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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양조위'인가 '량차오웨이'인가

576돌 한글날에 생각하는 외국인 인명 표기

[취재파일] '양조위'인가 '량차오웨이'인가
최근 부산국제영화제를 취재한 적잖은 기자들이 머리가 아팠을 겁니다. 영화제 기간 부산을 찾은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의 이름 표기 때문입니다.

이 배우가 모습을 드러낸 지난 6일, 매체별 기사 양상이 재미있습니다. 인터넷 매체의 경우 "양조위"라고 쓴 곳이 대다수입니다. 전문 교열기자가 있는 전통의 신문들은 "량차오웨이"라고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인터넷판 제목엔 "양조위"로 쓴 게 눈에 띕니다. 사진만 있는 기사 제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 노출이 잘 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중에게 "양조위"라는 표기가 더 친숙할 거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이날 SBS 8뉴스는 앵커 멘트와 리포트 첫 문장에서 "량차오웨이"를 한 번 읊고 이후 "양조위"라고 이어 나가는 '절충'을 택했습니다. 화면에 표출하는 자막과 인터넷판 본문 원고엔 "량차오웨이(양조위)"라고 병기 했습니다. 취재기자의 고민이 읽히는 부분입니다.

량차오웨이와 양조위, 뭐가 맞을까요? '정답'은 량차오웨이입니다. 1986년에 개정돼 이어 오는 문화체육관광부 고시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중국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어 표기법 원칙은 '현지 원음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고 중국의 현대는 보통 1911년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삼으니, '현대인'인 양조위는 "량차오웨이"라고 써야 맞는 겁니다.

무슨 처벌 규정이 있는 것까진 아니지만 정부가 제정하고 공동체가 약속해 따르고 있는 어문 규범은 지키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방송법상 표준말 보급과 언어순화를 해야 하는 SBS가 량차오웨이를 앞세우고 양조위를 병기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량차오웨이라고 하면 화양연화의 그 아슬아슬한 사랑을 연기한 배우가 아닌 것 같다는 데 있습니다. 주윤발이 아닌 "저우룬파"가 입은 바바리 코트는 왠지 멋이 없고, 성룡 아닌 "청룽"의 액션은 어딘지 낯선 느낌입니다. "류더화"(유덕화)는 우리가 열광하던 4대 천왕이 아닌 것만 같고 "장궈룽"(장국영)의 패왕별희라면 비극의 농도가 달리 와닿습니다. 많은 기자가 부산에 온 저 깊은 눈빛을 가진 배우를 기어이 '양조위'라고 쓴 게 이런 이유 때문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우룬파(주윤발)와 청룽(성룡)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사실 중국어 외래어 표기는 저항과 반발이 계속돼 온 해묵은 논제입니다. 2000년 넘게 이어온 우리 고유의 한자 표음 방식을 못 쓰게 한 탓이 큽니다. 규범과 원칙에는 '일관성'이 중요한데,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 인명과 지명 표기엔 근/현대를 나누지 않으면서 유독 중국어에만 모호한 '현대' 기준을 둔 점도 언중을 혼란하게 합니다. 1881년에 태어나 1936년에 죽은 노신(魯迅)은 "루쉰"이라 쓰고, 1873년에 태어나 1929년에 떠난 량치차오는 "양계초(梁啓超)"라고 쓰는 모순적 글쓰기가 도처에 가득합니다. 현지 발음에 가까워야 한다면서도 '파열음일 땐 된소리 표기를 말라' 해, 덩샤오핑(떵샤오핑)처럼 오히려 현지 발음과 다른 표기가 이뤄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와 달리 많은 나라는 외래어 표기에서 자국민의 언어습관을 존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규범은 외국인이 아니라 자국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조위-량차오웨이 혼란은 우리 국민의 언어습관과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맞지 않아 빚어진 일로 볼 수 있습니다. 량차오웨이가 다 무엇이냐, 그냥 양조위로 쓰자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다 보면 자장면에 밀려 있던 짜장면이 시민권을 얻었듯 외래어 표기법이 바뀌는 날도 올까요? 한 세대가 다 되도록 언중이 외면한 규범이라면 분명 만든 쪽에서 점검해야 마땅합니다.

불만을 늘어놨지만, 말과 글을 다루는 직업인으로선 그래도 규범은 규범이란 생각입니다. 아쉬운 면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을 정한 목적이 소통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오렌지"라고 하고 누구는 "어뤤지"라고 쓰면 소통은 되지 않겠지요. 량차오웨이와 양조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 쉽게 보고 익혀 쓸 수 있는 규범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호금도와 습근평은 몰라도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아는 것을 보면 규범이란 역시 꾸준히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방송과 신문의 역할이 큽니다.

마침 오늘은 576돌 맞은 한글날입니다. 세종은 백성들이 서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뜻을 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이 거룩한 소통의 문자를 계속 가꿔 나가는 건 오늘을 사는 우리 몫일 테지요. 한글로 외래어·외국어를 표기하는 더 나은 방법을 다 함께 고민해 볼 만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홍콩 출신 량차오웨이는 그의 고향 발음(광둥어)에 가깝게, 그리고 스스로 영문 표기(Tony Chiu-Wai Leung)에 쓰듯, '렁치우와이'로 적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이름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담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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