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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그래도 이 가족은 살아갈 것이다…"알카라스의 여름"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50

이 영화 포스터, 은근히 눈길이 간다. 어디선가 주운 것 같은, 한쪽 안경 알이 없는 선글라스를 낀 소녀가 에메랄드빛 고물 폭스바겐 운전대를 잡고 창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알카라스의 여름

포스터에 쓰인 바로 이 장면으로 올해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에 빛나는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원제: 알카라스)”은 시작된다. 알카라스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 마을 저수지 근처에 고장 난 채 버려진 폭스바겐 자동차는 장난꾸러기 소녀 이리스의 단골 놀이터였다. 그런데 이 차 안에서 한창 우주선 놀이에 빠져있던 이리스와 사촌 동생들 앞에 기계음이 들리더니 갑자기 거대한 포크레인이 나타난 것이다. 
  잠시 후, 이리스에게 놀이의 터전이었던 고물 자동차는 포크레인에 의해 번쩍 들어 올려져 어디론가 치워진다. 영화의 엔딩과 수미쌍관을 이루는 이 장면은 감독 카를라 시몬의 야심 찬 메타포다. 포크레인은 갑자기 왜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일까.
 
     3대(代)째 복숭아 농사를 지으며 알카라스에 살아 온 솔레 가족에게 어느 날 큰 위기가 닥친다. 지주인 피뇰 가문이 복숭아밭을 밀어버리고 태양전지판을 설치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솔레 가족의 선대는 피뇰 가문 조상의 목숨을 구해주고 구두로 경작권을 약속받았으나 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태양광전지판을 설치하려는 피뇰 가문의 아들은 ‘나는 들은 바 없다’는 태도다. 그리하여 솔레 가족은 대대로 이어 온 복숭아 재배 대신 태양전지판을 관리하면서 살든지,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이 땅을 떠나야 할 판이다.

그런데 솔레 가족의 가장인 키메트는 복숭아 농사를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다. 배운 것도 복숭아 농사요, 할 줄 아는 것도 복숭아 농사뿐인 그는 일손이 달리자 일가족들을 총동원해 더욱 열심히 복숭아 수확에 매달린다. 누구에게나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운 그는 일손을 도우러 온 여동생 내외가 현실에 적응해야 하지 않냐며 태양전지판 설치에 호기심을 보이자 매제와 드잡이를 하는가 하면 지주인 피뇰과도 복숭아 농장 한가운데 있는 집 앞에서 심한 입씨름을 벌인다.

“난 농부지 전지판 관리자가 아니에요”
“배우면 다 돼요”
“이 나이에 전지판 관리를 왜 배워요?”
“아직 젊잖아요”
“훨씬 젊을 때 당신을 저수지에 빠뜨렸어야 해요. 빌어먹을”
“후회할 거예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시는 얼쩡대지 말아요. 나가요”
“내 땅이에요”
“수확 끝날 때까지는 내 땅이에요” 


