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월드리포트] '영국의 잃어버린 8년'과 한국의 과제

[월드리포트] '영국의 잃어버린 8년'과 한국의 과제
지난달 새로 취임한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이끄는 새 내각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재정 확충안을 발표했습니다. 전임 리즈 트러스 총리가 대규모 감세안이 담긴 '미니 예산'을 발표했다 금융 시장에 큰 혼란을 초래하고 취임 약 50일 만에 '최단기 재임 총리'란 불명예를 안고 물러난 뒤, 약 두 달 만에 주요 내용을 완전히 뜯어고쳐 발표된 영국의 새 예산안 및 중기 재정계획입니다.

핵심은 세금은 더 걷고 공공 지출은 줄여 550억 파운드, 우리 돈 약 88조 원 규모의 재정을 확충하는 겁니다. 제레미 헌트 영국 재무장관은 의회에 나와 영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그 침체의 정도를 약화시키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지만, 언론들은 영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의 세금'을 내게 됐으며, 특히 중산층과 부유층 가구의 경우 생활 수준이 기록적으로 하락하게 될 거라고 우려하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250억 파운드 규모의 세금 인상은 내년부터 본격 시작됩니다. 우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소득세 인상입니다.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와중에도 소득세 과세 기준을 6년간 동결하기로 했는데, 이로 인해 6백만 명이 이전보다 더 고율의 세금으로 내야 하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특히 12년 전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6% 수준이던 고율 납세자 비율은 14%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소득에 대해 45%의 세금을 내는 최고소득세 시작점은 현행 연 소득 15만 파운드에서 12만 5천 파운드로 낮아지는데, 그 결과 100만 명 정도가 최고 소득세율 구간에 추가로 포함될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두 번째 주택 등 기타 자산의 매각과 같은 자본 이득에 대한 연간 면세 수당은 당장 내년부터 1만 2천 300파운드에서 6천 파운드로 삭감되고, 2024년에는 그 절반 수준으로 또 한 번 삭감됩니다.

유류세는 내년 3월 23% 정도 오르는 것으로 나왔는데, 최근 10년 새 기록적인 수준입니다. 여기에 2025년부터는 전기차에도 도로세가 부과됩니다. 자동차 관련 업계에서는 '전기차 보급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고려할 때 시장에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자동차 세금을 보다 공정하게 만들고 싶다는 헌트 장관의 발언으로 미뤄볼 때 세수 확충이 다급한 영국 정부가 업계의 반대를 이유로 새로운 세원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영국 횡재세, 소득세 확대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뜻밖의 수익을 올린 대형 에너지 기업들에 대해선 2028년 3월까지 횡재세가 부과됩니다. 전기⋅가스 업체에 대한 세율은 25%에서 35%로 순차 인상되고, 발전회사들도 내년부터는 이익의 45%를 횡재세로 내야 합니다. 다만 횡재세는 기한을 정해 한시적으로 운용되고 기업의 투자를 억제할 정도로는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헌트 장관은 설명했습니다. 횡재세 확대 결정으로 140억 파운드 정도의 재정을 추가로 확충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영국 당국의 분석입니다.

공공 지출 축소 규모는 300억 파운드 수준으로 설계됐습니다. 특히 가계 에너지 비용 지원은 1년 연장되지만 규모가 축소돼, 가계별 평균 에너지 요금은 2천 500파운드에서 3천 파운드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헌트 장관은 공공 지출을 줄이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라면서도, 정부의 공공 지출은 경제성장률보다 더디게 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영국 예산책임처에 따르면,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금 수준은 2019년 33.1%에서 2027-2028년엔 37.1%로 증가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입니다. 지난 10월 11.1%로 41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한 영국의 인플레이션 상황은 내년에는 조금 나아지겠지만, 그럼에도 평균 7.4% 안팎의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영국 횡재세, 소득세 확대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영국인들의 생활 수준은 1956년 관련 기록이 시작된 이래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질 거란 분석입니다. 특히 올해부터 내년까지 2년에 걸쳐 실질 가처분 소득이 7.1% 하락하면 영국인들의 생활 수준은 2013년 이후 최저 수준에 머물 거란 전망입니다. 그야말로 '영국의 잃어버린 8년'이라 할 만합니다.

이런 내용의 재정 전망과 관련해, 헌트 재무장관은 현 내각이 '끔찍한 결정'을 뒤로 미루지 않는 책임 있는 정부라는 걸 보여준다고 강조했지만, 야당인 노동당은 영국 정도의 규모와 발전 정도를 보이는 어떤 나라도 경기 침체 국면에서 공공 지출을 삭감하거나 세금을 인상하지 않는다면서 '현 정부가 영국 경제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저성장은 세금 인상, 투자 감소, 임금 압박, 공공 서비스 축소로 이어지고, 이 모든 것이 다시 경제 성장에 타격을 줄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의 이번 예산안과 재정계획 발표에 전 세계가 주목한 건 전임 트러스 총리가 섣부른 감세안으로 국제 금융 시장을 일대 혼란에 빠트린 직후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영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과 영국 정부가 선택한 '어려운 결정'이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수낵 총리는 G20 정상회담을 마친 뒤 G20 회원국의 2/3가 7% 넘는 인플레이션을 경험 중이고 IMF는 전 세계 국가의 1/3이 이미 혹은 조만간 경기 침체에 빠질 거라고 분석했다는 사실을 인용하며 "오늘날 영국 경제가 직면한 도전은 전 세계적인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심각한 수준의 인플레이션, 특히 고공 행진 중인 에너지와 식량 가격, 그리고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의 도미노 속에서 재정 건전성을 사수하기 위한 각국 당국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