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연의 시작>
소방관들이 개인 장비를 자기 돈으로 구입한다는 기사가 인연의 시작이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신들이 도울 일은 없을까 하는 소박한 질문에서 소방관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고 김범석 소방관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고 김범석 소방관은 소방관이 된 지 8년 만인 2014년 혈관육종암이란 희소 질환으로 숨졌다. 고 김범석 소방관처럼 암과 투병 중인 소방관을 돕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만든 게 <RESCUE EACH OTHER>, 약칭으로 '레오(REO)'라는 동아리였다. 위험할 때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소방관들이니 그 사람들 어려울 때 우리가 돕자는 취지로 지은 이름이다. 2016년 여름, 이 사람이 스물세 살 때 일이다.
"이름 먼저 짓고 난 뒤 소방관을 구한다라는 게 뭐냐, 우리가 진짜 구할 수 있는 거냐 뭐 이런 또 질문을 스스로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소방관들을 화재 현장에서 구하는 건 방화복이더라고요. 직접적으로 소방관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그럼 방화복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자라는 게 그때 나오기 시작했었고요. 방화복으로 가방 만들기가 제일 쉬웠고 그래서 가방을 만들기로 한 거죠"
2016년 가을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1천 5백 명에게 4천만 원을 모아서 사업 자금으로 삼았다. 선 주문 방식으로 먼저 돈을 받고 나중에 물건을 만들어 주는 방식의 사업이었다. 내구연한 3년이 지나 폐기되는 방화복을 소방서에서 걷어와서 세탁하고 분해한 뒤 거기에서 나온 천으로 가방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제품 제작하는 것만 빼고 저희들이 직접 다 했거든요. 대학생 신분이라는 게 엄청난 방어를 해준 거 같아요. 취준생 친구들 불러서 방화복 2시간만 뜯다 가라고 시키고… 수거해온 방화복 세탁도 자취하는 친구 집에 가서 세탁기 좀 쓰자 해서 세탁기 돌리고 그렇게 세탁한 방화복은 학교에 가지고 와서 말리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 열기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주말이면 그 집회에 참석했지만 그 집회보다 폐방화복을 수거, 세탁하고 분해하고 가방을 파는 일에 더 열중했다.
-아이디어가 나오고 물건을 판매하기까지 그 과정이 얼마나 걸린 거예요.
"그 과정이 거의 한 1년… 거의 한 10개월 가까이 걸렸던 것 같아요."
-이 대표께서도 직접 미싱을 하고 방화복을 직접 뜯고 그랬습니까.
"그렇죠. 초기에는 직접 다 뜯고 미싱도 해보고… 미싱을 근데 전 잘하지 못합니다."
-디자인 같은 거는 누가?
"디자인도 직접 했습니다. 지금도 디자인을 하고 있고요"
그렇게 해서 번 돈이 5백만 원, 당초 예상보다 적어 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더 2백만 원을 걷어 7백만 원을 만들었다. 이 돈을 고 김범석 소방관 유가족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마음만 받겠다는 말을 들었다. 돈은 형편이 더 어려운 소방관들에게 기부하라고 했다. 암 투병 중이던 두 명의 다른 소방관들에게 전달했다. 2017년 8월 이야기다.
2. <자신의 전 재산 털어 소방관 추모 전시회>
두 명의 소방관은 기부금을 전달받고 서너 달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공무상 상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자신과 인연을 맺은 소방관이 죽었다는 사실이 만 스물네 살 청년에게는 충격이었다. 고인과 유가족들에게 헛된 희망만을 준 게 아닐까 자책했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저는 처음 느껴봤던 것 같아요. 가족 중에도 돌아가신 분이 아무도 안 계셨고요. 저희들이 기부금을 드린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듣는데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좀 고민이 깊어지다 보니까 우리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닐까 뭐 이런 생각들도 했었고"
그 소방관들의 죽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김범석 소방관을 비롯해 암으로 숨진 소방관을 기억하는 전시회였다. 전시회를 하려고 보니 천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기업들을 찾아다니고 아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반가운 답은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천만 원을 내놓았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때로는 돈이 진실을 말할 때가 있고 돈의 크기가 마음의 크기일 때가 있다.
