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음 뒤 매캐한 연기" 영화 같았던 한밤 활주로 비상 탈출

지난 23일(현지시간) 밤 필리핀 공항에서 활주로를 이탈한 대한항공 여객기 승객들은 재난영화를 방불케 하는 급박한 상황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23일 오후 6시 35분쯤 출발한 대한항공 A330-300 여객기(KE631)는 기상악화로 세부 막탄공항에 비정상 착륙한 뒤 오후 11시 7분쯤 활주로를 이탈(오버런·over-run)했습니다.

승객 162명과 승무원 11명은 슬라이드를 타고 여객기에서 탈출했습니다.

현재까지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사고 항공기에 탔던 대학원생 김 모 씨(31)는 오늘 오전 "비행기가 조금만 더 미끄러졌어도 활주로 너머 민가를 덮칠 뻔했다"며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임신 중인 김 씨는 남편과 함께 세부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김 씨는 '비상 착륙할 예정이니 승무원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라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승객들이 비명을 지르고 흐느끼는 등 기내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됐다고 전했습니다.

승무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으라고 안내했습니다.

비행기가 생각보다 부드럽게 착지하는 듯하자 승객들은 박수를 치며 안도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기체가 돌연 굉음을 내며 지면에 강하게 부딪쳤습니다.

김 씨는 "5초 이상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 다음 비행기 전체가 정전되고 매캐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떠올렸습니다.

승무원들은 기내에 불이 붙은 곳이나 다친 사람이 있는지 살피며 공포에 빠진 승객들을 진정시켰다고 합니다.

이어 이코노미석 비상탈출구를 열어 미끄럼틀을 편 뒤 승객들을 차례로 탈출시켰습니다.

김 씨는 "비행기에서 안내방송으로만 듣던 미끄럼틀을 직접 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무사히 기체를 빠져나온 승객들은 혹시 모를 폭파 위험 때문에 비행기에서 먼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들은 공항에서 대기하다 새벽이 돼서야 숙소에 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김 씨는 "사고 직후 구글맵을 켜보니 비행기가 공항 끄트머리까지 가있었고, 활주로에 빗물이 가득했다"며 "그야말로 재난영화 같았다"고 전했습니다.

김 씨는 "기장과 부기장, 크루 분들이 마지막까지 승객 안전을 위해 뛰어다니셔서 무사할 수 있었다"며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대한항공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한편 해당 여객기를 타고 귀국할 예정이었던 승객들을 태우기 위해 대체 항공편을 보낼 예정입니다.

현재 세부 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올 예정이던 대한항공·제주항공·한에어 등의 항공편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사진=필리핀 민항국 제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