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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중국은 시위대도 시진핑도 같은 노래를 부른다

상하이 현수막 시위에서 왜 '인터내셔널'을 불렀을까?

정영태 취재파일

지난 23일 저녁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소규모 시위 모습입니다. 젊은이 2명이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다른 젊은이 몇 명도 그 뒤를 따르는 모습입니다. 이들이 든 현수막에는 '원치 않는다(不要), 원한다(要)'는 글씨만 적혀 있습니다. 무엇을 원치 않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국인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최근 중국 관련 뉴스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지난 13일 베이징에서 벌어졌던 반 시진핑 현수막 시위를 모방-동조하면서 지지 의사를 나타낸 행동임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베이징 현수막 시위에는 '코로나 검사 말고 밥을 원한다',  '봉쇄 말고 자유를, 거짓 말고 진실을,  문화혁명 말고 개혁을, 영수 말고 선거권을, 노예 말고 공민을 원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같이 내걸린 다른 현수막에는 '나라의 도둑, 독재자 시진핑을 파면하라'는 문구까지 있었습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따라서 이런 베이징 현수막을 모방 또는 지지한다는 것은 단지 중국의 코로나 방역 정책을 비판한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의 공산당 1당 지배와 시진핑 장기집권까지 모두 반대한다는 뜻으로 현재 국가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반체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상하이 현수막 시위는, 베이징 현수막 내용에서 각각의 주요 단어를 빼고 '원한다, 원하지 않는다'는 표현만 적어 넣었습니다. 똑같은 표현을 그대로 쓸 경우, 강한 처벌을 받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택한 걸로 보입니다.
 

"일어나라 고통받는 자들이여"... 시위 참가자가 부른 노래 '인터내셔널'

상하이 시위에서 또 한 가지 눈길을 끈 것은 시위 참가 젊은이들이 부른 노래 '인터내셔널'입니다. 중국에서는 국제가(国际歌)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시위 동영상을 보면, 젊은 여성들로 보이는 이들은 현수막을 들고 상하이의 밤거리를 걸어가며 함께 이 노래를 부릅니다. 상하이는 외국인 비율도 많은 곳이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 국적 공민인지 외국 국적인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 노래를 중국어 가사로 부르고 있다는 것만은 확인됩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곳에서는 다소 생소한 노래지만, 중국에서는 곡조와 후렴구만 잠깐 들어도 바로 이 노래가 '인터내셔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조직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상징하는 노래로 150년 역사를 갖고 있고, 중국 공산당의 주요 행사때마다 연주돼 온 곡이기 때문입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시진핑 주석도 부른 노래…중국 공산당의 99년 된 전통

이 노래는 원래 180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국제공산주의 조직 '인터내셔널'의 상징이 됐고 소련의 성립 초기 국가로도 사용됐습니다. 중국에서는 1923년 중국 공산당 제3차 당 대회가 끝난 날 대표자들이 함께 부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지난 22일 열린 20차 당 대회 폐막식도 어김없이 군악대의 '인터내셔널' 연주와 함께 마무리됐습니다. 당 대회 폐막식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99년 된 전통인 셈입니다. 이 노래가 연주될 때는 당 총서기를 비롯한 지도부는 물론, 모든 참석자들이 기립하는 것이 관례로, 연주가 끝나고 나자 시진핑 주석이 폐막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지난해 7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도 '인터내셔널'이 연주됐습니다. 천안문 위에 선 시진핑 국가 주석과 후진타오 전 주석이 같이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중국의 공식 국가는 '의용군행진곡'입니다. 올림픽 같은 국제 스포츠 행사에서 연주되는 노래입니다. 20차 당 대회 같은 중국 공산당의 공식 행사에는 주로 개회식 때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제창하는데 폐막 때는 '인터내셔널'이 연주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익숙하고 안전한 노래…하지만 체제전복과 선동의 가사

중국 공산당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래를, 왜 상하이 현수막 시위 참가자들이 불렀는지 그 이유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누구나 아는 익숙한 노래이면서도 안전한 노래라는 점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주요 행사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는 건 99년 된 전통입니다. 많은 중국사람들에 귀에 익은 노래고 따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처벌하거나 규제할 명분이 약합니다. 마치 과거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시위대가 국가인 '애국가'를 불렀던 것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국가와 다른 점은 '인터내셔널'의 가사에 있습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시위 참가자들이 이 노래를 부른 이유로 추정되는 두 번째 이유도 가사 때문입니다. '인터내셔널'에는 매우 강한 체제 전복과 선동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래 프랑스어 가사를 각국에서 번역하다 보니 조금씩 다른 부분은 있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하다고 합니다. 중국어 가사는 "일어나라,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받는 노예들이여!(起来,饥寒交迫的奴隶!)"로 시작합니다. 이후 사회주의 혁명을 고취하는 가사가 이어집니다.
 
"고통받는 자들이여 진리를 위해 투쟁할 때가 되었다. 구세계는 낙화유수처럼 부서질 것이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말지니, 우리가 반드시 천하의 주인이 되리라"
"구세주는 없고 신이나 황제에 기대선 안 된다. 행복을 위해선 자신을 의지해야 한다"

150년 전 사회주의 혁명과 구체제 전복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가사 내용이 이런 것은 당연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 체제로 자리 잡은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면 어떻게 들릴지는 자명합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 행사에서도 인터내셔널이 연주되는데, 만약 반체제 시위대가 이 노래를 부른다면 3부자 세습체제를 뒤엎자는 뜻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천안문 사태 때도 불렸던 노래…의용군행진곡도 시위 현장에서 불려

실제 중국에서는 대규모 시위 현장에서 이 노래가 불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1989년 천안문 사태 때입니다. 정치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한 시위대가 이 노래를 부르며 연대를 호소했고,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해산할 때도 이 노래를 부른 사실이 당시 외신 보도에 남아 있습니다.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 가사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과거 항일 투쟁을 상징하는 노래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여!"로 시작하는 앞부분이 '인터내셔널'의 도입부 가사와 비슷합니다. "억압받는 한 사람마다 마지막 함성이 터져나오리!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 전진!" 같은 가사로 이뤄져 있습니다.
정영태 취재파일
최근 제로 코로나 방역 정책 때문에 장기간 거주지역에 봉쇄된 주민들이, 부당한 정책에 집단 항의하려고 모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때 모인 주민들이 함께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부르는 모습도 여러 차례 보였습니다. 누구나 아는 노래면서도 문제 삼기 어렵고, 가사에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상하이 시위 참가자가 '인터내셔널'을 불렀던 이유와 같을 겁니다.

오래 전 사회주의 혁명과 체제 전복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정작 그 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에게는 현 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노래로 불리고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사진출처 :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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