-그 전시회는 뭘 보여주는 자리였습니까.
"김범석 소방관님이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어떻게 사셨는지를 포함해서 소방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정리하고 처음 임용되는 소방관들이 어떤 마음가짐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인터뷰를 담은 전시였습니다."
-천만 원이 청년 이승우한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 돈을 내놓을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 전시회를 준비할 돈은 없는데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제가 건설 현장에서 일해서 모아놓은 돈 딱 천만 원이 있는 거예요. '그래 여기에 그 돈을 쓰자' 해서 그때 이제 전 재산을 턴 거죠"
-대학생에게 천만 원은 진짜 큰돈인데요.
"그때는 사실 그게 뭐 크다 작다 이런 걸 떠나서 그냥 이걸 해야 된다라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분들 돌아가신 것에 대한 부채 의식이 컸던 거 같아요."
폐방화복으로 가방을 만들어 암 투병 소방관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언론이 주목할 만했다. 일 년에 서너 건, 많을 때는 열 번 이상 인터뷰를 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늘었다. 그것이 부끄러웠다. 정작 자신들이 돕고 싶은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자기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게 미안했다. 화가 날 때도 있었다.
"학교를 지나가는데 친구가 어디 인터뷰에서 봤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뭔가 유쾌하지 않았어요. 나는 암 투병 소방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작한 건데 왜 내가 갑자기 유명해져 있지? 암 투병 소방관에 대한 문제는 하나도 변한 게 없고 암 투병 소방관은 돌아가셨고 당시 표창원 의원님이 발의한 법안은 국회에서 논의 한 번 된 적도 없는데 나만 왜 유명해져 있지? 좀 나쁘게 말하면 '내가 소방관 팔이를 한 건가' 이런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되게 싫었던 것 같아요."
3. <건축가가 꿈이었던 청년>
중학교 때부터 건축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고 서로 돕는 것을 꿈꾸었다. 2012년 건국대학교 건축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오니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축이 많이 달랐다. 공부는 하지 않고 술 마시며 놀았다. 어느 날 'Change the world, 세상을 바꾸자'라는 내용의 교내 동아리 포스터를 봤다. 그 포스터를 보고 가슴이 뛰었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기로 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강 어촌 살리기 운동에 참여했다. 한강에서 장어를 잡아 그 돈으로 50여 가구에 이르는 한강 어촌을 살리자는 프로젝트였다. 그 운동은 1년 반 만에 실패했다. 목표가 정확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
"마을 살리기라는 표현 자체는 너무 좋은데 뭘 살릴 거냐 이런 것들에 대한 외침은 좀 없었던 것 같아요. 한강 어촌을 살리겠다 하는데 그럼 정확히 어떤 걸 살리겠다 뭐 이런 것들이 좀 뾰족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방관 문제를 다룰 때는 하나에 집중을 해보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 하나 먹고살기도 힘들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청년이다. 누가 그런 일을 하라는 사람도 없었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사람도 없는데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발적으로 나섰다. 시간과 열정만이 아니라 자신의 돈까지 내놓았다. 이 사회로부터 받은 게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텐데, 받은 것은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부모님 영향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봉사활동을 엄청 많이 시키셨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주말마다 복지원 같은 곳 데려가서 화장실 청소도 시키고 목욕 봉사도 하고 도시락 배달도 하고... 사실 집이 엄청나게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얘기 되게 많이 하셨어요. 너를 사회가 함께 키워주는 거기 때문에 네가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얘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4. <운명을 바꾼 세 시간의 만남>
2016년 여름 고 김범석 소방관 부친 김정남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첫 만남에서 김정남과 세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만남을 통해 가장 먼저 가장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는 소방관들이 정작 본인들이 생명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현실에 눈떴다. 고 김범석 소방관은 자신을 병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소방관으로 살다 죽은 사람으로 기억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의 그 유언을 지켜주기 위해 김정남은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유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 사람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이 사람이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김정남의 사연은 지금 들어도 눈물겹다. 김정남은 생때같은 아들 김범석이 31살의 젊은 나이에 그 몹쓸 병으로 피골이 상접해 죽었다는 것을 지금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사실 저희들의 아픈 마음을 길게 들어줄 사람이 없었죠. 누구한테 그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저희 친구들한테도 주위에도 알릴 수가 없더라고요. 그걸 알리는 것 자체가 충격이고 정말 자존심도 상하고… 지금도 소방차를 보고 젊은 사람들을 보면 죽은 아들과 오버랩 됩니다. 그래서 참 마음속에만 담고 있었는데 이승우 대표를 포함해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으니까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죠. 정말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많이 했어요."
