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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그들은 왜 쿠데타를 꿈꿨나

건강하고 개방된 민주사회를 좀먹는 바이러스의 창궐

베를린의 독일 연방의사당. 12월 7일. 사진=게티이미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사당. 의원내각제 국가인 독일의 심장부다. 그런데, 특수부대 출신의 극우단체 조직원들이 총과 폭탄, 칼 등으로 무장하고 이곳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목표는 올라프 숄츠 총리.
독일 연방의사당 내부, 지난 11월 30일, 사진=게티이미지지금 존재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을 부정하는 쿠데타 모의세력은 숄츠 총리를 처형하고, 왕이 다스리는 새로운 국가를 선포할 계획이었다. 이들이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던 인물은 올해 71세인 옛 귀족 하인리히 13세. 하인리히 13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제국의 시민들(Reichsbürger)'이라는 극우단체 소속이다.
의사당에서 질의응답 중인 올라프 숄츠 독일총리. 사진=게티이미지독일 연방 보안당국과 경찰은 12월 7일 일제검거 작전을 벌여 하인리히 13세와 20여 명의 '제국의 시민들' 조직원을 체포하고 베를린을 비롯한 전국 100여 개 이상의 지점에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전현직 특수부대원과 경찰이 쿠데타 모의세력의 주축인 만큼, 총과 폭탄, 나이트비전 고글, 전투용 헬멧, 석궁, 각종 도검류, 그 외 다양한 군사장비, 통신장비가 압수됐다.

이들의 주 아지트인 하인리히 13세의 성채에서는 10만 유로 이상의 현금과 금괴, 은괴, 그리고 '제국의 시민들'의 적으로 간주되는 정치인과 언론인 18명의 명단도 나왔다. 올라프 숄츠 총리(Olaf Scholz)와 아날레나 베어복(Annalena Baerbock) 외무장관도 그 명단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인리히 로이스, 일명 하인리히 13세. 출처: 독일 트위터 @DietmarBartsch명단에 적힌 인물들을 이들이 어떻게 하려 했는지 아직 구체적인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숄츠 연방총리를 처형하려 했다는 걸 감안하면 비슷한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압수된 무기의 수량 역시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지난해 적발된 다른 극우단체 '북쪽의 십자가(Nordkreuz)' 조직원 한 명의 집에서만 5만 발 넘는 탄약이 압수된 바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량일 것이다.

'제국의 시민들'은 2020년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코로나 백신 반대 시위대에 숨어 연방의사당에 난입하려다 무산된 바 있고, 올해 들어서도 두 차례 보건장관 등 각료들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가 실행을 연기한 것으로 독일 치안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2016년에는 무기를 사 모으던 회원이 경찰에 쫒기다가 총격전을 벌여 경찰관 1명을 살해하는 사건도 있었다.
베를린 연방의사당 앞, 독일 극우들의 코로나 규제 반대시위. 2020년 8월29일 , 사진=게티이미지이들은 왜 쿠데타를 꿈꿨을까?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에 무슨 불만이 있을까?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미국 등 서방세계 각국을 곰팡이처럼 좀먹는 극단주의 선동과 혐오 정치, 반엘리트주의, 음모론, 파시즘, 복고정서 등의 잡탕을 만나게 된다. 이건 어느 먼 나라에서 일부 미치광이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런 희극으로 치부하고 말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도 이런 곰팡이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피고 대비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 체제를 폭력으로 뒤엎을 꿈을 꾸는 '제국의 시민들'같은 자들이 득세할 수 있다. 그런 자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는 자들의 게으름을 양분 삼아 증식하는 법이다.

'제국의 시민들'이 원하는 나라는?

