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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북한 · 소련, 6·25 때 중국군 철수 의심했다"

오는 19일은 중국이 6·25 전쟁에 참전한 지 72주년 되는 날입니다. 1950년 10월 19일 '인민지원군'이라 칭한 중국군 26만 명이 처음으로 압록강을 넘었고, 이후에도 중국군의 수는 계속 증원됐습니다. 중국 측 발표에 따르면,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총규모는 290만 명. 중국은 10월 19일이 아닌 10월 25일을 참전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이날은 중국군이 한국군과 첫 전투를 벌인 날입니다.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는 중국군

중국은 당시 참전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중국이 인민해방군이라는 정식 군대 명칭 대신에, 인민들이 스스로 자원해서 나선 군대라는 뜻의 '인민지원(志愿)군'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중국말로 '지원자(志愿者)'는 자원봉사자를 말합니다. 중국군이 정식 개입한 게 아니라는 취지입니다. 나아가 중국 주석 마오쩌둥은 '미군과는 싸움을 피하고 한국군을 먼저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10월 25일 첫 전투가 벌어진 이후 전과(戰果) 발표도 중국군이 아닌 북한군이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인민지원'군'이란 표현도 꺼림칙했던지, 인민지원'부대'라고 호칭하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11월 초까지만 해도 중국군의 참전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11월 4일 본국에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펑더화이 친필 공개…"북한, 중국이 철수할까 봐 늘 의심"


이러한 중국의 비밀주의는 북한과 소련의 의심을 불러왔습니다. 중국군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언제라도 한반도에서 조기 철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도 나왔습니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김동길 교수가 이끄는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는 6·25 전쟁 때 중국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팽덕회)의 친필 원고를 입수해 처음 공개했습니다. 이 문서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2월 펑더화이가 전쟁을 회고하며 작성한 것으로, "조선(북한) 동지들은 우리가 싸우다 철수할까 봐 늘 의심을 품고 있었다"고 돼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사진 왼쪽)와 북한 김일성. 펑더화이는 "북한 동지들이 우리가 철수할까봐 늘 의심했다"고 회고했다.

소련 역시 중국의 조기 철수를 우려했다는 게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의 판단입니다. 중국에 대한 소련의 의심과 우려는 소련의 6·25 전쟁 조기 참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소련, "파병에 적어도 두 달 소요" → 조기 참전 선회


1950년 10일 11일. 중국의 6·25 참전 결정을 앞두고 소련 서기장 스탈린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가 회동했습니다. 회동에서 중국은 소련에 공군 엄호를 요청했지만, 소련은 "파병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달은 걸린다"며 사실상 중국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소련 역시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1950년 10월 11일 소련은 "공군 파병에 적어도 두 달은 걸린다"며 중국의 공군 엄호 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이 참전한 지 13일 만인 11월 1일 전투기를 전격 출격시킨 데 이어, 다시 닷새 뒤인 11월 6일에는 소련 공군의 작전 범위를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에서 북한 전역으로 확대했습니다. 소련 전투기는 이날 미군 전투기와도 첫 공중전을 벌였습니다. 6·25 참전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던 소련이 갑자기 조기 참전으로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소련 내부 문건. 중국군이 6·25 전쟁에 참전한 지 18일 만인 1950년 11월 6일, 소련은 공군의 작전 범위를 북한 전역으로 확대했다.

소련 참전으로 '중국 참전' 공개…"중국 발목 잡으려 참전"


지금까지는 중국의 자발적인 참전에 화답하기 위해 소련이 조기 참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소련이 동시 참전이나 공군 엄호를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중국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자, 스탈린이 감격해서 중국과 북한을 돕기 위해 전투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구진의 연구 결과는 달랐습니다. 소련이 중국을 돕기보다는 중국의 참전을 미국 등 서방에 공개해 중국이 전쟁에서 발을 빼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고 연구진은 판단했습니다.

당시 소련 전투기들은 소련에서 출격한 게 아닙니다. 중국 선양으로 이동한 뒤 북한 접경 지역인 중국 단둥을 거쳐 출격했습니다. 자국 표식을 달지 않고, 북한군 표식을 달고 이륙했습니다. 일종의 위장 전술입니다. 미국이 중국 전투기로 오인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강력한 공군이 출현하자 외국군의 개입을 확신했고, 곧이어 의심 수준이던 중국군의 참전을 공식화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소련 전투기들은 중국 선양과 단둥을 거쳐 출격했다.

맥아더는 소련 전투기와 공중전을 치른 당일인 11월 6일 이른바 '동경 성명'을 통해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을 처음 인정했으며, 이틀 뒤인 11월 8일 중국도 인민일보를 통해 참전 사실을 처음 공개했습니다. 중국군의 참전 사실이 미국에 공개된 이상 중국도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의 참전으로 중국의 참전 사실이 의도치 않게 공개되고 만 셈입니다.

맥아더는 1950년 11월 6일 '동경 성명'을 통해 중국군의 참전을 처음 인정했으며(왼쪽), 중국 인민일보는 이틀 뒤인 11월 8일 중국군의 참전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소련, 중국군 공개 이후 다시 소극적…"한반도에 미국 묶어 두려"


중국군의 참전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후 소련은 다시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당시 중국 문건에는 "왜 소련 조종사들이 보이지 않느냐"는 중국군의 원망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이 역시 소련의 참전 목적이 중국을 도우려는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연구진을 설명했습니다. 중국의 참전 사실을 공개해 6·25 전쟁을 미국과 중국의 전쟁으로 몰아가고 소련은 뒤로 한발 물러서려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소련은 중국을 이용해 미국을 아시아에, 한반도에 묶어 두고 자신은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고 연구진은 봤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는 6·25 전쟁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사료를 다수 발굴했다.

결국 소련의 뜻대로 된 셈입니다. 중국은 1953년 정전 때까지 전력을 다해 미국과 싸웠고, 그 기간 소련의 참전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6·25 참전 사실이 밝혀진 것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였습니다. 이번 연구는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으며, 이번 연구 결과는 조만간 한국과 미국 등 유수 학술지에 논문으로 제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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