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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국정과제' 특별전의 무게, 그리고 빛바랜 '공정'

8월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춘추관에서 개막한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에서 개막식 참석자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 청와대 춘추관에서 개막한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

윤석열 정부의 대표적인 키워드는 바로 '공정'입니다. 지난 7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첫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도 강조된 건, 공정이었습니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당시 "윤석열 정부가 누구나 공정하고 차별 없이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장애인, 어르신 등의 문화 접근 기회를 확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문화의 공정한 접근 기회 보장'은 문체부 핵심 5대 과제 중 하나로 선정됐고, 시민에게 개방된 청와대는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상징적인 공간이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게 바로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19일까지 20일 동안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렸던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 전시회였습니다. 청와대가 개방된 뒤 처음으로 열렸던 전시회이기도 했습니다.

이 특별전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장예총)가 주최하고 문체부가 후원한 행사였습니다. 윤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에 걸어둔 작품으로 잘 알려진 발달장애 작가인 김현우(픽셀 작가) 씨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정은혜 씨의 작품 등을 포함해 50명의 작가, 60점의 작품이 출품됐습니다. 문체부에 따르면 전시회 기간 동안 7만여 명의 시민들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시민에게 개방된 청와대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전시회에 장애예술인들의 작품이 소개됐다는 건 그만큼 정부의 정책 의지가 강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윤 대통령도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2일 최소한의 경호 인력만 대동한 채 예정에 없던 '깜짝 방문'을 하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9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를 찾아 작품들을 관람하고 있다.

문체부는 특별전 종료 시점에 맞춰 보도자료를 내고 "청와대 춘추관 첫 번째 특별전이 장애와 비장애 예술의 경계를 없앴다"며 "국민 품으로 돌아온 청와대를 체감하는 첫 번째 행사로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소외됐던 장애예술인의 예술 활동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높이고, 장애예술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관람객들의 소감과 유명 인사들의 방문 등을 일일이 소개하며 "시민들의 관심이 직접적인 작품 구매로 이어져 전시된 작품 60점 중 25점이 판매됐다"고 알렸습니다. 행사를 주최한 장예총 대표의 소감을 빌려 "전시된 작품 중 절반 가까운 작품이 판매되는 역대급 성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SBS 취재 결과 판매된 25점의 작품 중 8점은 문체부 산하 기관들의 몫이었습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3점 700만 원, 한국관광공사 2점 530만 원, 한국콘텐츠진흥원 1점 100만 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1점 100만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위원장 개인 구매로 1점 200만 원, 이렇게 5개 기관이 8점의 작품을 구매하기로 한 겁니다. 해당 기관들은 주최 측과 직접 계약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며, 각 기관의 예산을 활용해 작품 구매 계획을 세워둔 상황입니다. SBS는 불필요한 오해나 혹시 모를 불이익이 있을 것을 우려해 해당 작품의 작가 이름과 작품명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난 23일 SBS8뉴스에서도 관련 소식을 다루면서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앞서 문체부는 이번 청와대 춘추관 특별전 개막을 14일 앞둔 지난달 17일, 문체부 산하 53곳 기관에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SBS가 입수한 공문은 '장애예술인 창작품 우선 구매 협조 요청'이라는 제목으로, '공정하고 사각지대 없는 예술인 지원체계 확립'이라는 국정과제와 '장애인 작가 등의 작품 우선 구매'라는 대통령 지시사항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체부 소속 기관 및 공공·유관기관을 대상으로 "장애예술인 창작품을 우선 구매하는 데 협조해달라"며 분기별 우선 구매 실적과 계획도 제출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문체부 관계자는 최근 5년간 해당 기관들에 이런 내용의 공문을 보낸 적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이런 협조 요청 공문은 처음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작품 구매에 나선 5개 기관은 최근 5년간 장애예술인 작품을 포함해 예술품을 구매한 적이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청와대 춘추관 특별전 작품 구매가 처음이라는 건데, 이들 기관은 문체부의 '공문'을 받고 장애예술인 지원이라는 좋은 취지에 동참하기 위해 구매를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작품 구매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한 기관도 있습니다. 문체부 소속 정부기관인 국립장애인도서관입니다. 원종필 국립장애인도서관장은 취소 결정을 내린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예산이라는 것이 각 항목별로 정확하게 정해져 있고, 활용할 수 있는 예산 범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미술품 구매 목적으로) 가용해서 쓸 수 있는 예산이 없습니다. 단돈 10만 원을 주든 1만 원을 쓰더라도 회계 규정에 맞게 쓸 수밖에 없어서요"
- 원종필 국립장애인도서관장