'제국의 시민들(Reichsbürger, Citizens of the Empire)'은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망한 후 수립된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금의 통일된 독일연방공화국(FRD, Federal Republic of Germany)도 인정하지 않는다. 2차대전 이후의 독일은 독립된 주권국가가 아니며, 연합국에 의해 세워져 영미 자본을 대행하는 유한회사(GmbH)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모든 음모론에 약방의 감초처럼 언급되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과 같은 유태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현실 속 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실제로는 문제가 많았던 과거 국가를 미화하며 정적의 제거를 주장한다. 껍데기이자 허상에 불과한 지금의 독일 국가가 붕괴하는 날(이른바 'Day X')을 상정하고, '그날이 오면' 총을 들고 일어나, 독일인을 옥죄는 기관들을 싹쓸이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한다. (Day X의 무장봉기를 준비한다는 독일 극우조직은 이 외에도 앞서 언급한 '북쪽의 십자가' 등 여러 개가 있으며, 독일 치안당국은 최근 수년간 총기소지 허가신청이 급격히 증가한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제국 육군을 사열하는 빌헬름2세 황제. 1917년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과거를 모델로 한다. 독일이 1차대전에 패전하기 전, 카이저(황제)가 군림하며 세계열강으로 대접받던 제2제국을 다시 구현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쿠데타 세력의 대표 인물인 하인리히 13세의 성채가 있는 바트 로벤슈타인(Bad Lobenstein)에선 지난 7월, 주민들에게 이런 편지가 발송됐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당신도 나라가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있는가? 사실 당신은 나라 없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로이스 왕가(하인리히13세의 가문) 아래 시민권을 신청하라!"

그런데, '제국의 시민들' 열성회원 중에는 국가 기구에 종사하는 자들이 꽤 많다는 게 아이러니다. 이번에 체포된 회원들 중엔 특수부대 전현직 요원들 뿐 아니라 판사 겸 전 국회의원도 있다.
이번 쿠데타 모의에 연루돼 체포된 '제국의 시민들' 회원 비르기트 말작-빈케만이
2020년 12월 연방의회에서 발언하던 모습.
판사이자 전직 의원(극우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소속)이다. 사진: 게티이미지

들이 러시아의 도움을 받으려 한 이유는?

하인리히 13세는 러시아 외교관들에게도 접근했다. 러시아 사람인 여자친구 비탈리아 B를 통해서다. 실제로 성공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독일 당국은 발표했다. 러시아 정부도 '제국의 시민들'을 도와준 적 없다고 발표했다.

유럽의 우파는 인종과 문화가 다른 (비백인/무슬림) 난민과 이민자들의 유입에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다. 미투(Me too) 등 페미니즘 운동, 각종 캔슬컬처에도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다. 예전에 백인들끼리 살던 대로 살고 싶다는 것인데, 그런 이들에게 '이상향에 가까운 나라'로 비치는 게 러시아다. 러시아는 미국과 영국에 맞설 수 있는 강대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의 극우세력이 러시아에 호감을 갖는다.

시그널(СИГНАЛ)이라는 이름의 친러시아 그룹이 '러시아로 이주할 때 (Time to move to Russia)'라는 제목으로 올여름에 배포한 영상은, 유럽 극우파들에게 러시아가 어떤 나라로 비치는지 잘 보여준다. "여자가 예쁘고, 전통 가치가 살아있고, 기독교를 믿고, 그런 얘기 해도 비난받지 않고, 전기와 가스가 싸고, 보드카가 넘치는 러시아로 오라. 곧 겨울이 온다"는 게 영상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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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쿠데타까지 꿈꾼 건 아니었는데....

