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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한다는 것은 - 김영민《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북적북적]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한다는 것은 - 김영민《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북적북적]

권애리 기자

작성 2022.11.20 07:25 수정 2022.11.21 11:3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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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한다는 것은 - 김영민《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62 :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한다는 것은 -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오늘 [북적북적]에서 읽는 신간의 작가에게는 '칼럼계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에 더해, '북적북적의 아이돌'임도 분명합니다. 독서 취향이 조금씩 꽤 다른 [북적북적] 3명의 기자들이 모두 이분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작가가 이전에 낸 산문집이 모두 4권. 이중 2권은 심영구 기자, 2권은 조지현 기자가 선택해 [북적북적]에서 지금까지 모조리 소개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작가의 다섯 번째 산문집인 오늘의 책을 저까지 택하는 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출판계 대형 아이돌'인 작가의 전작 읽기를 하기보다는 되도록 새로운 작가들을 찾아서 소개해 드리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지난 10월 31일 따끈하게 찍혀 나온 책을 막상 열고 나니, "읽고 싶다!"는 마음만 남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책은 동아시아 사상사 학자 김영민이 새로 내놓은 산문집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아침이 오면 거품 같은 인간이 세면대 앞에서 비누 거품을 칠하고, 자신의 오래된 거품인 피부를 씻는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부풀어 오르지만 지속되지 않을, 매혹적으로 떠오르되 결국 하늘에 닿지는 못할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인생은 거품이다' 중)

책 안의 모든 글들은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의 주제를 다룹니다.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삶의 허무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함께할 것인가.
이 책을 낭독하고 싶다는 마음은 솔직히 '프롤로그'에서 바로 굳어졌습니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문장에 '아이고 참, YOU WIN. 이건 읽어야겠네.' 영혼의 뼈가 시려올 만큼 동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단테와 달리, 확고한 신앙이 없었던 소식은 과연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하고 질문이 던져진 대목에서, 그에 대한 작가의 답을 찾으러 이 책의 에필로그까지 쉼없이 걸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부서진 성수대교는 말한다.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고, 과거에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고, 현재는 상처 없이 주어진 말끔한 시간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의 잔해라고, 그러나 그 현재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폐허를 돌이킬 수는 없으나 폐허를 응시할 수는 있다고,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고, 성장이란 폐허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폐허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라고. ('폐허를 응시하다' 중)

지금까지 김영민 교수가 다양한 지면에 실은 칼럼들을 묶은 책이지만, '묶기 위해 묶은', 성의가 부족한 책이 아닙니다. 작가가 애초에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산문집을 내겠다는 마음"을 먹고 발표해 온 글들을 엮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의 구성은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자인 작가 본인이 오랫동안 마음 깊이 사모해 온 작품을 중심에 놓고 열의 있게 추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동파육의 그 소동파'로 유명한) 북송 시대 시인 소식의 대표작 [적벽부]의 흐름에 맞추어 책을 구성한 것입니다. 이 산문집이 "[적벽부]에 대한 유연한 주석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역시 작가 본인이 말하고 있습니다. 1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당대를 대표했던 시인이 삶의 허무를 대한 자세에 오늘날 한반도 문인의 대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후학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화답과 주석을 바치는 책입니다.
 
선생이 되고 나서 공부를 지나칠 정도로 치열하게 하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왜 그토록 열심히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요. 오, 그런가. 이 대답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인간은 우연의 동물이며, 순간을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간명한 대답이었다. 삶을 연주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대답이었다. ('삶은 악보가 아니라 연주다' 중)

책이 일단, 정성스럽습니다. 작가 자신의 뚝심과 애정이 느껴지는 주제와 구성일 뿐 아니라, 작가가 이 안의 에세이들에서 풍부하게 언급하고 있는 동서고금의 그림, 조각, 건축 등의 도판이 서너 페이지마다 삽입돼 있습니다. 허락이 필요한 이미지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미지, 사용료를 지불해야 할 이미지들을 가리는 것부터 편집자가 신경을 많이 썼어야 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은 제가 굳이 말을 보태기도 무색합니다. 모든 문장이 유연하면서도 묵직합니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는 문장들이면서도, 한없이 진지합니다. 작가의 사유에 사무치게 공감하게 되는 대목이든, '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타인의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든, 어떤 대목에서든 충만감이 느껴집니다. 일찍이 삶의 허무 앞에서 질식의 위기를 헤어나온 사람, 바로 지금 막막한 허무 앞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허무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 '음, 난 아직 이런 느낌까진 잘 모르겠는데' 하는 사람까지… 누가 읽어도 허무하지 않을 글들입니다.
 
지나친 여가는 인간을 공허하고, 무료하고, 빈둥거리고 낭비하게끔 만든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공부하는 삶이 괴로운가?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게 구원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게 괴로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삶의 쳇바퀴를 사랑하기 위하여' 중)
시간을 내어 피터 허턴이나 켈리 라이카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일은 현란한 이미지의 야단법석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다. 끝없이 독촉해대는 생활의 속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구체성을 무시한 난폭한 일반화에 저항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란한 연말의 시간을 통과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은 신산한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시피이기도 하다. ('느린 것이 삶의 레시피다' 중)

마지막 장까지 읽고 덮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독자에게 친절하지만, 아첨하지 않는 글이다. 학문과 사상의 깊이가 있는 학자가 자기 중심을 타협하지 않되, 대중이 열광하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배려와 유머감각을 발휘할 줄 알면 이렇게 좋은 책이 나오는구나. 게다가 자기 삶을 통과함으로써 벼린, 삶과 사람에 대한 신실한 자세까지 갖추고 있다면 이렇게 소중한 책이 나오는구나.
 
대성당을 그린 사람들은 험한 시간을 통과해간 이들이었다. 생텍쥐페리와 스가와 카버는 일찍 가족을 잃거나, 가난에 시달리거나, 알코올 중독에 허우적대거나, 비참한 전쟁을 겪거나, 시대의 광기를 목도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더러운 리얼리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더러운 리얼리즘의 대가 카버는 소설 [깃털들]에서 이웃이 안고 있는 아기가 정말 못생겼다고 불평하는 부부를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돌아와 섹스에 열중하는 부부를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결국 카버는 대성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셍텍쥐페리와 스가와 카버는 더러운 현실을 보았기 '때문에' 대성당을 가슴속에 품는다. 혹은 더러운 현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성당을 가슴속에 품는다. ('대성당을 가슴에 품다' 중)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더욱 아껴 읽으시려면, 먼저 맨 뒤에 실린 [적벽부] 번역문을 천천히 읽으시기를 추천합니다. 그 다음에 맨 앞으로 돌아가 책 전체를 읽고, 다시 [적벽부]에 이르러 "유연한 주석"과 함께 적벽을 노닐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 이 오묘한 계절의 주말 오후 '책 한 권과 함께 눕고 싶다' 할 때 이토록 잘 어울리는 책을 가지고 올 수 있어서 기쁩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고맙습니다.

*'사회평론아카데미'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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