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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영화의 재탄생…4K리마스터링의 세계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49

     “카사블랑카”(1942)를 처음으로 극.장.에.서. 봤습니다. 험프리 보가트의 중후한 연기, 후광이 비치는 듯한 잉그리드 버그먼의 매력, 스크린 위로 ‘애즈 타임 고즈 바이(As Time Goes By)’가 흘러나오고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라는 명대사가 들릴 때면 역시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사블랑카”는 미국영화연구소 선정 100대 영화 중 3위(1위 “시민 케인”, 2위 “대부”)에 선정되고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각색상을 휩쓴 명작이지만, 2차 세계대전 중에 개봉했으니 80세가 넘지 않는 이상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는 없었죠. 예전에 지상파 TV에서 자주 틀어줬던 것 같기는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 좋은 화질로 감상할 수 있었던 건 “카사블랑카”의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워너브라더스가 이 영화를 ‘4K 리마스터링’해서 극장에서 재개봉했기 때문입니다. ‘4K’란 가로 4096× 세로 2160의 픽셀로 보여주는 해상도입니다. 현재 널리 쓰이는 풀HD(1920×1080) 영상보다 4배의 픽셀 수가 있기 때문에 같은 크기 화면이라도 훨씬 고품질의 영상을 시청할 수 있습니다. 
  ‘리마스터링(Remastering)’이란 말 그대로 아날로그 필름 마스터(원본)를 디지털로 변환해 새로운 마스터본을 만드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최근에는 “아바타”가 13년 만에 4K로 리마스터링돼 재개봉해서 2주 만에 23만 명의 관객을 모았죠. “화양연화”, “중경삼림” 등 왕가위 영화들이 4K 리마스터링 판으로 재개봉해서 젊은 세대의 인기를 끈 건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기본적으로 아날로그 필름의 해상도를 수치화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상업 영화들이 35mm 필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사한 해상도의 디지털로 옮겼을 때 4K 이상이 나오는데 지금 (활용가능한) 기준으로는 4K 정도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영화 전공자인 조해원 영상자료원 영상복원팀장이 조곤조곤 설명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파주보존센터에 있는 4K 디지털 스캐너
우리나라에서 4K 리마스터링 스캔이 가능한 곳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 한국에 들어와 있는 가장 고성능 제품인 독일제 스캐너 스캐니티가 있는 곳은 두 곳입니다. 도심으로 향하는 출근 시간대의 혼잡을 역주행해서 아침 일찍 파주로 가는 길은 4K 리마스터링된 영상처럼 쾌청했습니다. 파주출판도시 근처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 파주보존센터는 스캐니티를 이용해서 보존된 필름의 디지털 스캔부터 색보정 · 음향 복원, 마스터링까지 4K 리마스터링의 모든 단계를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기관입니다. 올해에만 13편의 영화를 복원한 것으로 포함해 모두 62편을 디지털화했습니다. 

스캐니티 장비가 있는 또 한 곳은 역시 파주에 있는 ‘기록문화보관소’라는 이름의 민간 업체입니다. 영화 편집자로 경력을 시작해서 영화진흥위원회 기술부에서 10년 넘게 복원 일을 한 기록문화보관소 박민철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독일제 4K 리마스터링 장비를 들여온 장본인입니다. 기록문화보관소가 4K 스캔을 해서 프리즘웍스 등 리마스터링 전문 업체에 넘기면 이곳에서 약 한 달 가량의 복원 과정을 거쳐 아날로그 영화가 4K 영화로 재탄생합니다. 스캔을 제외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4K 리마스터링이 가능한 업체 역시 매우 적은 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 대표가 리마스터링에 참여한 첫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지금은 거의 쓸모가 없어진 영사기들과 오래된 필름통들이 곳곳을 채우고 있는 사무실은 박 대표의 영화와 아날로그 필름에 대한 애정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영상자료원 작업실과 박 대표 사무실 두 곳 모두에서 책상 위에 놓여진 영화(기술)관련 원서들이 슬쩍 눈에 들어왔는데요, 딱히 체계적으로 리마스터링이나 영상 복원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는 현실에서 독학해가며 작업을 할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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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자료원 색 재현실에 들어서자마자 가운데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2000년도 영화 “반칙왕”의 색보정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반칙왕"은 송강호 배우가 막 주연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할 때의 영화로 개인적으로는 “넘버3”와 함께 송강호의 리즈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진영 배우의 풋풋한 모습도 아련하게 기억나고요. 
  색보정 중이던 영상은 ‘퇴근 후 레슬러’ 송강호가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하고 링 위에서 대결을 펼치던 장면이었습니다. 색보정 엔지니어가 트랙볼을 조정하자 어둡고 윤곽이 다소 희미했던 송강호의 얼굴이 밝고 선명하게 바뀌었습니다. 색온도를 만지자 얼굴 색깔톤도 보다 자연스럽게 바뀌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색재현실
- 이걸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다 손을 보세요, 아니면 기준이 되는 장면의 보정 값을 다른 컷에도 그대로 적용하나요?
- 그렇게 할 수는 없고요. 같은 조명 값 아래 촬영된 씬은 대개 한꺼번에 작업하지만 장소가 바뀐다거나 조명이 바뀌면 그 프레임부터는 다시 작업을 해야죠” 