김정남/ 고 김범석 소방관 부친
20대 대학생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 사람을 붙잡고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했을까. 이야기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들어주는 게 고마웠다고 했다. 이 사람이 방화복으로 만든 가방을 팔아 마련한 돈을 김정남은 사양했다. 우리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소방관, 그래서 소송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하는 소방관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제가 그 돈을 받을 수가 없었죠. 저희들의 말을 들어주고,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뛰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자기들이 그렇게 피땀 흘려서 노력한 그 대가를, 시민들 한 분 한 분이 모아주신 돈을 저희들이 받을 수가 없었죠. 저희보다 더 고통스럽게 지금 투병하는 분들이 계셨으니까 그분들이 참 눈에 걸렸고 어차피 우리 아들은 사망을 했고 사실 병원에서 투병하고 재활을 하는 소방관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도와주는 게 좋겠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남/ 고 김범석 소방관 부친
선의가 모여서 정의가 될 수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돕는 아름다움을 이승우와 김정남의 만남은 보여준다. 그 만남 이후 고 김범석 소방관 관련 재판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공무상 상해를 인정받으려는 노력, 국가의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은 지루하고 느리게 진행되었고 이기는 경우보다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희망을 보기보다 절망을 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사실 어렵게 창업을 하고 매출이 없고 돈을 못 버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고 김범석 소방관님 재판에서 지는 게 힘들었어요. 재판이 계속 연기되고 지루하게 진행되는 것도 사람을 진 빠지게 했습니다. 옆에서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유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서 내가 겪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버텼죠."
지난 2019년 고 김범석 소방관이 공무상 상해 판정을 받았다. 그때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했다. 올해 5월 김범석 소방관법이라고 불리는 '위험직 공무원 공상추정법'이 마침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때도 기뻤다. 2016년 암 투병 소방관 1백 21명 가운데 공무상 상해로 인정받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지금은 암 투병 소방관 가운데 대략 절반 정도가 공무상 상해 판정을 받는다.
5. <방화복으로 창업>
자본금 2백만 원으로 지난 2018년 8월 사회적 기업 <119REO>를 창업했다. 학생 신분으로 동아리 활동을 할 때와 창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창업에는 완충 지대가 없다고 했다. 대학생 동아리에서 시작한 일이 생업이 된 것이다. 폐방화복을 재가공해 가방, 티셔츠, 팔찌 등을 만들어 판다. 오프라인 매장도 있지만 주로 온라인을 통해 매출이 이루어진다. 직원이 6명, 지난해 매출이 9억 원이다.
"폐방화복 재활용 사업을 하는 동아리가 저희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저희 시작할 때부터도 한 대여섯 개 정도 저희랑 유사한 형태의 동아리들이 있었어요. 다른 동아리들은 창업까지 가지 못했던 거고요. 사실 무상으로 소방복을 받는 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물론 그 과정도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이후가 훨씬 중요한 것 같아요. 이걸 가공하는 과정이 돈도 많이 들고 그 과정들이 사실 쉽지 않거든요."
폐방화복은 소방서에서 무료로 받는다. 폐방화복을 무료로 받는다고 하니 최소한의 수익은 보장되는 거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폐방화복을 재가공하는 비용이 새 원단을 구입하는 것보다 더 든다. 일본이나 미국에도 방화복을 재활용하는 사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출은 미국이 5억 원 정도, 일본 3억 원 수준으로 극히 미미하다. 폐방화복을 재가공하는 데 들어가는 인건비가 너무 비싸 채산성이 맞지 않는 것이다.
시장 규모가 작은 것도 사업 아이템으로는 불리한 점이다. 사업 확장성에 한계가 있으니 투자자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다. 도전자들은 계속 생겨나고 있다. 매년 생겼다가 없어지고 또 생겨난다.
