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일반인도 가담한 병역 비리…왜 뇌전증 이용했나

[취재파일] 일반인도 가담한 병역 비리…왜 뇌전증 이용했나
병역 비리, 어찌 보면 스포츠나 연예계 관계자들에게만 있을법한 범행입니다. 어찌 보면 맞는 가정입니다. 지난 2004년 프로야구 선수 수십 명이 '사구체신염'을 이용한 병역 비리가 적발됐고, SBS 보도 이후 병역 비리에 가담했다고 스스로 밝힌 OK금융그룹 구단 소속 조재성 선수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 외에도 다른 종목 선수도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이 때문에 온라인에선 유명 인사 중 누가 연루됐는지 찾는 '숨바꼭질'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비리에 가담한 사람들이 모두 사회 유명 인사일까요? 병역의 의무는 유명인이든 아니든 모두 똑같기 때문입니다. 취재 과정 속에서 전 최근 합동수사팀이 꾸려진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을 찾은 한 안타까운 남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비뚤어진 '부정(父情)'…브로커 구 씨와의 만남

매년 뇌전증 이유 병역 면제 200명 안팎

'716호, 참고인 조사.' 중년 남성이 청사 1층을 지키는 방호원에게 한 말입니다. 아직 출입 등록이 안 됐다는 방호원의 말에 남성은 사무실 직원의 전화 한 통을 우두커니 기다렸습니다.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 조심스레 묻자 '병역 비리로 조사를 받으러 왔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생각해보니 716호, 합동수사팀의 사무실 중 한 곳입니다.

신분을 밝히고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를 묻자 남성은 '아들과 조카가 병역 비리 대상자'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범죄의 구렁텅이로 이들을 인도한 사람은 구속기소 된 병역 브로커 구 모 씨였습니다.

과체중이었지만 현역 3급 판정을 받았던 그의 아들은 여러 해 동안 군납업체서 근무했는데, 특정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병역 특례 요원이 되긴 어려웠습니다. 병역 문제로 고민하던 아들이 어느 날 남성에게 '4급(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어떻게 하나 싶어서 묻자 아들이 보여준 건 구 씨의 블로그와 네이버 엑스퍼트였습니다.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직접 상담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구 씨는 현란한 대화 솜씨와 함께 '체중에 문제가 있어 가능하겠다'고 말했다는 게 남성의 얘깁니다. 보충역 판정의 대가로 구 씨가 원한 금액은 170만 원. 아들의 병역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는 마당에 뭘 못할까요. 아버지는 돈을 냈고 일은 원하는 대로 해결됐습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습니다.
 

조카까지 소개한 남성…A/S 하듯 영업한 브로커

병역비리

남성이 구 씨에게 부탁한 다음 대상자는 조카. 조카는 가족이 오랜 시간 해외서 지내 한국어 구사가 서툴렀는데, 성인으로 접어들고 병역 얘기가 나오니 걱정이 되는 겁니다. 이를 알게 된 남성은 구 씨에게 '방법이 없겠는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건수를 물었다고 생각했는지 구 씨는 이례적으로 출장까지 오는 등 적극적으로 응했습니다.

구 씨가 꺼내든 건 다름 아닌 뇌전증. 검찰 관계자의 표현을 빌리면 "구 씨의 (범죄) 주 전공은 뇌전증"이었는데, 이를 드디어 선보인 겁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달콤한 표현까지 덧붙였습니다. 이를 대가로 요구했던 금액은 수천만 원. 예상치 못한 금액에 남성이 망설이자 구 씨는 요구치를 900만 원까지 낮췄고 악마와의 거래가 성사됐습니다.

