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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없어서 못 산다는 한전채, 왜 자제령 내려졌나

[취재파일] 없어서 못 산다는 한전채, 왜 자제령 내려졌나
한국전력이 발행하는 회사채인 '한전채'가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워낙 인기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정부가 이 한전채를 그만 좀 발행하라는 '자제령'을 내렸습니다. 레고랜드 사태로 한껏 움츠러든 국내 자금 조달시장에서 또 다른 골칫거리가 바로 한전채이기 때문입니다. 한전채 문제가 무엇이고, 정부가 왜 자제령을 내렸는지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최근 한달 사이 발행된 한전채 발행금리는 최고 5.99%까지 치솟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 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최근 한 달 사이 한전이 발행한 회사채를 살펴보겠습니다. 만기가 2년이나 3년짜리가 대부분인데 발행금리가 최고 5.99%까지, 거의 6%에 육박합니다. 한전채 발행금리가 5% 중반을 넘어선 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입니다. 작년만 해도 3년 만기 한전채 금리가 1~2%대에 불과했던 걸 생각하면 상전벽해 수준입니다.

이 한전채 신용등급은 가장 높은 'AAA'로 국채와 똑같은 대접을 받습니다. 돈 떼일 염려도 없는 데다 6% 가까운 이자까지 준다고 하니 안 살 수 없는 것이죠. 지난달 말부터 대형 투자회사와 자산운용사들이 하나둘 북클로징(회계 장부 결산)에 착수해 주머니를 닫기 시작하면서 한전채 일부가 유찰되는 일이 생겼지만, 그전까지 한전채는 채권시장의 슈퍼 인기스타로 '완판' 행렬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용등급 좋다는 한전채 금리가 왜 이렇게 높은 걸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한전의 천문학적인 적자 때문입니다. 유가를 비롯해 각종 에너지 가격이 오르며 한전은 이미 작년에 5조 원, 올해 상반기에는 14조 원 넘는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전기요금을 올리고 허리띠도 졸라매어 비용을 아끼려는 노력에도 올해 전체 적자가 40조 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한전은 쉴 새 없이 한전채를 찍어 자금시장에서 빌린 돈으로 적자를 족족 메우고 있습니다. 재작년 3조 원, 작년 10조 원 넘게 한전채를 찍어낸 데 이어 올해는 10월까지 벌써 23조 원어치나 발행했습니다. 문제는 시장 예상보다 너무 많은 채권 물량을 찍어내는 바람에 발행금리를 높이지 않으면 투자자를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공급과잉인 한전채 몸값은 갈수록 떨어져서 신용등급이 제일 높은 'AAA'인데도, 실제 시장에서는 그보다 낮은 'AA'급 회사채와 같은 수준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전채 발행 추이

자금시장에 미치는 부작용은 상당합니다. 한전채가 제일 좋은 신용도와 고금리를 앞세워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통에 가스공사나 인천도시공사 같은 다른 공기업들도 채권을 팔지 못했고, 조건이 더 낮은 일반 회사채들은 아예 돈줄이 메말라버렸습니다. 한전채 인기가 다른 채권 수요를 구축하는(몰아내는) 효과를 불러와 투자 수요가 일반 회사채로 흐르지 못하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각해진 겁니다. 그러자 정부는 최근 한전을 콕 집어 회사채 발행 자제령을 내리고 은행 대출이나 해외 채권 발행을 대안으로 고민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문제는 하루하루 대출 금리가 치솟는 상황에서 그것도 고정금리로 한전채 금리보다 싸게 돈 빌려줄 은행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통상 은행 대출금리는 단기 조달금리 지표인 양도성예금증서(CD) 91일물에 가산금리를 더해 산출합니다. 어제(7일) CD 91일물 금리가 3.97%인 점을 감안하면 은행들이 자신들 몫인 가산금리를 1%대로 가져가야 6%대를 바라보고 있는 한전채보다 싼 대출금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당국은 금융지주, 은행장들과 주기적으로 소통하며 한전에 내줄 수 있는 대출폭과 금리를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한전의 구원투수로 나설 은행들은 고민이 적지 않습니다. 은행이 한전 대출을 늘리게 되면 그만큼 부족해진 실탄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채를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전채를 줄이려다 은행채가 커지는, 일종의 풍선효과인 셈입니다. 지금 국내 자금 시장에서 이 은행채도 한전채 못지않은 '생태 교란종'으로 지목되고 있어 당국이 은행채 발행을 최소화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5대 시중은행

그렇다고 한전 입장에서 해외 채권 발행이 쉽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경쟁 치열한 해외 시장에서 회사채 찍어 돈 빌리려면 국내보다 더 높은 발행금리를 내걸어야 합니다. 게다가 최근 흥국생명이 국제 시장에서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포기를 선언한 이후 전체 한국 채권에 대한 신뢰도까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보니 해외 발행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전문가들이 전기요금을 올려 적자를 줄이는 길 말곤 뾰족한 수가 없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기요금을 큰 폭으로 올린 상황에서 추가 인상은 당국으로선 부담입니다. 전기요금 같은 공공요금 인상은 물가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한전 적자부터 전기요금, 자금시장 경색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선 해결이 쉽지 않은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당국의 고심은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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