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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중국 '역사 왜곡' 연표 철거, 리잔수 방한 의식했나

[월드리포트] 중국 '역사 왜곡' 연표 철거, 리잔수 방한 의식했나
잠시 뜸하다 싶었던 중국의 동북공정 망령이 되살아났습니다. 동북공정은 지난 2002년부터 진행된 중국의 역사 왜곡 프로젝트로, 중국이 동북 지역의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발단은 중국 국가박물관이 기획한 '동방의 상서로운 금속-한·중·일 고대 청동기전'입니다. 한·중 수교 30주년과 중·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마련된 것으로, 3국의 청동기 유물이 함께 전시됐습니다. 문제는 중국이 전시장에 붙인 연표였습니다. 중국은 한국 고대역사 연표에 신라와 백제를 표기하면서 고구려만 빠뜨렸고, 통일신라시대를 표기하면서 발해를 뺐습니다. 누가 봐도 고의였습니다. 중국은 한술 더 떠 연표 하단에 '본 연표의 내용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리 없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고구려와 발해가 포함된 연표를 제공했지만 중국이 임의로 편집한 것이었습니다.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역사 왜곡을 한 것도 모자라, 마치 한국도 왜곡된 역사를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려 했던 것입니다.

중국 국가박물관에 붙어있던 한국 고대 역사 연표. 신라와 백제, 통일신라시대는 표기하면서 고구려와 발해는 빠뜨렸고, 연표 하단에는 '본 연표의 내용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했다'고 적었다.

중국 국가박물관, 고구려 · 발해 뺀 연표 철거…사과는 안 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은 발끈했습니다. 연표 수정과 함께 중국 측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연표를 수정하지 않으면 한국 측 전시품을 조기에 철수하겠다는 강경한 입장까지 밝혔습니다. 결국 중국 측은 논란이 불거진 지 이틀 만인 지난 15일 문제의 연표를 철거했습니다.

급한 불은 끈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중국은 해당 연표를 수정하지 않은 채, 철거라는 '미봉책'을 택했습니다. 무엇보다 사과가 없었습니다. 중국 측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연표 철거 계획을 통보하면서 "양 박물관이 계속해서 우호적으로 협력하고 소통을 강화해 두 나라의 우익 증진을 위해 협력하기를 희망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전했습니다. 중국은 외교 경로를 통해 "이번 건이 어떤 의도에 의해 추진된 사안은 아니다"라고 밝히면서도,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과는 우리 몫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제때 조치하지 못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고, 우리 외교부가 추후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지난 7월 26일부터 시작됐지만 국립중앙박물관과 외교 당국 모두 연표에서 고구려와 발해가 빠진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9월 13일 언론 보도를 통해서야 알게 됐습니다. 전시회가 시작된 지 49일 만입니다.

베이징에 있는 중국 국가박물관

중국 외교부, 연표 철거 직전까지도 미온적 반응

중국이 사과도 하지 않을 거면서 연표를 철거한 이유는 뭘까요. 물론, 이번 일로 한국의 대중국 여론이 급속히 악화하고 한·중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불거진 뒤 중국 외교부가 보인 반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중국 외교부 마오닝 대변인은 지난 13일 연표 관련 한국 언론 보도가 나온 직후 정례 브리핑에서 "고구려 문제는 하나의 학술 문제"라며 "학술 문제는 학술 영역에서 전문적인 토론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며 정치적인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장 중국이 나서서 해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틀 뒤인 15일에도 마오닝 대변인은 "학술과 정치 분리의 원칙에 입각해 고구려 문제를 계속 적절히 처리하길 원한다"며 기존 입장을 재탕했습니다. 마오닝 대변인의 브리핑이 끝난 후 1시간쯤 뒤 중국은 연표 철거 의사를 우리 측에 전달했습니다. 마오닝 대변인의 브리핑이 진행될 당시 중국 측은 최종 입장이 결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외교당국도 중국의 연표 철거 방침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외교 당국자는 15일 오후까지만 해도 "중국이 이 문제와 관련한 회신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며 "시정 조치를 내놓지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실제로 중국이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을 것을 예상해, 전시품 철수에 대한 실무 검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동안 중국은 역사 문제에 대해 "소통을 통해 해결하자"는 식으로 두루뭉술하면서도 무성의한 입장으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국가박물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동방의 상서로운 금속-한·중·일 고대 청동기전'

중국 '서열 3위' 리잔수 윤 대통령 예방 앞두고 연표 철거

일각에선 중국의 연표 철거가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방한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중국이 연표 철거를 발표한 15일은 리잔수 위원장이 66명의 수행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한 날입니다. 리잔수 위원장은 우리의 국회의장 격으로 중국 서열 3위에 해당합니다. 리잔수 위원장은 이튿날 김진표 국희의장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었습니다. 연표 문제를 그대로 두고는 정상적인 방한 일정을 소화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리잔수 위원장뿐 아니라 우리 국회와 정부에도 적지않은 부담이 됐을 것입니다. 한 외교 관계자는 15일 "중국도 리잔수 위원장의 방한을 앞두고 연표 문제가 불거져 난처한 입장"이라고 전했습니다. 중국이 어떻게든 가시적인 해법을 제시하자고 급히 입장을 정했을 수 있습니다. 시정과 사과는 안 하되, 한국 여론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았을 수 있습니다. 중국 국가박물관은 15일 철거 방침을 우리 측에 통보한 이후 즉각 연표를 현장에서 철거했습니다. 16일 오전 9시 해당 박물관이 다시 개장했을 때 이미 연표는 없었습니다.

16일 중국 국가박물관에서 문제의 연표가 철거된 모습

마오쩌둥 · 저우언라이, 고구려 · 발해 한국 역사 인정

고구려와 발해가 한국의 역사라는 것은 과거 중국 최고 지도부도 이미 인정했던 사실입니다. 지난 1963년 6월 당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만주·간도)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으며, 이것은 발굴된 유물로 증명되고 있고 수많은 문헌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만강과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일갈했습니다.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내걸린 마오쩌둥 전 주석의 초상
마오쩌둥 전 주석도 1958년 북한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당신들의 선조는 조선의 영토가 요하(중국 랴오허강)를 경계로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요동 지역이 원래 조선 땅이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1964년 북한 대표단을 만나서도 "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인데, 봉건주의가 조선 사람들을 압록강변으로 내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살아 있다면, 중국의 지금 이런 역사 왜곡을 보고 어떻게 말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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