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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RM과 임윤찬-예술은 새로운 우주를 열어주는 것

윤형근 화백에 대한 절절한 헌사, RM의 'Yun'

RM 솔로앨범 '인디고' 콘셉트 사진(벽에 걸린 그림이 윤형근 '청색') (사진=빅히트 뮤직 제공)

방탄소년단 RM의 솔로 앨범 'Indigo'가 나온 지 열흘 지났습니다. 이 앨범의 맨 첫 곡이 'Yun(윤)입니다. 앨범이 나오자마자 'Yun'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글로 옮기는 데 며칠 걸렸네요. Yun은 바로 RM이 존경하는 고 윤형근 화백을 가리킵니다. 미리 공개된 앨범 사진에서 RM 옆에 걸려있던 그림이 윤 화백의 '청색'이었죠. 'Indigo' 역시 청색을 뜻하는 말이고요.
 
"평생 진리에 살다 가야 한다 이거야. 플라톤의 인문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인데, 진선미, 진실하다는 진(眞)자 하고, 착할 선(善)자 하고, 아름다울 미(美)인데, 내 생각에는 진 하나만 가지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아"

'Yun'은 이렇게 윤형근 화백의 육성으로 시작됩니다. RM은 음반 소개 영상을 통해 '존경하는 화백인 윤형근 선생님의 내레이션과 바두(미국 네오 솔Soul의 여왕으로 불리는 에리카 바두)의 피처링으로 제가 윤 화백님의 작품과 메시지를 통해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담담하게 풀었다'고 말했습니다. 노래 후반부에 다시 윤 화백의 육성이 나옵니다.
 
"그러려면 욕심을 다 버리고, 모든 욕심을 다 버려야 해. 천진무구한 세계로 들어가야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은 해야지. 그게 인간의 목적이거든."
 

윤형근, 어떤 작가이기에

2020년 2월 미국 뉴욕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윤형근 개인전을 찾은 BTS의 RM

윤형근(1928-2007)이 어떤 작가이기에 RM이 이렇게 존경하는 걸까요. 윤형근은 한국 단색화(모노크롬)의 거목으로 꼽히는 화가입니다. 그는 한국 추상 거장인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이기도 하죠. 1960년대와 70년대 초기에는 장인이자 스승인 김환기의 영향이 뚜렷한, '환기 블루'의 색채 추상을 많이 그렸지만, 이후 그가 '천지문(天地門)'으로 부른 특유의 작품 세계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 여러 차례 복역과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1947년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국립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에 제적당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 시위 전력 때문에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1956년에는 피란 가지 않고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습니다.

1973년, 그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갑니다. 서슬 퍼런 유신 체제, 당시 권력자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도움으로 부정 입학했던 학생의 비리를 따졌다가 고초를 겪은 겁니다. 권력은 그가 쓰고 다니던 모자가 모택동 모자와 비슷하게 생겼다며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 1973년을 기점으로 그의 작품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의 나이 45살 때입니다. 1974년 김환기의 죽음도 큰 영향을 줬습니다. 밝은 채색 그림은 사라지고 검은색 기둥이 화폭을 가득 채우는 단색조의 그림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하늘을 뜻하는 청색(Ultramarine), 땅을 뜻하는 암갈색(Umber)을 혼합해 먹색에 가까운 오묘한 검정색을 만들어 캔버스 위에 큰 붓으로 찍어 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바로 '천지문(天地門)'입니다. 그는 1977년 작가노트에서 '천지문'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그림 명제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는 하늘이요, 엄버(Umber·암갈색)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구도는 문(gate)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예술가의 응답

윤형근 전시회를 찾은 BTS의 RM

저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윤형근 회고전에서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처음 만났는데요, 검정색 기둥 사이로 문이 열려 마치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듯했습니다. 당시 공개된 다큐멘터리에 '왜 그렇게 붓으로 쭉쭉 긋기만 했냐'는 질문에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서 그랬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의 예술은 이렇게 시대와 역사에 대한 예술가의 응답이었던 거죠.

당시 전시에서는 그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듣고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 '다색'이 처음 공개됐는데요, 이 작품에선 검은색 기둥이 쓰러져 있습니다. 기둥 주위에 흩뿌려진 검은색이 마치 핏자국 같기도 합니다. 작가가 느꼈을 분노와 울분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저한테도 생생하게 전해져 와서 그림 앞에 한참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년 작품들은 검은 기둥을 넘어 화폭을 모두 검은색으로 채운 게 많은데요, 물감의 농도를 조절해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번짐과 퍼짐의 효과를 내고, 겹겹이 쌓아 올린 색깔의 층이 마치 깊은 땅 속 같은, 무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1990년 전시 때 작가 노트에서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된다"고 썼습니다.
 
그는 말했지 늘, 먼저 사람이 돼라
예술 할 생각 말고 놀아 느껴 희로애락
What is it with the techniques
What is it with the skills
What is it with all the words
In your lyrics that you can't feel?
나 당신이 말한 진리가 뭔지 몰라 다만
그저 찾아가는 길 위 나의 속도와 방향
You're dead
But to me you the fuckin' contemporary
여전히 이곳에 살아서 흘러 permanently
이 모든 경계의 위에 선 자들에게
반드시 보내야만 했던 나의 밤을 건네
반짝이는 불꽃은 언젠가 땅으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로
시커멓게 탄 심장
재를 뿌린 그 위에 시를 쓰네
사선을 오갔던 생과
당신이 마침내 이 땅에 남긴 것들에게
나 역시 그저 좀 더 나은 어른이길.

(RM 'Yun' 중에서)
 

예술은 새로운 우주를 열어주는 것(feat. 임윤찬)


RM이 윤형근 화백에게 바치는 절절한 헌사 같은 이 가사를 곱씹으며, 저도 윤 화백의 작품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그의 작품과 생전의 기록을 모은 책 '윤형근의 기록'을 주문했습니다. 지난해 발간된 이 책은 대중적 인기를 끌 만한 책은 아닌데, 요즘 예술 분야 주간 베스트에 올라있더라고요. RM의 앨범이 나오면서 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난 모양입니다.

최근 피아니스트 임윤찬 기자간담회 갔다가 들었던 인상적인 말이 생각납니다. 임윤찬은 음악 기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그분들이 몰랐던 또 다른 우주를 열어 드리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죠. 임윤찬의 연주는 많은 이들에게 몰랐던 또 다른 우주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음악뿐 아닐 겁니다. 예술이 그런 거죠. 윤형근의 삶과 작품 세계가 RM에게 또 다른 우주를 열어줬고, 이 우주를 껴안은 RM의 음악 역시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우주를 열어주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번 주에 녹음하는 SBS보도국 팟캐스트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12월 14일 공개 예정)은 그래서 미술평론가이자 인문학자이며 방탄소년단의 오랜 팬이기도 한 이진숙 씨를 초대해 윤형근 화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합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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