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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풀꽃'은 재수 끝에 광화문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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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는 짧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란 시에서 이렇게 단 세 문장으로 우리를 사로잡기도 했죠. 그리고 이 시편을 책이 아니라 교보생명 광화문 빌딩에 걸린 글판을 통해 처음 본 분들도 많을 겁니다. 벌써 30년 넘게 광화문 광장을 지키며 시민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는 광화문 글판 중 시민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은 글판이기도 하니까요. '글 맛집'이라고 할 만한 광화문 글판,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들까요? 10년 넘게 글판 실무를 맡아 온 교보생명 강문영 과장에게 뒷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안녕하세요. '인생 한 문장' 광화문 글판을 담당하고 있는 교보생명 강문영입니다. 문안 선정, 그다음에 디자인, 설치, 기타 기념 사업까지 해서 광화문 글판 관련해서 총괄적으로 전 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광화문 글판 문안 선정에 참여를 했습니다."

Q. 광화문 글판,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봄·여름·가을·겨울 네 계절에 맞춰서 운영을 하고 있는데요. 시민들이 제안해 주신 작품이 600편에서 많게는 2,000편까지 접수가 되거든요. 시민을 대표하는 광화문 글판 문안선정위원회 분들께서 심사를 거쳐서 최종 문안 후보작 두 작품을 고르시고요. 교보생명 브랜드 통신원들이 최종작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해서 문안이 선정됩니다."

여기에 디자인을 더하면 글판이 완성됩니다. 문안선정위에는 문인부터 언론인, 출판 전문가까지 참여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한강, 시인 정호승 등 시민에게 친숙한 문인들도 참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잔잔한 위로와 감동을 주는 광화문 글판의 첫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광화문 글판은 1991년에 시작이 됐거든요. 대산 신용호 선생(교보생명·문고 창업자) 아이디어로 시작이 됐어요. 교보문고에서 운영하는 걸로 오해를 하시거든요. 교보생명이 운영하는 거고요. 처음에 90년대에는 시민들에게 어떤 계몽적인 메시지, 우리 모두 함께 경제 활력 찾자, 개미처럼 모아라 길지 않다, 이런 메시지들을 많이 줬었거든요."

글판에 위로를 담기 시작한 건 IMF 외환위기가 온 뒤, 축 처진 어깨로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IMF 외환위기가 오고 나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감싸주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걸 깨달으셨던 것 같아요. 여기 광화문에 있는 사람들한테 위로를 주자는 생각으로 시심을 담은 문학 작품이 걸리게 됐어요. 그때부터 반응이 굉장히 폭발적이었고…."

그렇게 교보생명 광화문 빌딩에 걸린 글은 어느새 100편이 넘었습니다. 실무만 14년차, 강 과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글판은 무엇일까요?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2012년 봄편 나태주 선생님 '풀꽃'이거든요. 사실 그 문안은 2011년 봄에 제가 후보로 제안을 드렸던 작품인데 문안선정위원회에서 1차에서 탈락했어요. 근데 그다음 해에 한 번 더 제안을 드렸고 그게 걸렸는데 정말 그 시의 시구처럼 자세히, 두 번째로 자세히 들여다 봤는데 이게 정말 광화문 글판의 메가 히트가 된 거죠. 지금 10년이 넘었는데도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글판이 나태주 선생님 '풀꽃'이거든요."

코로나19가 한창이었던 지난해엔 BTS가 노랫말로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 글판을 업사이클링해 굿즈를 만들어 판매한 뒤 판매액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Q. 좋은 글판이 갖춰야 할 요소가 있나요?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세 가지를 고려하거든요. 하나가 진정성이고, 두 번째가 심미성, 세 번째가 가독성이거든요. 글판이라는 것 자체가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가 핵심이다 보니까 그 문안이 갖고 있는 힘이 있어야 해요. 문안이 선정되면 글에서 그림으로 변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오가는 분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려면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사실은 있어야 해요. 그러다 보니까 디자인에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는 편이고, 차에서 많이 보시거든요. 잠깐 신호가 멈췄을 때, 혹은 차를 타고 지나가시다가 보려면 글귀가 너무 길면 다 읽지 못하고 지나가시는 경우가 많아요. 30자 이하로 해서 가독성 있는 문안으로 할 수 있게끔 선정을 하고 있어요."

이번 겨울을 맞이하는 글판엔 진은영 시인의 '어울린다'의 시구가 선정됐습니다. 겨울을 맞아 시 제목처럼 '너와 내가 함께 있을 때 완성되는 아름다운 관계'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손을 내밀어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 이렇게 든든한 메시지도 주고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간다는 어떤 공동체적인 희망, 이런 것도 전하는 메시지예요. 겨울이라는 계절이 사실은 되게 춥잖아요. 너랑 같이 있었을 때야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어떤 아름다운 관계다."

강 과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이 시구처럼 광화문 글판도 시민과 어울릴 때 빛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강문영 / 교보생명 홍보팀 과장]
"저희가 문안을 선정해서 내거는 것까지가 광화문 글판의 역할이고요. 글판이 어떤 하나의 구심점이 되지만 거기에서 끝은 아니고 시작이 돼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도구로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을 울린 글이 있으면 이 글이 분명히 누군가한테 울림을 주거든요. 저희가 여러분의 인생 한 문장을 다른 사람의 인생의 한 문장이 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서 전달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취재·구성: 백운 / 영상취재: 홍종수·서진호 / 편집: 임재호 / CG: 서현중·권혜민·안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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