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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박정희 핵 개발…했다면 몇 년 걸렸을까

미국 비밀 해제 문서에 담긴 70년대 한국 핵 능력

한국 핵개발
북한의 전례 없는 도발 속에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열어 놓으면서 미국의 기존 확장억제 공약만으로 안심할 수 있겠느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 내에서 전술핵 재배치나 핵 공유 같은 방안을 검토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가 하면 한 발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자체 핵무장 필요성까지 제기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관련해 가장 의미 없지만 흥미진진한 것 중 하나가 '가정(假定)'입니다. '삼국을 통일한 게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등등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것들입니다. 핵무기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핵무기 개발입니다.

"한국이 핵 개발을 시작한 건 1972년쯤"


1970년대 초기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활동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 전 대통령의 핵 개발 착수 시점이 1972년쯤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는 것을 보고 한미 동맹만 믿고 있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한국의 핵 개발을 시작한 뒤 1년 뒤인 1973년 이를 인지했고 본국에 보고해 한국이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고 밝혔습니다.

뭐라고 설득했을까요?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으로부터의 어떠한 공격에도 미국이 남한을 보호할 것이며, 따라서 남한이 핵무기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하게 재확인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듣던 내용입니다. 네, 북한 미사일 도발과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 같은 질문이 나올 때마다 2022년 미 국무부나 국방부에서 내놓는 답과 문구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습니다.

50여 년이 지났지만 북한에 대한 우리의 안보 불안감은 여전하고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국의 노력 또한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니, 주한미군에 배치됐던 전술핵을 철수시켰으니 어떤 면에서는 더 후퇴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때 핵을 개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성공은 했을까?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궁금하긴 한 얘기인데, 당시 미국 측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문서를 하나 찾았습니다.

미 국무부 비밀 메모…"한국, 1980년경까지 핵 개발"


미 국무부가 장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1974년 11월 20일 작성한 브리핑 메모(BRIEFING MEMORANDUM)입니다. 국무장관에게 당장 시급한 현안은 아니지만 잠재적인 이슈나 사건에 대해 전반적 설명을 하는 내용으로, 당시에는 비밀로 분류됐습니다. 유럽과 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지역별로 주요 이슈를 추렸는데 우리나라의 핵개발은 동아시아 파트에 담겼습니다. 제목은 <Korean Advanced Weapon Developments (한국의 진전된 무기 개발)>입니다.
한국 핵개발
메모는 이 이슈가 1970년대 안에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개발하고자 하는 명백한 한국의 관심이 불러일으킨 문제라고 전제한 뒤, 앞으로 6개월에서 9개월 사이, 한국의 추가 핵 능력 개발과 이에 대해 미국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을 미국의 국익 관점에서 본 시사점이라고 적었습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8월 한국 기자에게 자신이 1977년까지 원자 폭탄을 개발하라고 과학자들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을 은밀히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관심을 끄는 건 다음 대목입니다. "현재 정보로 추정해볼 때 1980년경까지 한국이 핵 장비를 만들 수 있을 것(Present intelligence estimates are that the ROK could possibly fabricate a nuclear device by about 1980)이라고 전망한 겁니다. 당시 한국이 마음만 먹었다면 1980년대에는 핵 보유국이 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는 우리 자체 판단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첫 핵무기를 개발하고 실전 사용까지 한 미국의 정보 예측이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발전 또는 연구용 원자로와 거기서 나온 핵물질 관련 협정을 파기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사이에 필요한 핵물질 재처리 시설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provided that it is prepared to violate agreements associated with its power or research reactors and derived nuclear material and that it could obtain the necessary chemical separation facility in the interim.) 이어 한국이 프랑스 기업과 그런 설비를 구매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증거들을 갖고 있다고도 적었습니다. (단, 구매 협상 중인 설비가 순전히 산업용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여지는 남겼습니다.)

핵무기와 세계 경제력 10위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미국의 압력에 박 전 대통령은 결국 핵 개발을 포기했습니다. 뒤이어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도 미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핵 개발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아가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을 대거 해고하는 구조조정으로 박 전 대통령 시절 어렵게 이룩한 미사일 기술까지 무너뜨렸습니다. (이후 전두환은 자신이 아웅산 테러 위협을 겪은 뒤에야 다시 미사일 개발을 서두르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70년대, 우리가 개발을 강행했다면 당시 소련-중국-북한 등 공산권과의 냉전 속에서 미국도 불과 몇 년 전 베트남전에서 피로서 동맹임을 입증한 한국을 그저 몰아붙이기만 하진 못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은 가정일 뿐… 우리는 2022년 현재를 살고 있고 여전히 미국의 핵우산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한국은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모든 기반 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문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 개발이 가능하다는 게 통설입니다. 하지만 기술력이 발전한 것만큼 우리 사회도 달라져 예전처럼 특정인의 결단으로 그런 일을 추진할 수도, 또 추진해서도 안 되는 민주국가가 됐습니다. 또 세계 10위권의 경제력도 핵무기 하나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니 우리 스스로 준비하고 대비하는 게 더 중요한 때입니다.

(자료 출처 : NATIONAL SECURITY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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