'제국의 시민들' 회원은 독일 동남부를 중심으로 2,000명 수준이었다가 코로나 봉쇄 기간을 거치며 전국에 걸쳐 2만 1천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고 독일 정부는 추산한다. 이 중 5%를 테러 위험이 높은 핵심 분자로 본다. 현재 독일에서 가장 큰 극우 극단주의 세력으로 꼽힌다.
12월 7일 진행된 쿠데타 모의세력 일제 검거작전, 독일 칼스루에, 로이터TV이 단체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볼프강 에벨(Wolfgang Ebel)로 알려져 있다. 에벨은 서베를린의 철도노동자였으나 1980년대 파업에 참가한 뒤 해고됐고, 몇 번 소송을 했으나 공무원 자격 회복에 실패했다. 그러자 자신을 제국의 수상이라 부르며 추종자를 모았고, 그들에게 제국 신분증과 여권을 팔았다고 한다. (이런 식의 정치 모델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코로나 이전에 이들이 부린 말썽은 주로 납세 거부, 독일여권 반납, 대신 자신들을 독일제국 시민으로 인정하는 증명서 발급을 요구하기 등이었다. 이때 출생지를 '프로이센 왕국' 또는 '바이에른 공국'으로 써달라고 주장했다는데, 2차대전 이후의 독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그렇다. 연방정부와 중앙정치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변두리의 이상한 사람들 취급을 받던 이들이 한 단계 도약 아닌 도약을 하게 된 건, '고귀한 혈통'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 '하인리히 13세'와 결합하게 되면서부터다.
비엔나의 한 행사에서 방송인터뷰 중인 하인리히 13세. 연도 미상.
출처: Federation of World Peace and Love

쿠데타 성공했으면 독일의 왕? 하인리히 13세는 어떤 인물?

하인리히 13세(71)는 독일제국 통일 전 동남부 튀링겐 지역에서 작은 나라를 다스리던 '로이스(Reuss, 독일어 표기로는 Reuß)' 가문의 후예다. 로이스 가문의 역사는 7백 년이 넘지만, 그는 2차대전 패전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그가 세상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왕족과 귀족의 신분이 폐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이름은 '하인리히 로이스'인데, 고귀한 가문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인리히 13세로 자칭하고 다닌다.
스프 뉴스쉽그의 가족이 갖고 있던 튀링겐 주의 영지와 저택은 동독의 공산정부가 국유화했다. 동서독 통일 이후 하인리히는 수년에 걸쳐 이를 돌려받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지리한 송사 끝에 2017년 3백만 유로 상당의 배상을 받긴 했지만 소송비용으로 날린 돈이 많아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가구와 미술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부동산은 하나도 되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독일 사법시스템이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며 점차 극단적 주장에 경도되었고, '제국의 시민들'에 합류하게 됐다.

최근 수년간 그는 가문의 근거지인 튀링겐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의 부촌에서 혈통을 내세워 고급 부동산 컨설팅 및 중개업을 운영해 왔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넘나들며 옛 귀족 출신 부자들을 고객으로 만든 뒤 '제국의 시민들'의 주장을 설파하고 기부금을 모았다. 쿠데타 모의의 본부이자 무기창고로 쓰인 바트 로벤슈타인의 성채도 그런 과정에서 구입한 것이다.
하인리히 13세가 구입한 사냥용 별장 용도의 성채. 바트 로벤슈타인, 12월 8일. 게티이미지
2019년 1월,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취리히에서 열린 '월드웹포럼'에 연사로 나가게 된다. 인터넷과 비즈니스 관련 컨퍼런스인데, 그는 엉뚱한 연설을 한다.

<어느 고귀한 혈통의 흥망>이라는 제목의 15분짜리 연설에서, 그는 극우세력에겐 익숙한 음모론적 주장을 쏟아냈다. 1차대전은 국제자본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 황제에게 강요한 전쟁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로스차일드 가문이 뒤에서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다음은 당시 연설의 주요 내용이다.
스프 뉴스쉽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독일이란, 허상일 뿐이다."

"과거에는 문제가 생기면 왕이나 대공에게 찾아가면 해결해줬다. 지금은 누구에게 얘기해야 하느냐? 국회의원? EU? 잘 해봐라!"

"2차대전 종전시 평화협정이 없었으므로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은 유효한 존재 근거가 없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귀결은 독일을 카이저(황제)의 시대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전한 독일 매체 DW에 따르면, 컨퍼런스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연설에 큰 소란이 벌어졌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청중도 다수였다고 한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에, 로이스 가문의 종가에서도 그와 거리를 두게 된다. 종손인 하인리히 14세는 뉴욕타임스 로이터 등 서구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매체의 인터뷰를 종합한 내용이다.)

