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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83자에 담긴 충무공의 마지막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연합뉴스)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하다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아아!"

조선시대 문신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달력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庚子) 표지의 글은 이렇게 끝납니다.

일부가 잘려 나간 탓에 확인되는 글자는 총 83자입니다.

그 뜻을 알 듯 말 듯 한 글은 '여해'라는 두 글자를 만나 완성됩니다.

여해는 이순신의 자, 즉 충무공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즉,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왜군과 혼전을 벌이다 적의 유탄을 맞고 쓰러진 이순신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글입니다.

고전학자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오늘(24일) 언론 통화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의혹이나 논란을 종지부 찍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설명했습니다.

노 소장은 지난 6월 처음 자료를 접했을 때만 해도 이런 내용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간 '난중일기' 등을 연구하며 국내 대표적인 이순신 관련 연구가로 꼽혀온 그이기에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자료를 건넸을 때만 해도 새로운 자료가 나왔겠거니 했다고 합니다.

노 소장은 특히 부하 장수들이 그가 진두지휘하는 것을 말리며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된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 표지 (사진=문화재청 제공, 연합뉴스)

그는 이순신이 일부러 자살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일각의 주장도 강한 어조로 일축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전쟁을 진두지휘했다는 것은 최후 순간까지 결사 항전의 자세로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라며 "이런 상황을 자살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류성룡은 왜 달력의 가장 앞부분에 이런 글을 남겼을까?

노 소장은 "두 사람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이순신은 한양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류성룡은 출생지는 다르지만 같은 동네에서 유년기를 보낸 인연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1542년생인 류성룡과 1545년생인 이순신은 비슷한 나이대입니다.

류성룡은 훗날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에서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이 단아한 선비와 같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노 소장은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로 추천한 것도 류성룡"이라며 "군사 서적을 보내주고 반대 의견에 맞서 이순신을 옹호했던 류성룡이야말로 그 죽음에 가장 슬퍼했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자 형태로 된 달력의 가장 앞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충무공의 죽음이 그만큼 큰 사건이자 비통한 일이라는 거죠. 1600년 경자년 내내 달력을 볼 때마다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류성룡은 왜 이순신이 전장에서 숨을 거둔 지 2년이 지난 1600년 달력에 이 글을 썼을까?

단서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노 소장은 "경자년 1월 29일 실록을 보면 (이순신을 모실) 사당인 전남 여수 충민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선조는 '이미 의논한 바가 있었지만 아직 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류성룡은 당시 조정의 이런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표지에 기록을 남긴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사진=문화재청 제공, 연합뉴스)

20년 가까이 이순신을 연구한 그에게도 이번 작업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자로 적힌 글을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을 넘어 역사적 상황도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에 따라 문화재 환수 여부가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두 달 가까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노 소장은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는 게 흘림체인 초서"라며 "글자의 형태를 파악하고 주변 인물과 배경, 역사적 사실까지 다 검토하다 보니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습니다.

노 소장은 대통력의 역사·학술적 가치가 클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삼복더위 때 두 달 가까이 작업했죠. 여백에 적힌 자잘한 글자 하나하나 해석하느라 잠도 못 이뤘는데 역사적 사실이나 자료의 희소성을 따지면 당연히 '보물'이죠."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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