국립장애인도서관이 검토 끝에 구매 계획을 취소한 근거가 된 조항은 '물품관리법 시행령' 제52조 4항입니다. 이에 따르면 정부기관은 50만 원이 넘는 미술품의 경우 자체적으로 취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 해도 정부기관인 국립장애인도서관인 경우 미술품을 직접 구매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해당 조항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품관리법 시행령>
제52조(정부미술품 및 정부미화물품의 관리) 
④ 각 중앙관서의 장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부미술품 및 정부미화물품을 제3항에 따라 지정된 전문기관으로부터 대부받아 사용하여야 한다.
1. 취득가격이 50만 원 미만인 경우
2.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 제5조제2항에 따라 접수하는 경우
3.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에 따라 설치하는 경우
4. 자체 제작하는 경우

그렇다면 작품 구매에 나선 기관들은 어떤 근거로 작품을 구매하기로 한 걸까요? 작품 구매에 나선 기관들은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입니다. 국립장애인도서관처럼 정부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물품관리법 시행령의 적용 대상이 아니고, 다른 법률이나 시행령에도 공공기관의 미술품 취득과 관련한 내용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관련 법률이 없기 때문에 공공기관의 미술품 구매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공공기관은 고가의 미술품을 제한 없이 구매해도 되는 걸까요? 답은 정부 예산 집행 지침에 있습니다.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2022년 공기업·준정부기관 예산 운용 지침'에 따르면 공공기관의 경우 별도의 규정이 없다면 정부 예산 지침을 따르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022년 공기업·준정부기관 예산 운용 지침 - 기획재정부>
본 지침에 별도의 규정이 없는 경우 「2022년도 예산안 편성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 지침(작성 세부지침을 포함한다)」,「2022년도 예산 및 기금 운용계획 집행지침」의 관련 규정을 준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경비의 주체, 지급대상, 사용 용도 등 성격상 준용하기가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는 주무기관의 장 및 기획재정부장관과 협의하여 준용하지 아니할 수 있다.

해당 기관들이 구매에 나선 작품은 모두 50만 원을 넘습니다. 물품관리법 시행령 적용 대상이 아니더라도 정부 예산 운용 지침 위반 소지가 있는 겁니다.

문체부는 이런 내용의 SBS 취재에 대해 "장애예술인 지원이라는 국정과제의 좋은 취지에 동참해 달라는 협조 요청이었을 뿐, 의무적으로 구매하라는 뜻은 아니었다"며 "공공기관의 경우 미술품 취득과 관련한 별도 규정이 없는 만큼 자체적으로 구매에 나서는 건 문제 될 게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장애예술인 지원법 개정안'에 따라 협조를 구한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해당 개정안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제9조의2(장애예술인의 창작물 우선구매)
①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른 공공기관(이하 이 조에서 “공공기관”이라 한다)은 장애예술인이 생산한 창작물의 우선 구매에 필요한 조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②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제1항에 따라 우선구매를 하는 기관 등에 예산의 범위에서 재정지원을 하는 등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③ 제1항에 따른 공공기관의 범위 및 창작물의 종류 등 우선구매를 위한 조치 마련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이에 따르면 앞으로 정부기관과 지자체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역시 장애예술인의 창작품을 구매할 수 있고, '우선적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개정안은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법이라는 데 있습니다.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된 뒤 공포 절차를 거쳐야 하고, 공포된 뒤 6개월이 지나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습니다. 국무회의 일정 등을 고려하면 시행되는 시점은 빠르면 내년 3월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직은 없는 법인 겁니다. 

문체부는 SBS 보도 다음 날 언론 등에 배포한 보도 설명 자료에서도 이 개정안을 언급했습니다. 국회에서 개정안이 긍정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애예술인 미술품 우선 구매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고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하 기관들에 이를 알리고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공문을 보낸 것이지, "강매의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단지 장애예술인 특별전과 장애인 예술 활성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재차 해명했습니다.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개정안을 먼저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취지인데,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셈입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장애예술인의 작품을 구입하는 일, 그리고 장애예술인을 지원하고 적극 육성하는 정책, 분명히 장려해야 할 일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절차와 규정 위반의 소지가 있다면 그 취지는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 사안은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자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이며, 문체부의 핵심 과제이기도 합니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지난 1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 발달장애 아티스트 특별초대전'을 찾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1월 8일, 대선 후보 시절, 발달장애 특별전시회 관람한 윤석열 대통령
"오늘 작품을 관람하는 가운데 가족이나 관계자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작품활동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좀 전시를 통해서 세상과 남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좀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평소에 여러 차례 들은 얘기입니다마는 정말 저희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을 알리고 하는 그런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참 많이 갖도록 하는 것이 그 역시도 공정의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이분들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시혜적인 것이 아니고 이분들이 갖고 있는 행복추구권에서 출발하는 그런 권리입니다. 우리가 이 권리를 잘 지켜드려야겠다 하는 그 점을 많은 분들이 함께 공감했으면 좋겠습니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 지난 1월 8일)

과정이나 절차, 규정, 일일이 다 지키는 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정'이라는 가치는 그 모든 것들이 올바르게 전제되어야 지켜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지시 사항이 그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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