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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정부가 갑자기 부동산 규제를 '확' 푼 이유

지난달 27일,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민생회의가 열렸습니다. 대통령과 정부 부처 장관들이 모여서 경제 상황을 진단하고, 앞으로 어떤 대책을 마련할지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제1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

예정에 없었던 규제 완화


정부는 이 자리에서 15억 원 넘는 아파트에 대한 담보대출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동안은 15억 원 넘는 집을 사려면 대출이 안 돼서 모두 현금으로 사야 했는데, 앞으로는 빚을 내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또, 무주택자와 1주택자에 한해서 주택담보대출(LTV) 규제도 50%로 일괄 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무주택자, 1주택자가 규제지역에서 집을 살 경우 집값의 20~50%만 대출이 가능했습니다. 이 규제를 확 풀어서 앞으로 규제지역에서 집을 살 때 필요하면 집값의 절반까지 빌려주겠다는 겁니다.

예정돼있었던 발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내부 관계자들 간 사전 조율은 됐을 겁니다.) 정부가 이전부터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겠다'는 기조를 표현해오긴 했지만, '15억 원 초과 주택 주담대 허용'이나 'LTV 50% 상향' 등 규제 완화 조치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규제지역을 해제할 때에는 주거정책심의위원회를 거쳐서 발표하고, 이 밖의 다른 규제를 완화할 때에는 규제혁신 TF를 꾸려서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절차가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웠던 이유


왜 갑자기 규제 완화 조치를 내놨을까요? 정부는 '거래 절벽 현상이 심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매수세는 뚝 끊겼고, 성사된 매매 거래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 점점 더 얼어붙는 부동산 시장에 어떻게든 불을 지펴 보겠다는 겁니다.

거래절벽 현상이 심각한 건 맞습니다. '거래 절벽', '거래 실종'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점점 더 악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9월 서울 아파트 거래량은 614건입니다. 2006년 이후 역대 최저 수준으로, 작년 9월 거래량(2,691건)의 1/4도 안 됩니다. 부동산 빙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정부는 '규제 완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지난 7일 10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사진=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한 달 전만 해도 '인위적 경기부양책 없다'던 정부


거래 절벽 심각성을 고려하더라도, 정부의 갑작스러운 규제 완화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정책 기조 때문입니다. 비상경제민생회의가 열리기 한 달 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9월 22일)
"인위적으로 거래를 일으키기 위해서 다주택자들이 대출 끌어들여서 집을 사게 하도록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현재 전체적인 정책 기조와 정반대되는 정책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원희룡 장관은 다른 언론사 인터뷰에서도 '지금보다 집값이 더 떨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규제를 완화하면 집값은 뛰기 마련이기에, 원 장관의 발언은 당분간 섣불리 부동산 경기부양책을 제시하진 않겠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그런데 한두 달 만에 정책 기조가 바뀐 걸까요. 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특정 정책을 펼치진 않겠다던 정부가 입장을 180도 바꿨습니다. 원 장관이 언급했던 '전체적인 정책 기조'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책 효과? 부동산 시장 "글쎄"


거래 활성화를 기대했던 정부 바람과 달리 시장은 아직 반응이 없습니다. 동네 부동산에 들러 '10·27 대책 이후 매수 문의가 늘었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변은 같습니다.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겁니다. 거래 절벽 현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매물은 쌓이는 중입니다. 아실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매매 매물은 어제(4일)를 기준으로 5만 7,258건, 반년 전(5만 6,702건)에 비해서 556건 늘었습니다.

대출, 부동산 이미지

급격히 부동산 거래가 위축된 데는 금리 인상 영향이 큽니다. 대출 규제를 아무리 풀어도, 다달이 내는 이자 부담 때문에 빚내서 집 살 사람이 없는 겁니다. 이달 말 한국은행이 또 한 번 기준금리를 높일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 매수자들은 대출을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어나는 가계 부채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경제 주체가 부담해야 하는 빚이 늘어날수록, 나라 경제는 휘청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고금리 국면에서는 가계 부채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집니다. 정부는 가계부채 연착륙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 가계 부채를 줄여야 할 정부가, 앞으로 줄이겠다던 정부가 여론 수렴 절차도 없이 갑자기 대출 규제를 확 푼 건, 정책 일관성을 스스로 해쳤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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