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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2002★] 쌈닭 감독도 혀 내두른 '외계인 심판', 전설 of 전설이네

2002 한일 월드컵 20주년 : '역사상 최고의 심판'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편

AGAIN 2002★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편
트레이드마크 민머리, 보기만 해도 오금 저려지는 눈빛, 화면을 뚫고 나오는 카리스마.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국내 팬들에겐 '외계인 심판'으로 불리며 역사상 최고의 심판으로 극찬을 받은 이 남자. 혹시 기억나시나요? 3040세대 이상이라면 사진만 딱-봐도 "아, 그 외계인 심판? 기억하지!"라고 하실 겁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범상치 않은 외모 덕분에 많은 축구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거든요.

한때 '전 세계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심판'으로도 명성을 떨친 그는 개성 넘치는 외모와 칼날 심판의 대명사, 이탈리아 출신의 피에를루이지 콜리나입니다.

콜리나의 위상이 축구계에서 얼마나 대단하냐면요, '모두까기'이자 '싸움닭'인 무리뉴 감독이 유일하게 극찬한 심판이자, 영국 축구의 전설 데이비드 베컴이 먼저 유니폼 교환을 원했을 정도였습니다. 또 월드컵에서 나온 오심에도 선수들이 항의를 하지 않은 일도 유명하죠. 이 에피소드 하나만 봐도 날고 긴다 하는 선수들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존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스포츠 스타' 수식어를 달고 다닐 정도로 유명했던 콜리나. 그는 대체 어떤 심판이었길래 축구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걸까요?

AGAIN★2002 그때 그 심판. 전설의 명심판 콜리나의 인생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방금 또 반칙했니..? (  ...) (...  )

17살 소년, 심판이 되다


이탈리아에서 '축구왕'으로 통하는 콜리나는 1960년 볼로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동네 축구팀에서 수비수로 뛰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집중력과 몰입도를 자랑했던 소년 콜리나는 어느 날 심판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심판 교육 과정을 밟게 된 그는 1977년,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심판이 됩니다.

그 뒤로 '이탈리아의 자존심' 명문 볼로냐 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한 콜리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동네 축구 대회 심판을 보다가 1988년 이탈리아 3부 리그 세리에 C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심판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과 3년 만인 1991년 1부 리그 세리에 A로 초고속 승격을 합니다.

출발은 남들과 똑같았지만 올라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던 거죠. 비정상적으로 빠른 승격에 인맥으로 올라왔다는 둥 뒷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하지만 콜리나와 경기를 단 한 번이라도 뛰어본 축구인들은 그 말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이후 1995년 국제대회 심판 자격을 얻은 콜리나는 1996년에는 애틀랜타 올림픽 결승전 심판을, 1999년에는 '캄프 누의 기적'이라 불리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심판을,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심판계의 정점'이라는 월드컵 결승전 심판을 직접 맡으며 전 세계에 자신의 얼굴을 똑똑히 알립니다.
 

선수 습관 · 팀 역사까지 줄줄이 뀄던 '공부쟁이'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콜리나는 그야말로 지독한 '공부쟁이'이기도 했는데요. 경기 시작 전 선수 이름은 기본이고 선수 플레이 스타일, 습관, 심지어 주로 쓰는 발까지 꼼꼼하게 분석해 실제 경기를 뛸 때 선수들의 플레이를 예상했다고 합니다. 프리킥, 코너킥 등 공을 찰 때 어떤 선수가 어떤 방향으로 올릴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다 돌리고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이 서있을 위치까지 잡았다고 할 정도니 말 다 했지요.

또 선수들의 움직임을 한발 앞서 파악했기 때문에 경기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고, 선수들이 습관처럼 저지르는 사소한 반칙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던 터라 다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는 반칙까지 콜리나는 족집게처럼 쏙쏙 잡아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수들끼리의 관계나 팀에 얽힌 역사 등 경기 외적인 부분까지 익혔고, 최고의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 먹는 음식과 경기장까지 걸리는 시간 및 동선까지 촘촘하게 관리했다고 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꼼꼼함과 준비성, 칼 같은 판정으로 워낙에 선수들에게 신뢰가 두터웠던 콜리나는 오심에도 선수들이 항의하지 않은 에피소드로도 유명합니다. 2002 한일 월드컵 아르헨티나-잉글랜드 전에서 영국 마이클 오언의 기막힌 다이빙 연기에 속은 콜리나는 페널티킥을 선언하고 마는데, 이에 항의하려던 아르헨티나 선수들조차 "콜리나 심판이라면 제대로 봤겠지"하고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콜리나의 생각과 말이라면 100% 맞다'라는 인식을 심어줄 정도로 축구인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건 평소 콜리나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깨끗했던 콜리나 양반, '포청천 위의 포청천'으로 컴백

귀신도 꼼짝 못 할 것 같아요...(포스 대박 +_+)

그리고 2006년 2월, 이탈리아 심판의 정년인 45세를 꽉 채운 콜리나는 이대로 은퇴하는가-싶었지만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 이례적으로 정년 1년을 더 연장해 줍니다. 왜냐고요? 심판 정년이 50세인 EPL 등 다른 나라에서 콜리나를 모셔가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AC 밀란의 협찬사인 OPEL 광고에 콜리나가 출연한 것을 두고 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란이 일자 콜리나는 스스로 심판직을 물러납니다. 일본 등 곳곳에서 러브콜을 보내왔지만 콜리나는 개인 사업과 해설자로 활동을 이어가다 이탈리아 축구계를 뒤흔든 일명 '칼초폴리 스캔들'로 복귀를 하게 됩니다. (** '칼초(calcio)'는 이탈리아어로 축구를 뜻함. 즉 '칼초폴리'를 해석하면 '축구 게이트'가 되는 셈.)

당시 유벤투스 단장 루치아노 모지는 너무나 칼 같은 판정을 하는 콜리나와 로베르토 로세티 두 심판에게 불만이었는데요. 루치아노가 UEFA 심판배정 부위원장과 통화에서 "이 둘은 너무 객관적이라 방해되니까 손 좀 봐라"라고 했던 말이 폭로되면서 이들의 결백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칼초폴리 스캔들'로 이탈리아의 축구 위상이 바닥까지 추락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심판고문역으로 콜리나를 선임합니다. 심판들을 직접 관리하는 '포청천 위의 포청천'이 된 셈이었죠. 이후에도 콜리나는 심판고문과 UEFA 심판위원장을 역임했고 2017년 1월부터는 FIFA 심판위원장에 선임된 이후로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월드컵 비디오 판독(VAR) 도입 여론이 처음 거론된 초창기부터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하며 VAR 도입을 이끈 콜리나는 이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필드에서의 플레이를 인정받아야 한다. 심판이기 때문이 아닌 사람들이 너를 믿어서이기 때문이다."

-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
AGAIN 2002★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편

(글·구성 : 김성화, 디자인 : 이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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