"방화복 업사이클링이라는 게 사업만으로 보기에는 사실 되게 좀 작은 거죠. 한 해에 나오는 70톤의 폐방화복을 모두 업사이클링을 한다고 해도 예상 연 매출액은 1백억 원 정도거든요. 사업 확장성에 한계가 있으니 투자자가 보기에 아주 매력적인 사업은 아닌 거죠. 방화복 외에도 플라스틱이나 폐타이어처럼 업사이클링 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런 것들은 이거에 비해서 훨씬 적은 노력으로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걸 하려고 시작하셨다가 다른 걸로 바꾸시는 경우들도 많고요"
방화복 수거는 퇴직 소방관 단체에, 세탁과 분해 등 재가공은 서울, 인천, 안산 등 세 곳의 지역 자활 센터에 맡긴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싸기도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과 일거리를 나눈다는 뜻도 있다. 지금까지 받은 각종 지원금이 2천만 원 정도라고 했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 대방동 매장과 서울 종로에 있는 사무실 임대료는 각각 30만 정도다. 청년 창업 지원 제도의 혜택을 받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사용하고 있다. 창업지원금으로 받은 2천만 원이 생각보다 적은 것 같다고 했더니 자기에게는 큰돈이고 큰 도움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119REO'가 수거한 방화복은 27톤, 대략 8천 벌이다. 사연 없는 방화복은 없다. 소방관의 땀이 묻어있고 눈물이 배어 있고 때로는 피가 묻어 있고 구조 현장의 비명과 아우성이 묻어 있기도 하다. 제품을 만들 때 가급적 그 흔적을 살리려고 한다. 실제로 제품에 그을음이 묻어 있기도 하고 긁힌 흔적도 보였다. 구조 현장의 냄새가 그대로 풍기는 듯한 제품도 있다. 10평 정도 되는 대방동 매장에서 가장 비싼 가방이 32만 원, 취재에 동행한 이승환 기자는 비슷한 기능의 다른 제품에 비하면 조금 비싼 거 같다고 했다. 제품 그 자체보다 의미에 가치를 두는 이른바 '가치 소비'를 하는 사람들과 5만 명 가까운 소방관들의 후원이 큰 힘이다. 대통령 부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제품을 구입했는데 그것은 청년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응원가 같은 것이다.
유명 백화점에 팝업 매장을 열고 나이키를 비롯한 유명 브랜드와 손을 잡기도 했지만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선 것은 아니다. 올해 예상 매출액은 지난해와 비슷한 9억 원 정도, 2년 연속 적자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러다 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투자자를 찾고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기업을 만들 수 있을지 늘 고민이다. 더 좋은 제품을 더 좋은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지 않으면 좋은 생각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느낀다.
-창업한 이후 4년 3개월이 지났는데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지금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계속 매출을 키워나가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다른 스타트업들이 하듯이 J 커브를 그린다든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고요. 이 사업이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가는 게 맞나 뭐 이런 고민들도 들고… 왜냐하면 지표들이나 이런 것들을 계속 신장해 나가야 되는데 그런 고민, 또 내가 진짜 잘하고 있는 건가 이런 고민들이 계속 겹쳤던 것 같아요. 내부적으로 R&D 관련해서 어떻게 하면 가방보다도 더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 수 있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6. <기부 약속은 지켜야 되는데>
사업을 시작하면서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창업한 이후 지금까지 기부한 돈이 1억 원이 넘는다. 영업 이익의 절반을 기부한다는 말은 다소 와전된 말이었다. 얼마를 기부금으로 내놓아야 할지, 얼마를 투자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올해처럼 적자를 내는 상황에서 투자를 받아 그 돈을 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기부는 사회와 한 약속이고 자신과 한 약속이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게 때로는 힘든 모양이다. 기업 성장 등의 이유로 기부를 뒤로 미루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그런 말들이 족쇄로 작용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제가 인건비를 안 받으면 기부 금액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영업이익이 작았는데 지금은 어쨌든 직원들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까 영업이익 자체도 커지는데 이제 누군가 인건비를 안 받는 것으로 영업이익 50%를 채울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게 현실적이지 못한 재무적 관점이었구나 뭐 이런 생각들이 있고 좀 현실 가능한 방안이면서도 기부를 많이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찾아 나가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 고전 중이지만 미래에 대한 꿈은 크다. 주한미군 소속 소방관들이 입었던 방화복을 재활용해서 미국에서 팔면 의미가 있을 거라고 했다. 미국은 인건비 부담이 커서 이 사업이 활성화되기 어렵지만 우리 인력을 활용하는 거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사업을 좀 더 키우고 싶으신 거죠.
