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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빌라왕'이라 불리던 투기꾼의 죽음 이후 벌어지는 일들

[취재파일] '빌라왕'이라 불리던 투기꾼의 죽음 이후 벌어지는 일들
지난 10월, 서울 종로의 한 모텔에서 43살 김 모 씨가 숨졌다. 김 씨는 평소 당뇨 등 지병이 있었고, 사인은 지병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난 김 씨의 죽음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김 씨는 서울과 수도권에 무려 1천 채가 넘는 다가구와 빌라를 보유해 이른바 '빌라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하지만,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주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건지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배후로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김 씨가 속칭 '바지사장 아니냐'는 설이 무성하다. 경찰도 김 씨 사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모르는 바 아니라서 범죄 혐의점 등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 씨의 사망을 둘러싼 세간의 의혹과 궁금증은 차차 해소되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끝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는다. 김 씨가 보유한 수많은 주택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과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전세보증금에 대한 이야기다.

빌라왕 김 모 씨 사건

돈 없다며 연락두절…뒤늦게 알게 된 사망 소식


인천 남동구의 한 빌라에 거주하는 김병진 씨. 2020년 9월, 신혼집을 알아보던 중 현재 살고 있는 빌라의 매물을 보게 됐다. 집 내부가 깨끗했고, 전세금도 2억 원 미만이라 대출을 받으면 자금 조달에 큰 무리가 없었다. 집주인과 계약서를 썼고, 전세금 대부분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신혼부부 대상 안심 전세대출을 통해 마련했다. 대출과 함께 전세금 반환보증보험에도 가입했다. 혹여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 안전하게 보험을 들어 놓은 것이다. 안심 대출에 보험까지. 이 정도면 안전하다고 믿었다. 

10월 5일 계약한 신혼집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사 바로 다음 날인 10월 6일, 집주인이 정 씨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새 주인은 김 씨였다. '빌라왕' 바로 그 김 씨다. 물론 김병진 씨는 새 주인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계약 만료를 다섯 달 앞둔 올봄, 김병진 씨는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만기 전 이사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집주인은 "신용이 막혀서 안 된다", "나는 돈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며 전세금을 돌려받고 싶거든 직접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전화는 일절 받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집주인 앞으로 내용 증명을 보낸 뒤, 등기부등본을 떼 봤다. 계약 당시 깨끗했던 등기부등본에는 압류와 가압류 세 건이 걸려 있었다.

수도권 일대 빌라 1천채 보유한 임대업자 '빌라왕' 사망, 전세보증금 반환 차질

결국 만기까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김병진 씨는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 임차권등기는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다른 주택으로 이사해야 할 경우, 기존 주택에 대한 '대항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등기부등본에 보증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재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세입자는 임대인, 즉 주인 동의를 받지 않아도 단독으로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할 수 있고, 김병진 씨는 임차권등기 승인을 확인한 뒤 절차에 따라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보증 이행을 신청했다.

하지만 보증은 이행되지 않았다. 대신 주택도시보증공사는 김병진 씨 앞으로 한 장의 서류를 보내왔다. 추가 심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추가 심사를 언급한 서류의 일부다.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일과 임차권등기 등기일 사이에 임대인이 사망한 경우 임차권등기의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 추가 심사가 진행 중임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전세금 안심대출보증발급 약관 제9조에 의거 당해 추가 심사가 종료될 때까지 보증채무의 이행을 유보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서부관리센터)

이 부분에 대해 김병진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병진 씨는 집주인이 숨지기 전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 이때까진 김병진 씨와 집주인 사이에는 권리관계가 성립한다. 하지만 등기가 결정된 시점에는 집주인이 이미 숨진 상태가 돼버렸다. 이 때문에 권리관계가 모호해진 만큼 추가 심사가 필요하다고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설명했다고 한다. 김병진 씨는 이미 권리관계가 형성된 목적물에 대해 추가 심사가 왜 필요한 것인지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추가 심사 상태로 어느덧 한 달 넘는 시간이 흘렀다.
 

