)
'곰뷔 님뷔'는 물론이거니와 ‘희나리’(구창모가 송골매를 탈퇴한 뒤 부른 노래이기는 하다), ‘한삼 자락’같은 단어들은 사전을 찾아봐야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송골매의 노래를 듣는다고 우리말을 애용하게 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의식’하게는 되었다.

‘희나리’는 ‘덜 마른 장작’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당시(1985년 발매) 이 노래는 엄청나게 히트해서 초딩부터 성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86년 홍콩에서 개봉한 “영웅본색”에서 주윤발과 적룡, 이자웅이 식당에서 대화하는 씬에서 이 노래의 광둥어 번안곡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희나리’의 뜻이 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고, 노래의 히트와 더불어 자연히 그 뜻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희나리’라는 고유어가 이 정도로나마 살아남은 이유일테다.  
 
8.5 (4.4.5)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8.5 (4.4.5)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8.5 (4.4.5)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7.5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8.5 (4.4.5)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희나리’의 가사 리듬은 4.4조 전통 율격과는 좀 다르다. 송골매의 많은 한국적 록들은 4.4조를 기본으로 3.4조나 4.3조, 3.3조 등으로 변형을 줬는데 ‘희나리(추세호 작사⋅작곡)’는 8.5조와 7.5조의 운율을 띤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7.5 (4.3.5)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5.4 / 8.5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7.5 (3.4.5)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7.5 (4.3.5 / 3.4.5)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희나리’의 구성진 리듬이 왠지 친숙하다 싶었더니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과 닮아 있었다. 아마도 이 율격 또한 한국인의 DNA 어딘가에 새겨져 있으리라. 

송골매와 김소월 시인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송골매 1집의 다섯 번째 트랙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는 김소월 시인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살짝 개사한 노래다. 가곡이 아닌 대중가요에서도 한국의 명시에 곡을 붙인 곡들이 80년대까지는 꽤 있었다.

서정주의 시에 송창식이 곡을 붙여 부른 ‘푸르른 날(1983)’과 정지용의 시에 김희갑이 곡을 붙이고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한 ‘향수(1989)’가 특히 유명한데, 더구나 록 밴드인 송골매가 이보다 5년, 10년이나 앞서서 김소월을 소환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삼스레 깨닫게 됐다.
 
‘40년 만의 비행’에서 방송됐던 ‘하늘나라 우리님’, ‘세상만사’, ‘탈춤’,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빗물’, ‘한줄기 빛’ 등 송골매 노래의 상당수는 이응수가 가사를 썼다. 배철수의 항공대 전자과 후배인 이응수는 송골매 1집의 베이시스트였는데 나중에는 당시 한국 최고의 메이저 음반사였던 지구레코드 문예부장을 했고 지속적으로 송골매에 노랫말을 제공했다. 이응수는 2003년 음악웹진 웨이브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74-75년경 대학가에 김민기 씨를 시발점으로 해서 일종의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통 음악이나 전통 예술에 관심을 갖고 반영하는 현상이라 할까요. 나도 그걸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책도 보고 가사도 쓰고 했어요.” (중략) “한국적 록 같은 문제는 떠나서, 다른 사람들은 탈춤이나 탈 같은 것에 접근하지 않잖아요. 신(新)민요도 그렇고 가요도 그렇고 죄다 사랑타령이죠. 저는 탈춤, 탈, 이런 것들에 대해 영적으로 접근해 가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를 가졌습니다. 평론가들은 한국적 록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난 그렇게 직선적으로 결합하는데는 흥미가 없어요. 음악 자체는 밴드의 록 음악이지만, 우리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모토를 가진 것뿐이에요.”

이응수는 동기생인 라원주와 작사·작곡 콤비를 이뤄 송골매의 많은 곡을 만들었는데, 개인적으로 ‘40년 만의 비행’에서 뜻밖의 발견은 배철수가 부른 ‘이빠진 동그라미(라원주 개사· 작곡)였다.

라원주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작가 쉘 실버스타인의 우화 “더 미싱 피스(The Missing Piece)”를 4.4조의 운율에 맞춰 쉽고 평이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각색한 철학적 가사는 함춘호의 기타(“헤어질 결심”!)와 어울리며 큰 울림을 주었다. 
 
한 조각을 잃어버려 / 이가 빠진 동그라미
슬픔에 찬 동그라미 / 잃어버린 조각 찾아
대굴대굴 길 떠나네

어떤 날은 햇살 아래 / 어떤 날은 소나기로
어떤 날은 꽁꽁 얼다 / 길 옆에서 잠깐 쉬고
에야디야 굴러가네

어디 갔나 나의 한쪽 / 벌판 지나 바다 건너
갈대 무성한 늪 헤치고 / 비탈진 산길 낑낑 올라 
둥실둥실 찾아가네

한 조각을 만났으나 / 너무 작아 헐렁헐렁
다른 조각 찾았으나 / 너무 커서 울퉁불퉁
이리저리 헤메누나

저기 저기 소나무에 / 누워 자는 한 쪼가리
비틀비틀 다가가서 / 맞춰보니 내짝일세
얼싸 좋네 찾았구나

기쁨에 찬 동그라미 / 지난 얘기 하려다가
아! 입이 닫혀 말 못하니 / 동그라미 생각하네 
이런 것이 그렇구나

냇물가에 쪼그리구 / 슬퍼하던 동그라미
애써 찾은 한 조각을 / 살그머니 내려놓고
데굴데굴 길 떠나네
길 떠나네 길 떠나네 길 떠나네 길 떠나네

이 노랫말에서는 특히 ‘이런 것이 그렇구나(영어 원문은 ‘So that’s how it is’)’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게 수치로 기술되고 명확한 언어로 설명돼야 하는 요즘 세상에서 동그라미의 깨달음을 모호한 언어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게 오히려 명쾌한 인식을 선사했다. 가사 한 줄에 이렇게 통쾌할 데가! 
 
*  *  *

당대 최고의 인기 그룹이 이런 노랫말을 쓴다는 건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송골매의 음악에서 우리말을 느.꼈.다. 나는 우리말 지상주의자가 아니지만 어떤 오래된 우리말들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언어 감수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개념을 탑재하고 들어오는 외래어 만큼이나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K-콘텐츠가 득세하고 있는데 우리말이 가진 아름다움과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는 노래 가사는 줄어든 것 같아 무척 아쉽다. 언어는 인식을 반영한다. 언어를 만들어내는 힘이 가장 큰 문화의 힘이자 지식 생태계의 힘이다. 

‘어그레시브하게 디벨롭하기에는 캐파가 안되니 새롭게 어프로치해서 니즈를 충족하고 고객 인게이지먼트를 끌어올리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곰뷔 찾고 님뷔 찾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 생활에서 ‘클리어하게’ 들리는 판이니, 우리말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늘어놓는 게 ‘40년 만의 시대 역행’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중 문화의 힘이 너무도 큰 시대이니 이렇게 넋두리를 적어 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송골매’라는 그룹명 자체는 외국어인 몽골어 ‘셩허르’에서 왔다.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 때 고려로 들어온 말이라 한다. 송골매는 그룹 송골매가 결성된 한국항공대의 상징이고, 칭기스칸을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몽골의 국조(國鳥)이기도 하다.

매는 아주 고집이 센 동물로 ‘옹고집’이라는 말도 매응자를 쓴 응(鷹)고집에서 나왔다. 아무 때나 고집을 부리면 안되겠지만(그런 건 옹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라 부른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기는 기고 아닌 건 아니라고, 바꿀 건 바꿔야 하지만 간직할 건 간직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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