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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수능 성적표로는 미처 다 알 수 없는 것들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기도하는 수험생의 두 손 (사진=연합뉴스)
 얼마 전 코미디언 김민경 씨의 소식이 화제였습니다. 우리에게 '맛있는 녀석들'로 익숙한 그녀가 갑자기 사격 국가대표가 됐다는 거죠. 그 놀라운 나비효과의 시작은 '운동뚱'이라는 맛있는 녀석들의 파생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건강도 챙기면서 맛있게 많이 먹자는 취지로 김민경 씨가 웨이트 트레이팅도 배워보고 수영도 배워보고 이런저런 운동에 도전을 하는 그런 내용이었죠. 그런데 매번 도전할 때마다 강사들이 기함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웨이트 트레이닝을 배우러 가면 트레이너 선생님이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라고 감탄을 하고 필라테스를 배우러 갔더니 필라테스 선생님이 "첫날에 이 동작까지 다 한다고요?"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체육계가 연예계에 빼앗긴 인재'라고 불리던 그녀. 그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사격. 제작진의 권유로 그녀는 지난 6월에 국제 실용사격연맹의 레벨 4 실탄 자격시험에 통과를 하고 이내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태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출전을 하게 된 겁니다. 시청자도 그녀 본인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죠.



한 네티즌이 이런 말을 했더군요. "사실 발견하지 못했을 뿐, 우리 안에 김연아도 있을 수 있고 손흥민도 있을 수 있다. 사람마다 숨겨진 천부적인 재능은 하나씩은 있을 텐데, 그것을 발견한 사람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요. 김민경 씨 역시 40년을 살아오면서 스스로에게 국가대표급 사격 실력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요? 없었을 겁니다. 내가 뭘 잘하고 어떤 재능이 있는지, 우리 안의 가능성을 사실 우리도 다 스스로 알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김민경 씨의 사격 장면을 보며 저는 지난주 아버지가 활을 쏘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도심 근교에 관광지를 갔었는데 국궁장이 있더라고요. 해보고는 싶으신데 계속 주저하시길래 등을 떠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와 2층 발코니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죠. 젊은 사람들 속에 유일한 노인인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와 저는 활 쏘는 게 팔힘이 많이 필요하다던데 잘 할까 괜찮을까 걱정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웬걸. 20여 명 중에 가장 많이 명중시킨 게 아닙니까? 아버지께서도 스스로에게 놀라셨는지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내일모레 70인데 아직도 나를 다 모르는구나."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요. 저는 이제 38살이 되었는데요. 마흔을 앞두고 생각을 해보니 취미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난 뭘 좋아했을까...' 궁금해서 학생기록부와 싸이월드 같은 옛 기록들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8살 때 제 꿈이 댄서였더라고요? 화들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20년간 자타공인 박치로 불려왔거든요. '이상하다... 내가 이럴 리가 없는데?'

나이도 있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학원을 갈 생각은 차마 못 하고 1대 1 과외를 받게 됐습니다.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춤에는 기술력과 표현력 두 가지가 필요한데 기술력이야 초보이니 부족한 게 당연하다. 표현력을 좀 보고 싶다"라고요. 갑자기 춤 연습실에 불을 다 끄고 음악 한 곡을 틀더니 자유롭게 움직여 보라는 겁니다. 될 리가 있나요. 생초보인데다 남이 보고 있는데... 삐걱삐걱 거리는 저에게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눈을 감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음악 느끼는 대로 움직여보세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막 움직였습니다. 한 3분 정도 지났을까요.

끝나고 눈을 살포시 떴는데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아닙니까? "왜, 왜 그러세요?"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왜... 왜 진작 춤을 안 추셨어요?"라고요. 음악의 감정, 그러니까 슬픔, 기쁨, 서러움, 이런 것들을 표현해 내는 능력이 전문 댄서 못지않게 탁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절 더러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춤을 춰볼 생각이 없냐는 겁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꾸준히 춤을 추고 있습니다. 자신은 없지만요. 하지만 내 안에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38년 동안 전혀 몰랐다는 것, 하지만 분명히 존재해 왔다는 것에 새로운 희망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45세에, 52세에, 67세에도 나도 모르는 내 어떤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희망 말이에요.

기도하는 수험생의 두 손 (사진=연합뉴스)

김민경 씨 이야기부터 저희 아버지를 거쳐 제 이야기까지 기나긴 에피소드를 들려드린 이유는요. 이 이야기들을 수험생에게 전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20~30대로 붐비는 상담소에 유일하게 10대들이 북적이는 달이 바로 11월입니다. "수능을 망쳐버렸다. 앞으로 무얼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럽다.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럽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는데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 수능 한 번으로 네 인생이 결정되지 않는다"라는 위로가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담가가 된 지 몇 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위로나 격려 같은 '언어'보다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증명'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흔 살. 이미 인생의 절반이 지나간 나이, 수험생의 시각에선 '인생의 진로나 방향이 모두 결정되었을 것만 같은 나이'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일들이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보다 우리 삶 속에서 꽤 많다는 증명 말입니다.

웃기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국가대표급 운동 신경을 가지고 있는 코미디언. 일평생 사무직 회사원이었지만 누구보다 활을 쏘는 데 재능이 있는 노인. 평생 상담가로 의자에만 앉아 있었지만 몸을 일으켜 음악에 움직일 때 누군가를 울릴 수 있는 38살 아저씨.

분명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이웃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존재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수험생들에게 그들의 삶이, 하나의 메시지로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능성의 씨앗은 평범한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려온 수능이라는 레이스 보다, 앞으로 혼자 걸어갈 스무 살 너머의 인생길에 더 많이 숨어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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