"사업은 계속 커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큼이나 키우고 싶으세요.
"목표라면 사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Rescue Each Other라는 게 예전에는 '소방관이 우리를 구하듯이 우리도 소방관을 구합니다'라는 내용이었는데 이제 '서로가 서로를 구한다'는 뜻으로 확대되는 거죠. 이제는 소방관에 한정되거나 혹은 국내로만 한정하지 않고 글로벌로 확장할 수 있는 영역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아라미드 방화복이 전 세계 15-20개 안팎의 국가들만 입고 나머지 국가들은 사실 방화복이 없거든요. 그래서 이 사업이 뭔가 확장이 된다면 그 국가들에 있는 방화복을 수거해서 쓸 수 있는 건 당연히 필요한 국가에 좀 지원을 하고 업사이클링한 제품들은 선진국에 판매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7. <소방관에서 방화복, 방화복에서 환경으로>
소방관에서 시작해 폐방화복으로 확대된 관심은 이제 환경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화복을 업사이클링하는 것 자체가 탄소 배출을 늦추는 환경보호 운동이기도 하다.
"업사이클링이라는 것 자체가 환경 운동의 선봉장 같은 역할을 하다 보니까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고 이 제품을 만들면서 CO2를 우리가 얼마나 감축시킬 수 있냐 이런 것들도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사실 감축보다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억제시키는 거죠. 그러니까 (방화복 소재인) 아라미드가 그냥 폐기되면 자기 무게의 한 2.5에서 2.6배 정도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면서 타게 되는데 그러면 그만큼을 이제 늦게 소각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거죠."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팔고 많이 남기는 게 사업가의 미덕이다. 그러나 이 사람 회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적정하게 만들어서 재고를 남기지 않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자신들이 만든 제품이 재고로 쌓이는 것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거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에너지도 소비된다. 그런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다량 생산이 아닌 적정 생산이 중요한 것이다.
"저는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데에 사용됐던 것을 가지고서 업사이클링을 하는 게 맞지 뭔가 인간이 쓰지도 않을 거였는데 만들었다가, 뭔가 불필요한 생산이었던 거죠. 근데 그거를 그냥 버리기는 그냥 아까우니까 이거 업사이클링하자 라고 한다면 어떻게 보면 과잉 생산에 대한 면죄부가 되는 거죠"
환경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말하는 이 사람에게 당신의 정체성은 사업가인지 아니면 운동가인지 물었다. 별 망설임 없이 사업가라고 했다.
8. <자기 표현에 서투른 사람>
스토리를 만드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사연을 만들자고 들면 눈물이든, 웃음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테고 남을 울리자고 들면 울릴 만한 소재도 적지 않아 보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쑥스럽게 생각했다.
-요즘 청년 세대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대표는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구가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습니다.
"뭐 사실 이거는 레오 활동을 알리는 게 주지 저 자신은 알릴 게 별로 많지가 않거든요. 제가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았고. 저 자신을 특별히 알릴 게 별로 없다 보니까 저의 활동 자체를 알리는 게 중심인 것 같고요. 제 개인 SNS도 이 사업을 알리는 게 주죠. 근데 이 활동 외에는 제가 뭐 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이 대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있죠?
"간혹 있습니다."
-유명해지는 일이 이승우 대표한테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걸까요. 혹시 유명해지고 싶어서 이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실 유명해지는 거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담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나는 갑자기 뭔가 유명해져 있는데 소방관들에 대한 처우에는 변화가 없고… 그런 것들이 오히려 고민이 됐었죠. 지금은 소방관 권리 보장이 하나둘씩 이루어지는 게 있기 때문에 그런 부담감은 점점 낮아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제가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119REO라는 이 브랜드가 더 많이 커져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1993년생, 만으로 29살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사람이다. 기대할 것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입학한 지 만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다.