'로이스 가문의 계승권이 있는 남성들은 모두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그 사람은 왕위계승 순위 17위다. 헌법이 바뀌지 않아 왕과 귀족의 신분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우리들 16명이 죽어야 그에게 차례가 돌아간다는 뜻이다. 아마도 수년간 계속된 송사에도 불구하고 집안 재산을 되찾지 못해 심사가 뒤틀리면서 극단적 주장에 휩쓸린 것 같다. 허무맹랑한 소리만 일삼는 노인네라 가문에서 내놓은 지 오래다.'
자택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체포된 하인리히 13세. 12월 7일. 로이터TV-연합옛 동독 지역은 통일 이후의 상대적 빈곤에 대한 불만, 지나치게 리버럴한 문화에 대한 혐오 탓에 '옛날이 그래도 살기 좋았지'라는 정서가 강하다. 옛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선택적 망각과 뒤틀린 향수, 경제-사회적 무기력과 실업에 따른 박탈감이 짙게 깔려 있는데, 그러다보니 문제의 하인리히 13세처럼 과거의 영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묘하게 먹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독 주민들은 코로나로 인한 봉쇄를 겪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를 주무르는 엘리트 계층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키웠다. 집 밖에 나갈 수 없었던 코로나 초기, 이들은 방구석에서 인터넷을 통해 미국의 극우 음모론자들과 연결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실체 없는 위협인데 그 위험성이 과장됐으며 백신은 음모라는 주장이 이들의 구미에 맞았다. 이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설명할 보다 풍성하고(?) 황당한 음모론들을 흡수하고 폭력성도 키워나가게 된다.

큐아논(Q Anon)과 제국의 시민들, 그 환장의 콜라보

미국의 큐아논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보수 음모론자들의 잡탕이다. 2021년 1월 트럼프 (당시까지는 현직 대통령)의 선동으로 대통령 선거를 뒤집으려고 의사당으로 몰려갔던 폭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 극우세력의 의사당 난입 폭동. 워싱턴DC, AFP, 게티이미지큐아논은 글로벌 엘리트들의 '딥 스테이트(Deep State)'가 실제 미국을 운영하는 힘이라고 본다. 현대 독일의 배후에는 유대인 자본 네트워크가 있다는 '제국의 시민들'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 그 외에도 반유대주의라든가, 인종과 문화가 다른 난민이나 이민의 대량유입에 대한 적대감이라든가, 폭동(putsch)에 의한 정부 전복을 꿈꾼다든가 하는 요소들이 서로 통한다.

큐아논은 트위터나 각종 메신저 등 소셜미디어를 타고 온갖 불만세력과 음모론자들을 끌어모으며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실체로 성장했는데, '제국의 시민들'도 이런 성장모델을 따라 배운다. 2022년 봄에는 두 세력이 페이스북 공동 페이지와 텔레그램 공동 채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의 콜라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혼종의 음모론을 퍼뜨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디펜더-유럽 20 훈련 계획 홍보 사진. 2019년에 미 육군이 배포. 코로나19가 터져 실제로는 이런 규모로 열리지 않았다.'디펜더-유럽'이라는 미군과 나토(NATO)의 대규모 연합훈련이 있다. 2020년에 열릴 예정이던 디펜더-유럽 20 훈련은 당시 많은 사람이 사망하던 유럽의 코로나19 상황때문에 급격히 축소됐다. 그런데 '제국의 시민들'과 큐아논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퍼뜨렸다.

