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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산업은행은 왜 부산행 표를 끊었나?

[취재파일] 산업은행은 왜 부산행 표를 끊었나?

갑자기 등장한 '부산 이전론'…어디에서 시작됐나?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입니다. 말 그대로 은행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국가 정책을 잘 뒷받침하는 데 힘을 쏟는 곳입니다. 쌍용차, 대우조선해양, HMM(옛 현대상선)이 무너지려 했을 때도 산업은행이 그 뒤를 받쳤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모르는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산업은행 부산 이전 안이 포함되면서 이사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직원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의 첫 출근길부터 막아섰고, 강석훈 회장은 발길을 돌려 서울 모처 등에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얼마간의 소강상태가 이어졌는데, 9월부터는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8월 마지막 날 부산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 한번 '부산 이전'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강석훈 회장은 뒤늦게 참석 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정치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식사 자리에서 윤 대통령으로부터 부산 이전에 대한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걸로 알려졌습니다. 곧 산업은행은 회장 직속 전담조직을 운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사이 산업은행 직원들의 퇴사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실력 있는 직원들이 산업은행을 떠났고, 산업은행 전직 고위 관계자 자녀들까지 사표를 낸 걸로 전해졌습니다.
 

커지는 잡음…우량 고객 이관 시나리오 작성

금융위원회

금융당국은 발 빠르게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업은행의 알짜 거래처를 민간에 넘기는 방안이 수면 위로 떠 올라왔습니다.

SBS 취재 결과 금융위원회는 '우량기업 여신의 시중은행 이관 프로세스 확립'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산업은행 같은 국책은행들의 거래처 중에서 알짜 회사들을 골라낸 다음 대출 계약 내용을 특정 시중은행에 제공하겠다는 겁니다. 정보를 넘겨받은 은행들은 기존 계약 조건을 들여다보고 해당 기업에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 고객을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지용 상명대 교수는 "시중은행의 경우 상업적 논리에 집중해 단기적인 성과에 따라 대출을 해줄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길게 봤을 때 사업성이 뛰어나 자금 지원이 필요한 데도 대상에서 제외되는 기업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  [단독] "국책은행 알짜 거래처들 시중은행에 넘겨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나선 강석훈 회장도 금융위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아무런 실체가 없는 이야기다"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SBS 취재 결과는 달랐습니다. 취재진이 확보한 산업은행 내부 문서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신용도가 최고 수준인 알짜 회사만 골라서 최대 18조 3천억 원에 달하는 영업 자산을 민간은행에 넘길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세웠습니다. 해외 자산 등을 뺀 정상 대출 106조 원 가운데 5분의 1에 가까운 액수입니다. SK하이닉스, LG화학, 현대자동차, 삼성물산 등 국내 최고 대기업을 포함해 모두 226개 회사의 대출 정보를 넘기겠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정치권에서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김주영 국회 기재위원은 "국책은행이 제 역할을 못 하면 결국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  [단독] 사실 아니라더니…금융위, '알짜' 넘길 시나리오 확인

산업은행은 금융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초 갑자기 '제보자 색출'에 나섰습니다. 산업은행 이관 시나리오를 외부에 유출한 직원을 찾기 위해 면담을 시도한 것인데, 직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무산됐습니다. '사실과 다르다'면서 사실을 유출한 직원을 찾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부울경 경제부흥" vs. "졸속 이전"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

강석훈 회장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 경제 부흥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잘 수행하겠다는 겁니다. 정부가 이전을 지시하면 국책은행으로서 거절할 수 없다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과거 많은 정부부처가 정부 정책에 따라 세종 등 전국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직원들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녀 양육 등 개인적인 문제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과 상관없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국책은행으로서 제 역할을 하려면 서울이라는 입지가 가장 유리하다는 겁니다. 상당수 은행이나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이 여의도에 모여 있거나 지점을 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전임 이동걸 회장도 물러나기 전 쓴소리를 했습니다. 이동걸 전 회장은 "지역균형발전에 누가 동의하지 않겠나. 다만 지속 가능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면 퍼주기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부·울·경 지역은 박정희 시절부터 특혜 지역이었다"면서, "부·울·경 지역은 스스로 자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산업은행 이전을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본점을 서울로 지정한 '산은법'을 개정해야 하고, 직원들을 설득하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정부 정책이니 무조건 내려가야 한다고 밀어붙이기보다는 왜 내려가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겁니다. 이런 과정 없이 밀어붙였다가는 그 피해는 규모가 작은 알짜 기업들은 물론 우리 경제 전체로 번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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