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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백두산에서는 "남북 간 새로운 역사", 그 다음날엔 "문재인 관심 불필요"

최근 공개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친서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2018년 9월 21일 보낸 친서입니다. 당시 친서에서 김정은은 "저는 향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 각하와 직접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길 희망하며, 지금 문 대통령이 우리의 문제에 대해 표출하고 있는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북미 간의 협상에서 문 대통령은 빠졌으면 좋겠다는 김정은의 속내를 표현한 것인데, 다소 충격적인 것은 친서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친서를 보낸 날짜입니다.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친서를 보낸 2018년 9월 21일은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을 방문했고, 9월 19일 남북 정상 간 합의인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평양공동선언'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남과 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고 문 대통령과 합의했습니다.

백두산 정산 손 맞잡은 남북 두 정상

남북 정상은 다음날인 9월 20일 백두산을 함께 방문해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정은은 "이 천지 물에 붓을 담가서 앞으로 북남 간의 새로운 역사를 우리가 계속 써 나가야겠습니다"라며 남북 협력 의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21일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에서 '문 대통령은 빠졌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밝힌 것입니다.
 

남한을 필요에 따라 이용


결과적으로 보면, 김정은이 문 대통령을 만나 남북 간 협력 의지를 밝힌 것은 눈속임에 불과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김정은에게 필요했던 것은 미국과의 협상이었고, 남한은 그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2018년의 국면을 되돌아보면 북한이 남한을 활용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8년 5월 24일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발표하자 김정은은 다음날 문 대통령에게 급히 만나자는 SOS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남북 정상은 하루 뒤인 26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전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남북 정상이 이렇게 하루 만에 급박하게 만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 취소 선언에 김정은이 다급했다는 얘기인데, 문 대통령이 김정은의 요청을 받아 중재에 나섬으로써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예정대로 진행됐습니다.

2018년 초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과정도 돌이켜보면 북한이 남북관계를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 ICBM 발사 장면 (사진=평양 조선중앙통신 제공, 연합뉴스)

2017년 연이은 ICBM 발사 시험으로 고립에 빠진 북한은 중국과도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중국은 2017년 대폭 강화된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했고, 김정은은 북한을 방문한 시진핑의 특사를 아예 만나지 않기도 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은 중국 고위급 인사들과 북한 급변사태 대응방안에 대한 논의를 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2018년 들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진전되고, 중국이 우리 정부의 대북 특사단을 통해 북한 소식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중국이 급해졌습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남북미 정상회담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동북아 구도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묘한 시점에 김정은은 중국을 방문하겠다는 요청을 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시점이었고 북중 정상회담은 전격적으로 성사됐습니다. 북한으로서는 그동안 소원했던 북중 관계를 일거에 되돌린 것입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남한 미국을 거쳐 중국에 접근해가는 과정은 능란함이 발휘된 북한 외교의 승리라고 평가할 만했습니다. 남한이라는 카드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북한이 원하는 외교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취재파일] 북한 외교의 승리…미 · 중 경쟁 속 운신 폭 넓힌 북한
 

남북 정상 간 신뢰는 있었나


2018년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많은 합의들이 나왔지만,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에 진정한 신뢰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문 대통령 임기 말까지 계속된 친서 교환을 두 정상 간의 신뢰의 증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번에 드러난 친서에서 보듯 김정은의 속내는 겉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철저하게 국익 위주로 움직이는 국제관계에서 지도자 간의 신뢰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지도 모릅니다. 지도자 간 신뢰가 있다고 해서 국가지도자가 자국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김정은은 애초부터 북한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문 대통령을 활용했는지도 모릅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문재인 대통령-김정은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2018년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엄청난 환대를 받았습니다. 김정은은 공항에서부터 문 대통령을 영접했고 평양 시내 카퍼레이드는 물론, 5.1 경기장에서 15만 평양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설할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또, 회담 마지막 날에는 남북의 정상이 백두산에 함께 오르는 역사적인 장면도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다음날 '문 대통령은 빠졌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낼 김정은은 무슨 생각에서 이런 환대를 한 것이었을까요. 아마도 평양에서의 환대는 그 해 5월 북미정상회담 결렬 위기에서 SOS에 응해준 문 대통령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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