"30대 신용불량자가 될 처지가 됐어요"


비슷한 시기 전세 계약을 한 또 다른 30대 피해자의 사연은 더 딱하다. 이 모 씨(가명)는 2020년 5월, 서울 강북구 한 빌라에 전세를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계약 후 얼마 안 돼 집주인이 '빌라왕' 김 씨로 바뀌었다. 계약 만료가 돼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던 김 씨는 연락을 했더니 자신은 신용불량자라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답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이 씨 역시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보증이행을 신청했다. 그런데 또다시 보증은 이행되지 않았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 계약 기간 중 집주인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집주인은 망자인 상황. 이 씨는 주택도시보증공사에 그 어떤 자료도 제출할 수 없었다.

이 씨는 이달 23일 이후에는 대출 연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될지도 모른다. 급한 대로 은행에 대출 연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보증 이행이 불가능하니 전세 대출을 상환할 방법도 없다. 이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세 사기 피해자 이 모 씨(가명)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상속을 하든지 아니면 재산 관리인이 임명돼 절차를 다시 밟든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누군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전면 스톱'이라고 얘기했어요. 이렇게 대형 사고가 처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왜 아직도 전세에 대한 피해자에 대한 프로세스가 정확하게 구축이 안 되어 있는지 납득이 안 되죠 정말."

HUG 주택도시보증공사

보증금 언제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나 따져보니


두 사람처럼 김 씨로부터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 회원 수는 현재 5백 명이 넘는다.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와 임대차 계약을 맺은 세입자 가운데 주택도시보증공사 보증보험 가입자는 5백여 명. 이 가운데 2백 명가량이 계약 만기 이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세입자들은 매달 수십만 원의 대출 이자를 부담하며 전전긍긍하고 있고, 대위 변제 책임이 있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세입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한 채 늑장을 부린다고 비판한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이렇게 항변한다. 보증 이행을 하려면 절차상 먼저 김 씨의 상속자가 정해져야 한다. 민법은 상속받을 권리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상속 1순위는 배우자와 자녀, 2순위는 배우자와 부모, 3순위는 형제자매, 4순위는 4촌 이내 방계혈족이다. 숨진 김 씨는 배우자와 자녀가 없다. 그래서 현재 2순위인 김 씨의 부모가 상속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김 씨 부모는 상속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다. 더욱이 부모가 상속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피해자가 워낙 많은 데다 국민적 관심도 높은 사안이라, 주택도시보증공사 직접 부모를 찾아가 상속을 권유했지만 김 씨 부모는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회피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부모가 상속을 포기하면, 법원은 상속재산 관리인을 선임하고, 이 관리인이 법적 상속인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상속재산 관리인이 정해지면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들은 비로소 계약 해지 절차를 밟고 보증 이행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상속재산 관리인이 선임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지금까지 견뎌온 것 이상의 오랜 시간을 더 버텨야 한다는 얘기다.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세입자들은 더욱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동산이 경매로 넘어간 다음, 경매 낙찰 대금에서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선순위로 설정된 근저당권이 있으면 순위가 뒤로 밀린다. 이렇게 앞에서 다 가져가고 나면 남는 돈은 얼마나 될까. 숨진 김 씨는 종부세만 60억 원 넘게 체납했고, 빚이 상당한 걸로 알려졌다. 나라에서, 은행에서 먼저 밀린 세금과 빚을 떼가면, 많게는 3억 원까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손에 쥘 돈은 소액일 가능성이 높다.
 

사후약방문이 무슨 소용


이런 상황에 정부가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최근 잇따라 전세 사기 대책을 발표했고,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일요일 직접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원희룡 페북

세입자들도 장관 말을 믿고 싶고, 걱정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전세대출 연장의 경우 은행과의 협의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실제 대출 연장을 신청하면 막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세피해 지원센터도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명시돼 있다. 앞선 전세 사기 피해자들처럼 보증보험에 가입한 경우에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주택도시기금 예산 지원 역시 대출 금리만 조금 낮을 뿐,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자기 돈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부담이 적지 않은 사후 대책일 뿐이다.

빌라왕 김 모 씨 사건

국토부와 법무부 '합동법률지원 TF'를 만들어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는 추가 대책도 나왔다. TF에서는 지연되고 있는 보증금 반환을 앞당기는 방안을 강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애초 전세 사기가 발생할 수 없는 부동산 거래 구조를 만들어 놓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 개인이 1천 채 넘는 부동산을 보유할 수 있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수십억 원을 체납한 투기꾼이 잇따라 부동산을 매수할 수 있는 비정상적 구조를 손대지 않은 채 피해 구제책만 내놓는다면 이것을 '뒷북'이 아니라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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