'디펜더-유럽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일인들을 해방시켜 주려고 군대를 보내려는 비밀계획이었는데, 독일 연방정부가 가짜 팬데믹을 꾸며내 훼방을 놓고 무산시킨 것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무슨 허튼소리인가 싶지만, 이런 것도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음모론자들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음모론자들이 창궐한 토양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다. 세상이 바뀌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지역(독일은 동독, 미국은 제조업이 붕괴된 일명 '러스트 벨트' 지역), 계층적으로는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을 숙주로 삼아 극단주의 세력이 확산한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의 기성 엘리트에 대한 혐오, 그들이 유지하는 체제와 제도와 과학에 대한 반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코로나와 백신에 대한 허무맹랑한 악성루머도 이런 요인들에 힘입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해 워싱턴DC 의사당에 난입한 큐아논 시위대. 뿔 달린 모자 등 괴상한 차림의남성은 '큐아논 샤만'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진 제이콥 챈슬리. (2021.1.6 게티이미지)현실에 대한 불만이 큰 나머지 '내가 남들만큼 못 사는 건 사회와 국가 탓이다. 그렇게 되게끔 음모를 꾸민 놈들이 오래전부터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외세의 앞잡이다', '누군가 세상을 확 엎어버리면 좋겠다', '동지들과 연대해 내 손으로 세상을 엎어버리면 되지 않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음모론과 극단주의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독일의 극우를 연구하는 학자 로렌츠 블루멘탈러(Lorenz Blumenthaler)는 제국의 시민들을 '게이트웨이 이념'이라 불렀다. 너무나 많은, 그러나 이질적인 사회불만세력들이 제국의 시민들을 통해 뭉치면서 완전히 다른 레벨의 극단주의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어른거리는 히틀러의 그림자

독일 수사당국에 따르면, 이번에 검거된 자들은 현 독일 연방정부를 '딥 스테이트'라고 부르며, 정부를 전복하고 하인리히 13세를 왕으로 세운 뒤 (2차대전 승자인 연합국 대표) 미국과 '평화협정(peace treaty)'을 맺으려 했다. 적법한 평화협정 없이 끝난 전쟁의 결과물이므로 현대 독일은 존립 근거가 없다는 주장은 하인리히 13세가 2019년 취리히 연설에서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히틀러의 주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나치독일은 2차대전을 벌여나가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상호 불간섭'을 주장하며 싸우지 않으려 했다. 미국 대륙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미국도 유럽에서 독일이 하는 일에 신경 끄라는 것이었다.
1923년 뮌헨 비어홀 폭동 당시 바이에른 주정부 관계자들을 연행하는 나치 병사들. 독일 연방 아카이브'제국의 시민들'은 나치 등장 이전의 독일제국 복원을 목표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를 연상시키는 점이 많다. 우선, 무장폭동(독일어로 풋치, putsch)을 통한 권력 탈취는 히틀러가 택했던 모델이다. 히틀러는 1923년 11월 8, 9일 뮌헨의 비어 홀에서 나치 행사를 열고 이곳에 바이에른 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 모은 뒤 무력으로 협박해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한다. 히틀러도 당시에는 이런 짓이 처음이라, 일을 어설프게 진행하다 결국 주 정규군에게 진압을 당하고 감옥에 가게 되지만, 히틀러는 이 일로 전국적인 인물이 된다. (그때 감옥에서 쓴 책이 <나의 투쟁>이다.)

이후 나치가 처음 지방권력을 획득한 곳이 '제국의 시민들'과 하인리히 13세의 근거지인 튀링겐 주다. 나치 당은 1930년 튀링겐 주의회 선거에서 무시할 수 없는 표를 얻어 우파 연정에 참여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정부와 사법부에 나치 당원을 심고 합법선거와 불법 폭력을 넘나들며 독일 전체를 장악해 나갔다.

이번 '제국의 시민들' 검거 작전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라는 극우정당 소속의 판사 겸 전직 의원도 체포됐다고 앞서 설명했는데, 지금 이 극우정당은 튀링겐 주의 최대 정치세력이다. 내년이면 뮌헨 비어홀 폭동의 100주기가 된다. 과거 역사를 기억하는 독일 사람들로서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100년 전 히틀러의 집권 과정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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