이 상황을 키메트의 늙은 아버지와 사춘기 딸이 우연히 멀찍이서 지켜본다. 이 장면의 연출 방식은 독특하다. 극심하게 대립하는 캐릭터의 충돌이라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과 편집, 표정 클로즈업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게 일반적인 방식인데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 롱숏으로 복숭아나무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태로운 말싸움을 지켜볼 뿐이다. 거리가 있는 만큼 소리도 분명하게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싸움을 계속 보여주지도 않는다. 대신에 다투는 소리 위로 아버지와 딸의 표정을 보여준다. 몰입감이 떨어질 것 같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직접 보는 대신 가족의 표정을 통해 상황을 짐작할 뿐이지만 갈등 자체의 주목도는 오히려 올라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연출을 통해 솔레 가족 삼대(三代)의 착잡한 심경까지도 한 씬에 담아낸 솜씨는 겨우 두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의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이처럼 주요 장면과 대사를 카메라로 밀착해 직접 보여주는 대신 사건을 지켜보는 다른 가족 구성원(주로 어린이나 청소년, 여성)의 표정과 핸드헬드 롱숏을 사용해 상당 부분 갈음한다. 씬을 얼마나 자극적으로 세게 묘사하느냐 경쟁을 벌이는 듯한 요즘 영화와는 자못 다른 연출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이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표정과 보이스오버를 통해 반쯤은 상상으로 보여지는 씬이 정서적으로 훨씬 풍부하게 다가오며 맥락을 이해하기에도 좋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배우들이 대부분 연기 경험이 없는 비전문 배우라는 점에서 이는 더욱 놀랍다. 카를라 시몬 감독은 카탈루냐어를 구사하는(이 영화는 카탈루냐어로 된 최초의 황금곰상 수상작이다) 농부이거나 농부 가족 중에서 오디션을 거쳐 배우를 캐스팅했다. 그래서 인지 스크린에 연기가 묻.어.있.을.뿐.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 맛이 없는 깊은 맛, 연기 같지 않은 일품 연기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직업 배우들의 소위 ’인생 연기’가 진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솔레 가족의 단란한 한 때 (제공: 영화사 진진)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무엇보다 즐거웠던 건 아이들이 핸드폰 없이도 줄기차게, 천부적으로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고물 자동차가 없어져도, 아버지에게 혼나고 놀이감을 빼앗겨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해맑은 소녀 이리스와 사촌 동생들은 글자 그대로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지치지 않고 놀아댔다. 아이들은 죽은 토끼를 추모하는 의식을 치르고, 수박을 서리해 맨손으로 파먹고, 밭에서 상추를 뽑아 서로에게 던지고, 토굴에 들어가 전쟁놀이와 소꿉놀이를 했다. 이들이 변변한 장난감 없이도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 살짝 눈물이 날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감동보다는 상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 어떻게 보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아이들의 놀이 장면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보여준다. 일밖에 모르는 주인공 키메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가족의 위기와 갈등을 따라가는 이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와 막내딸 이리스가 신나게 노는 장면이 거의 등가로 배치돼있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다. 마치 이 세상에 특별히 중요한 것도 없고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는 듯이. 결국 “알카라스의 여름”은 특정 주인공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영화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의 일이나 이리스의 놀이나 모두 삶의 일부이다. 

     그렇게 솔레 가족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알카라스 복숭아 농장의 여름날은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설상가상으로 복숭아 값마저 폭락한다. 키메트와 마을 농부들은 시내로 복숭아를 잔뜩 싣고 나가 내던지며 시위에 나선다. 농업의 현실도 참 ‘글로벌’하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들이 몰고 나온 트랙터 앞에는 '참을 만큼 참았다', '공정 가격 지불하라'는 문구들이 적혀있다.
  대형유통업체가 30센트짜리 과일을 15센트에 사려 한다고 농부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15센트를 받으면 청년들은 농장에서 쫓겨날 거라고, 15센트를 받으면 우리 땅은 투기꾼들에게 넘어갈 거라고, 15센트를 받으면 우리는 집을 팔아야 한다고, 15센트를 받으면 결국 우리는 사라질 거라고…

농업뿐 아니다. 현대인들은 생활의 전 영역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변화의 물결에 떠밀려가고 있다. 지금도 패스트푸드점의 직원들은 소리 없이 키오스크로 대체되고 있다. 종합병원에서는 사람의 안내를 받기 쉽지 않다. 기계에 내원 등록을 한 뒤 대기표 뽑고 순서대로 환자가 검사실과 진료실을 찾아다녀야 한다. 잠깐의 의사 진료를 빼고는 종합병원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대화가 매뉴얼화되어 있다. ARS와 실제 대화가 점점 닮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광활한 주차장에도 나갈 땐 무인 계산기 한 대뿐이다. 외로운 일이다. 문명은 이리스 같은 어린이에겐 놀이의 터전을 앗아가는 알 수 없는 존재이며 노인들에게는 공포가 되었다. 자본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길로 가는가.

복숭아 농장 한가운데 솔레 가족의 집 (제공:영화사 진진)
     하지만 “알카라스의 여름”은 전통을 지키려는 농부와 변화하는 현실 그 어느 쪽 편에도 서지 않는다. 자연 속의 작은 인간일 뿐임을 카탈루냐의 대지와 인간을 비교하는 미장센을 통해 보여주고, 소, 닭, 비, 흙, 복숭아, 나무, 농장을 하나하나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졌던 감독의 눈길은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한다. 12명의 솔레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잇달아 보여주는 엔딩 씬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이윽고 도입부에서 복숭아 농장 한가운데 있는 솔레 가족의 집을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과 거의 똑같은 앵글의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희망도 냉소도 그저 롱숏에 묻어두고.

     “알카라스의 여름”은 내년도 95회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서 “헤어질 결심”과 겨룬다. 영화적으로야 “헤어질 결심”이 한 수 위겠지만, 나는 “알카라스의 여름”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이 영화에 관객이 고작 3천 명대라니. 농업의 현실처럼 시장은 냉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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