"부모님들은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니,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냐, 휴학을 하면서까지 사업을 해야겠느냐, 과연 그게 너의 인생에 맞는 일이냐' 뭐 이런 질문들은 계속하셨던 것 같고 그리고 '네가 어쨌든 건축을 그렇게 하고 싶어 했는데 그거를 왜 이제 와서 안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씀도 하시지만 어쨌든 제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시죠"
9. <"이제 부자의 첫 발을 내디디고 있습니다">
올 한 해가 힘들었다고 했다. 왜 그리 힘들었느냐고 물었더니 알아듣기 쉬운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지난해 수준에 그칠 것 같은 회사 매출 전망이 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 사람과 '119REO'를 사람들이 마냥 고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은 아니다.
"결국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구나 싶은 시선도 분명히 인식을 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그렇게 사업으로 승화시켜 나가고, 좋은 일 좋은 공익적인 것도 사업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모델 제시도 후배들을 위해서 대단히 저는 긍정적이라고 보거든요. 그걸 공익을 이용하거나 악용해서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다소 조마조마하면서 지켜봤는데 그렇지 않은 거 같더라고요.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표창원/ 전 국회의원
세상은 얼마든지 내 발밑에 둘 수 있다는 오만함 같은 것도 없고 남들은 흉내 낼 수도 없는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지만 긍정과 선의로 무장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 매출 9억 원이 넘는 기업의 대표지만 연봉은 3천몇백만 원 정도다. 높은 자리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에 대한 열망도 이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름을 알리는 게 목표 같지도 않았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아는 정치인도 있지만 거기에 투신할 거 같지도 않다.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 생각이 바뀌고, 법이 바뀌고 그러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을 20대에 배웠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은 작은 행동들이 지속됐을 때 바뀌는 거지 뭔가 한 번에 큰 사건 그런 걸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힘들 때도 많고 스스로 어리석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해 주식 투자도 하고, 코인 투자도 한다. 주식투자로 높은 수익률을 올리기도 했지만 장이 안 좋은 지금은 고전 중이다. 얼마나 돈이 있으면 만족할지 물어봤다. 남에게 기부할 수 있으면 부자라고 했다. 지금까지 1억 원이 넘는 돈을 <119REO> 이름으로 기부를 했으니 이제 부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업하시면서 지금 나누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럼 부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원하는 만큼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부자의 반열에 들어가고 있다, 부자로서 첫 발을 내디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진지함과 명랑함 딱 두 가지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밥 먹을 때 보니 앞날을 걱정하는 창업자의 얼굴이었다. 오직 선의로만 무장한 청년은 이제 아니다. 세상 역시 내년이면 만 서른이 되는 이 사람을 마냥 기특한 청년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냉정하게 계산을 해야 되고 앞으로 사업을 어떻게 더 확장할 것인지 고민해야 되고 이미 그런 고민을 하는 얼굴을 보일 때도 있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암 투병 소방관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은 여러 가지 사업 목표 중에 하나일 뿐이다. 환경을 말하고 나눔을 이야기하고 소통을 말하고 봉사를 말하면서 20대를 살아왔다. 하기 좋은 말이었고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런 이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박수로 격려로 화답을 했다.
30대에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폐방화복 재활용 사업이 진정한 의미의 환경 보호인지 자신이 없고, 지속적으로 기부를 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찬사 일색이었던 언론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얼굴로 이 사람을 추궁하고 나설지도 모른다. 이 사람 은사인 건국대 주범 교수도 이런 맥락에서 20대에 성공한 사람이 30대를 제대로 넘기는 것을 보기가 어렵다고 말한 것일 게다.
올해 초 한 선배를 찾아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그 선배가 그럼 같이 달리기를 해보자고 했단다. 올해부터 달리기를 시작해서 매일 5-6킬로미터씩 달리고 있는데 내후년쯤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달리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섬겨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이 사람에게 달리기는 잘 어울리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