색보정 엔지니어가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시사실처럼 생긴 큰 방에서 스크린을 독차지하며 작업하는 환경을 내심 부러워했던 마음이 좀 달라지더군요. 영화는 1초에 24 프레임입니다. 쾌적하게 느껴졌던 작업실은 정교한 리마스터링을 위해서 실제 극장과 최대한 유사한 환경을 구축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감독들은 와서 (복원 현장을) 보고는 과거 상영했을 당시보다 더 깔끔하게 복원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술이 그만큼 좋아졌으니까요.” 조해원 팀장은 말했습니다. “상업 영화계에서 리마스터링은 아무래도 시대적인 트렌드를 감안해 디지털로 변환해서 활용(유료 상영)하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화면도 디지털 감성에 맞춰서 보정을 하고 사운드도 새롭게 채널을 믹싱해서 넣는다든지 하고요, (영상자료원 같은) 필름 아카이브에서의 디지털화나 복원은 필름의 디지털본에 대한 보존 매체를 만든다는 개념이니까 필름의 질감을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동일하게 디지털 매체로 옮기는 걸 목표로 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복원인가 -흠결까지 원본 그대로 살릴 것인가, 티끌은 지우고 요즘 감성에 맞게 보기 좋게 바꿀 것인가- 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이나 복원에서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 입니다. “왕가위 감독님도 4K 리마스터링을 할 때 굉장히 고민을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원본을 유지하면서 리마스터링을 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 시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버전을 만들 것이냐? 결국 필름으로 왕가위 영화들을 봤던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억을 선사하는 걸로 가닥을 잡아서 작업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조 팀장은 덧붙였습니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 7편은 이탈리아 볼로냐의 복원전문업체 리마지네 리트로바타에서 4K 리마스터링됐습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영화 아실 겁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쥰세이도 유화 복원을 배우기 위해 피렌체에서 유학하지요. 이탈리아는 고전의 나라답게 그림과 영상 복원 기술이 세계적으로 이름 높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도 리마지네 리트로바타에서 4K 리마스터링됐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명성의 리마지네 리트로바타도 노란 색감을 지나치게 도드라지게 표현한다는 일부 영화팬들의 비판을 받는 모양입니다.

  이처럼 정확한 복원의 기준을 잡기는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촬영 당시 네가티브 필름(ON:오리지널 네거티브)의 상태와 마스터 필름(MP: 마스터 포지티브)의 상태, 상영을 위한 프린트한 필름(RP:릴리스 프린트)의 상태가 다 다르고, 심지어 개개의 상영용 프린트도 복사 상태에 따라 화질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극장 영사기 상태에 따라서도 화질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어느 극장에서 봤느냐에 따라 관객 저마다 조금씩은 다른 화면의 추억과 기억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감독을 불러다 연출 의도와 촬영 당시 상황을 물어보면 정확한 복원이 가능할까요? 감독도 머리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이미지와 실제 구현된 이미지가 다를 수 있고, 감독이 편집실에서 봤던 화질과 관객들이 극장에서 본 화질도 다릅니다. 결국 완전한 복원이란 기준부터 애매모호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이런 기준으로 복원합니다”라고 선포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외국의 리마스터링 기술과 우리나라의 기술에 차이가 있을까요?
- 기술적인 부분보다 인프라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화면을 깨끗하게 만드는 복원 작업을 할 때 우리는 두 명의 담당 인력이 있다면 볼로냐 쪽은 거의 40명 정도가 있습니다. 또 저희는 기간을 딱 정해 놓고 연내에 작업을 완료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외국은 모든 자료들을 다 펼쳐 놓고 고증을 하면서 몇 년에 걸쳐서라도 복원을 하는 프로젝트형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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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문화보관소 박민철 대표에게 보유하고 있는 필름 중에 잘 알려진 작품을 보여줄 수 있냐고 부탁했습니다. 박 대표가 꺼내온 필름통 뚜껑에는 ‘Secret Sunshine’, ‘색,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이안 감독의 “색,계”의 극장 상영용 필름이었습니다. 