이대로 끝날 줄 알았는데, 구 씨는 마치 애프터서비스하듯 남성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전화에서 '4급 판정을 받은 아들을 5급으로 만들어주겠다' 제안한 겁니다. 남성은 "내가 미쳤지, 혹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나 해보자 싶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남성의 OK 사인에 구 씨는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구 씨는 이번에도 전가의 보도 마냥 뇌전증을 제시했습니다. 함께 제시한 금액은 500만 원. 거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그 대가로 구 씨는 남성과 아들에게 'OO지역선 OO대병원, OOO병원, OO병원을 가라', 'OO교수를 찾아가라'고 조언했습니다. 구 씨가 적발되지 않았다면 남성의 아들은 5급 판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뒤늦은 후회…오직 자식 걱정뿐


짧지만 긴 대화가 끝나고 남성은 마중 나온 검찰청 직원과 함께 청사로 들어갔습니다. 다시 만나게 된 건 몇 시간 후. 수사팀은 남성에게 구 씨와 나눈 메신저 대화, '수수료'가 오고 간 계좌 내역 등을 제시했습니다. "피의자로 입건되는 것까지 각오하고 있다"는 남성. 얼굴엔 주름살 마냥 후회가 덕지덕지 묻어났습니다.

이 와중에도 아버지는 자식 걱정이 전부였습니다. 이번 사례와 같은 병역 면탈 행위의 처벌 수위가 벌금형 없이 최소 징역형이라는 얘기를 들었는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이미 아들과 조카는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은 상황. 구 씨와 대화한 녹취파일이나 메신저 대화 내역이 있는지 묻는 저에게 남성은 "혹시라도 아들에게 도움 될 수 있을까" 물을 뿐이었습니다.
 

왜 하필 뇌전증?…"판독 어려워"

병역 면탈 브로커 녹취록에 드러난 수법

이렇듯 병역 비리에 가담한 사람들은 꼭 유명 인사만 있는 건 아닙니다. 병역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일반인들도 여럿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뇌전증'을 이용했다는 겁니다. 뇌전증은 뇌신경 세포의 이상으로 의식을 잃거나 발작 등의 증세를 일으키는 질환입니다.

그런데 이 뇌전증이 사람에 따라 병세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약만 먹어도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는 수준이 국내 뇌전증 환자의 절반 이상입니다. 위의 표는 보건복지부에서 제시하는 '장애 정도 판정 기준'입니다. 여기서도 뇌전증의 병세 범위를 넓게 보고 있습니다.

뇌전증을 판독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입니다. MRI나 CT, 그리고 뇌파 검사 등 각종 장비를 동원해도 뇌전증인지 파악할 수 있는 건 절반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렇다 보니 환자와의 대화나 병력 등을 토대로 파악하고 장기간 추적 관찰하는 게 최선인 상태입니다.

결국, 뇌전증 판독은 의사의 실력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도 모든 병의 전문가가 될 순 없습니다. 대한뇌전증학회에 소속된 의사 수가 500명 밑인 상황에서 전문 분야가 아닌 의사는 판독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심지어 전문가마저도 틀릴 때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유명 뇌전증 전문센터의 오진율이 10%에 이른다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병세의 범위도 넓고 의사의 판독도 어려운 상황을 브로커 구 씨는 교묘히 파고들었습니다. 뇌전증의 특성상 언제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일부러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하거나 뇌파 검사 도중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꼬집으라고 가담자에게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뇌전증 전문의가 아닌 의사로선 예방적 차원서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겁니다.
 

예방은 어떻게?…제도 개선에 주안점 둬야


이번 사건과 관련해 구 씨처럼 병역 브로커 역할을 수행한 인물 1명이 추가로 적발됐지만, 아직까지 연루된 의료인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서 구 씨와 연관된 의료인이나 병무청 관계자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구조적인 변화입니다. 실제 뇌전증 환자들과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느끼지 않도록 보다 촘촘히 병역 면탈자를 적발하는 방법을 도출해야 합니다. 예컨대 의사의 판독이 있더라도 문제가 있는 대상자를 거를 수 있도록 병역 검사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전문가 사이에선 뇌전증의 경우 의사의 판독 실력에 기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련 분야 전문의의 진단서만 인정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제시됐습니다. 법령 개정이 필요해 보이는 데 병역 면탈을 막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조치입니다. 이번 수사를 통해 다시는 병역 비리가 화두로 오르지 않도록 제도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