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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당신이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시골소방관 심바씨 | 마음은 UN, 현실은 집 나간 가축 포획 전문 구조대원

보람 성취 성공 희망 기쁨 즐거움 행복 (사진=픽사베이)
"소방관으로 지내면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소방관인 내가 가장 흔하게 듣는 질문인데 막상 답변을 하려고 보니 고민이 되었다. 생명을 구하고 돕는 것이 내 직업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지만, 매번 보람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사건사고가 너무 많다. 사실 소방관이 되기 전에는 온갖 이벤트 업무가 쌓여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화재 현장에서 불을 끄고 돌아와서 몸에 불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PPT를 만들고 있다 보면 내가 소방관인지 소방서의 노예인지 '현타'가 온다.

소방 시험을 준비할 때는'소방관의 사명, 희생, 불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용기' 이런 것들에 피가 끓었는데 막상 소방관으로 몇 년 지내다 보니 가끔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일도 있다. 누군가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을 돕고 처리하는 일은 분명 보람차지만, 직업인으로서의 보람은 매 끼니마다 쌀밥의 참맛을 느끼고 음미하며 식사를 해야 하는 것만큼 쉽지만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저 질문은 얼마 전 대학교 후배가 보내온 메일에서 시작되었다. 대학교 방송국에서 방송을 만드는 친구들인데, 졸업한 선배들을 찾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유튜브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구조대원의 일과는 어떤가요?"
"소방관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삶의 활력소는요?"
"소방관으로서 가장 보람찬 순간은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질문이 가득한 질문지에 답을 적어가다가 '보람'이라는 단어에서 턱- 막힌 거였다. 이제는 출동 업무가 익숙해져서 작용과 반작용처럼 구조 활동을 벌여온 탓에 언제 가장 보람찼는지 긴가민가 했다. 나는 속으로 '섬진강 제방 무너졌을 때 마을 사람들 구조하던 게 제일 보람찼나? 아니지, 목숨을 구한 건 아니니까 가장 보람 차진 않았지. 꼭 목숨을 구해야 보람찬 것인가. 하수구에 빠진 앵무새 구해줬을 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긴 했는데...' 내가 겪었던 사건들을 보람찬 순서대로 줄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자 나풀나풀 먼지 바람이 이는듯한 기억이 떠올랐다.

비가 내렸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어느 똥꼬발랄한 개 한 마리가 우리 앞을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기...신고자 되시나요?"

축사 옆집 문틈 사이로 얼굴을 반쯤 내민 아주머니께 말을 걸었다.

"예. 제가 신고했어요."

"혹시 본인 소유의 개인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주인이 따로 있긴 한데 밥만 한 번씩 주고 신경을 안 쓰길래 하도 딱해서 신고를 했어요."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경계하는듯하더니 어느새 문밖으로 나와 뒷짐까지 지시고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말은 소 한 마리 없는 축사에 개만 묶어놓고 주인이 가끔 와서 밥을 주고 가는데, 새끼 때 목줄을 해놓고 한 번도 목줄을 늘려주지 않았단다. 목줄은 개 목을 파고 들어서 피부가 썩어 냄새가 옆집까지 난다고 했다. 그건 둘째 치고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고 119에 신고를 했다고 하셨다. 대문 너머로 털에 윤기가 번들번들한 이쁨깨나 받고 자란 것 같은 개가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축사로 와서 개를 포획망으로 잡고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목줄이 살을 파고든 정도가 아니라 목줄을 감싼 채로 피부가 아물어서 목줄은 개 신체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그런 상황에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목줄과 피부의 마찰로 상처는 다시 생기고 아물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숨소리에 쇳소리까지 섞여서 나오는 게 호흡에도 지장이 있는 듯했다. 개를 잡는 과정에서 상처는 더 심해져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 반장. 공구 상자 가져와봐."

이때부터 미드 '그레이스 아나토미' 뺨치는 구조팀장님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칼."

팀장님을 호령과 함께 구조대원들이 온갖 날카로운 것들을 찾아 손바닥 위로 올렸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우린 암묵적인 합의로 각자의 포지션이 정해졌고 강남 한복판에 있는 스타벅스 직원처럼 주문과 서비스가 일사불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니퍼! (잠시 뒤) 아니야. 이건 너무 커. 더 작은 거 없나?"

제일 작은 니퍼였는데, 더 작은 니퍼를 원하신다고? 갑자기 마음이 분주했다. 뛰어가서 가져와야 하나? 근데 어디로 뛰어가야 되는 거지? 잠시 서비스 오류에 다들 눈빛만 교환하고 있는 사이 개 목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압박 붕대로 출혈 부위를 막고 수술이 난항을 겪는 듯했지만 팀장님은 침착하게 주어진 도구들로 다시 목줄을 제거해 나갔다. 새카맣게 피떡이 된 목줄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괴로웠다. 피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목줄을 칼로 째가며 뜯어내는데 개를 이 모양이 되도록 방치한 개 주인이 한편으로 원망스럽기도 했다.

"됐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이리저리 몸을 기울여가며 수술을 진행하던 팀장님 입에서 안도감 섞인 혼잣말이 들렸다. 팀장님은 눅눅하고 새카만 목줄을 뒤쪽 쓰레기 더미로 획 던지며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일어났다. 아까는 무지개 다리를 건널 것만 같았는데 옆으로 쓰러져있는 녀석을 다시 보니 눈동자에 비친 하늘로 오색 무지개가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 주인이 있는 개는 저희가 동물병원으로 데려가진 못해요. 혹시 주인이 밥 주러 오거든 병원에 한번 데려가시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하곤 몸을 돌려 개한테도 인사를 고했다.

"마! 형들 간다 잘 지내라."

배를 툭툭 치고 뒤돌아 가려는데 개가 꼬리를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전자레인지로 해동시킨 인절미처럼 바닥에 축 늘어진 놈이 꼬리만 살아서 우리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마취에 덜 풀려서 몸도 못 가누는 녀석이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 그때 별별 일 다하는 소방관으로서 큰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보람 성취 성공 희망 기쁨 즐거움 행복 (사진=픽사베이)

굳이 소방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법에 저촉될 수도 있고 본인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을 누가 선 듯 나서서 할까. 무엇보다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 오지랖 휘날리며 개목줄 끊어줄 정신이나 있을까 말이다. 그 시간에 영어단어를 하나 더 외우지. 우린 그런 면에서 참 보람 있는 직업인이 아닌가 생각했다. 마음껏 도와주어도 괜한 참견이란 말 들을 일 없고, 앞으로 1년, 2년 그보다 더 오래 이 시골 개가 나한테 꼬리 흔들어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니 보람이라는 게 내 주변에 흔하게 쌓여서 쉽게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떤 일이든 하다 보면 일이 내게 주는 만족감이나 일의 가치를 느끼게 할 만한 기억들이 쌓이는 게 당연할 텐데, 일에서 오는 피로함과 압박감이 더 커서 흔하게 널린 보람보다는 뜨끈한 온열매트 생각이 더 간절했다. 누군가 강요하지 않아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강한 끌림. 며칠 내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보니 내가 다시 방화복을 입어야 할 기억들이 솟아났다.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지만 보람된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묻고 싶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인-잇 #인잇 #시골소방관심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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