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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헤르손: 해방된 도시, 환호하는 시민들, 이면의 상처

현지 시간 11월 14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남부 헤르손주의 주도이자 최근 수복한 땅, 헤르손을 찾았습니다. 헤르손은 러시아가 지난 2014년 강제병합한 남부 크름반도와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장악한 동부 돈바스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 지역의 주도인 헤르손을 탈환한 건 수도 키이우를 지켜내고 제2의 도시 하르키우를 수복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군의 이번 전쟁에서 거둔 최대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젤렌스키 대통령, 다시 찾은 헤르손 방문

러시아군이 헤르손에서 퇴각할 거라는 전망은 사실 몇 주 전부터 나왔습니다. 러시아 당국이 안전을 이유로 주도인 헤르손시의 주민들을 드니프로강 동쪽으로 이주시키면서, 서방의 정보당국과 언론에선 러시아가 헤르손을 포함한 드니프로강 서쪽 지역을 포기하려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조심스레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9일 러시아는 헤르손 철수를 공식화했고, 이틀 만에 병력과 무기를 안전하게 드니프로강 동안으로 이동시켰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날 오후 우크라이나군은 헤르손 시내에 진입했고, 곳곳에서 러시아 국기가 내려지고 그 자리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내걸리는 모습이 목격됐습니다. 헤르손 시민들은 돌아온 자국 군대를 환영하며, 밤새 광장에 모여 기쁨을 나눴습니다.

헤르손 수복 축하하는 현지 주민 (사진=트위터 캡처, 연합뉴스)
우크라 헤르손 탈환

그리고 사흘 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헤르손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이름을 연호했고, 그는 그곳에서 헤르손 수복은 '끝(종전)의 시작'이라며 감격에 겨워했습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평화를 되찾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라 전체의 평화를 다시 찾겠다'고 다짐하며, '우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 다시 찾은 헤르손 방문

시민들의 벅찬 감정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해방됐고, 그(젤렌스키 대통령)는 즉시 이곳으로 달려왔어요. 그는 우리는 버리지 않았던 겁니다"라며 감격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러시아군이 왔을 때 사람들은 항의 시위를 위해 이곳 광장에 모였습니다. 많은 때는 5천-7천 명이 모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맨손으로 러시아군의 차량을 막아서곤 했지요"라며, 항의 시위를 벌이던 곳에서 이제는 해방을 축하하게 된 소회를 밝히는 이도 있었습니다. 러시아군의 퇴각과 함께 고향을 다시 찾게 됐다는 이는 '오늘이 내 삶의 가장 행복한 날'이라며 미소를 지었고, 아들이 일터로 가는 도중 영문도 모른 채 러시아군에 의해 끌려가 이후 만나지 못했다는 한 어머니는 '이제는 아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며 희망을 고백했습니다. (AP통신 인터뷰 중)

하지만 사람들이 환호하는 축제의 순간, 광장의 모습만이 진실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이들의 행복한 모습 이면엔 지난 시간 쌓아둔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원망,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8개월간 헤르손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곳 주민들에게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와 갈등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는 한 달여 전 우크라이나 내 4개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병합한다고 공식 선포했습니다. 앞서 헤르손을 비롯한 해당 지역들에선 러시아 영토로의 병합에 찬성하는지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됐는데, 당시 헤르손 주민들 역시 압도적인 비율로 영토 병합에 찬성했다고 친러시아 성향 지역 행정부는 발표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군의 귀환에 환호하는 이들과 한 달여 전 러시아 영토로의 병합에 찬성표를 던진 이들이 같은 지역 주민들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주민들 사이 얼마나 깊은 의심과 원망, 갈등의 골이 만들어 졌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헤르손주 내에서 헤르손 이전에 앞서 해방을 맞은 마을들에선 이른바 '배신자', '러시아군 부역자'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갈등을 빚고 반목하는 사례들이 목격되고 있다는 외신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가 헤르손과 그 주변 지역 상황에 대해 '해방은 됐지만 여전히 평화는 오지 않았다'고 진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합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다시 찾은 헤르손에서 러시아군이 지난 8개월여간 벌인 전쟁 범죄가 벌써 400건 넘게 확인됐다며, 법적 처벌을 위해 당국이 관련 증거들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문제는 배신자들을 찾아내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 쉽지 않은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진실을 밝혀내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을 뿐더러, '눈을 가린 여신'의 모습을 한 정의는 때로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8개월 넘게 러시아의 점령지였던 헤르손에서 치유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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