“둘 다 고물상에서 구했어요. 제게 저작권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걸 리마스터링 하더라도 제가 상영할 수는 없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제 나름대로 노하우로 필름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 필름들을 고물상에서 구했다는 박 대표의 말에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마는, 사실 오리지널 네거티브나 마스터 필름이 아니라 상영용 프린트 필름은 마스터 필름을 수백 벌 넘게 복사한 것 중 하나이기 때문에 소장 가치 자체는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4K 리마스터링을 제대로 하기 위한 촬영 원본인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잘 보존이 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아래는 “반칙왕” 중 한 장면의 오리지널 네거티브와 상영용 프린트 필름을 비교한 자료인데, 화질 차이를 보면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보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반칙왕"의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왼쪽)과 상영용 프린트 필름(오른쪽) (자료:영상자료원)
우리나라에서 가장 방대한 1만2천7백여 편의 영화 필름을 보유하고 있는 영상자료원의 조해원 팀장의 얘기입니다.
“1996년에 의무 납본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등급 심의를 받은 모든 영화들이 영상자료원에 필름을 제출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촬영은 4K, 6K, 8K 등 고화질로 하지만 최종적으로 극장에 걸리는 해상도가 2K이다 보니까 중간에 디지털 공정을 거친 2K DCP(Digital Cinema Pakage: 극장 상영용 파일)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디지털 공정이 도입되던 2000년대 초반에 촬영 원본 필름 유실이 굉장히 많이 발생했고요, 지금은 디지털 촬영 시대로 완전히 넘어왔어도 원본 소스 보존은 잘 안되고 있습니다.”

  박민철 대표와 함께 “태극기 휘날리며”를 4K 리마스터링해 연말에 일본에서 상영하기로 한 4K 리마스터링 기획유통사 콘텐츠존의 장지욱 대표도 말합니다. “설사 마스터 원본을 보존하더라도 심의 과정에서 잘린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할리우드는 NG컷도 보관하는데…” 
  실제로 뉴욕타임스 할리우드 담당 기자였던 알리안 하메즈는 2002년도에 출간한 “카사블랑카, 어떻게 만들었나?(The Making of Casablanca: Bogart, Bergman, and World War II)”를 쓰기 위해 이 영화의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 자료보관실에 살다시피하면서 이 곳에 보관돼 있던 "카사블랑카"의 제작 노트, 영수증, 작은 메모까지 챙겨봤다고 합니다. 우리는 NG컷은 언감생심이고, 촬영 원본도 방치해서 사라지는 실정인데 말입니다. 물론 영화의 역사와 맞먹을 정도로 유구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아카이브와 우리 현실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죠. 하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미국 시장에서까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요즘도 민간이든 관이든 촬영 원본은 물론 추후 기술 발전에 따라 활용이 가능한 수준의 마스터본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4K 리마스터링 작업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건 아무래도 원본 소스가 있느냐 없느냐겠죠. 저작권자를 찾았는데 영화 필름이 없거나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소실됐으면 많이 어렵습니다. 개봉을 했는데 흥행이 안됐어요. 그러면 내버리는 겁니다. 원본 필름을 가지고 있어봐야 돈 주고 버려야 하는 산업폐기물로 생각하는거죠. 이렇게 등한시 하다가 뒤늦게 리마스터링을 하려면 필름이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2백70여 편을 4K 리마스터링했고 앞으로도 원본 필름만 있다면 웬만큼 수준이 되는 한국 영화는 다 리마스터링하고 싶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는 장지욱 대표는 말했습니다. “아시겠지만 OTT 플랫폼에서 신작만 보여줄 수는 없거든요. 지금 전세계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리마스터링 작품이 새로운 장르가 될 수도 있고요. 조만간 프랑스의 독립 극장에서도 동아수출공사 영화인 “깊고 푸른 밤”을 비롯한 배창호 감독, 변장호 감독의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개봉을 준비 중입니다.”
 장 대표는 이어 사업가 다운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우리 리마스터링 기술도 외국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편당 단가는 한국이 아주 저렴하죠. 일본의 1/4 수준에 불과하니까요. 4K 리마스터링도 가격 경쟁력이 있습니다.” 

     올드팬들에게는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재발견을.  4K 리마스터링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지만 함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전국 3천 개 넘는 스크린 가운데 4K 상영관은 채 10%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고 싶은 4K 리마스터링 영화가 나오면 주변의 4K 상영관이 어디 있는지 한번 검색해보고 가시는 것이 그 영화를 온전히 즐기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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