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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중국, 6·25 참전 꺼리다 입장 바꾼 이유는

모레(15일)는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지 72주년 되는 날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 중국 국경에까지 진격합니다. 하지만 한 달쯤 뒤인 10월 19일 중국군 26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6·25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고 맙니다. 전쟁은 그렇게 장기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중국은 왜 6·25 전쟁에 참전했을까요. 중국은 6·25 전쟁을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했다고 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부릅니다. 지금도 '미 제국주의에 맞서고 혈맹 관계인 북한을 돕기 위한 대결단이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 초기 중국이 참전을 꺼렸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사료가 처음 공개됐습니다. 1950년 7월 2일 당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가 소련 서기장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 연구는 베이징대 역사학과 김동길 교수가 이끄는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했습니다.

▶ [단독] '저우언라이 전보' 전문…1950년 중국의 계산

1950년 7월 2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사진 왼쪽)는 소련 서기장 스탈린에게 6·25 전쟁과 관련한 전보를 보냈다.

중국, '유엔 통한 해결·미군 북진 저지' 제안…"참전에 소극적"

그동안 저우언라이의 전보는 극히 일부분만 공개됐습니다.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중국이 지금껏 '항미원조'를 얘기해 온 주요 근거 중 하나로, 중국이 적극적인 참전 의사를 보인 것으로 해석돼 왔습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의 전보 전문을 확인해 보니, 중국의 의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저우언라이의 전보는 모두 5쪽 분량인데, 전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5쪽 분량의 저우언라이 전보 전문


저우언라이는 먼저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보의 내용이 당시 중국 주석 마오쩌둥(모택동)과 토론을 거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첫 번째는 유엔을 통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이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전보에서 한반도 문제를 "유엔의 직권 범위 안에서 유엔 헌장에 따라 토론하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기 위해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엔에는 이제 막 건국을 선포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국민당 정부가 가입돼 있었습니다. 때문에 중국은 선결 조건으로 국민당 정부를 유엔에서 추방하고 유엔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국이 두 번째로 제시한 해결책은 미군의 북진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일본에 있던 미군 12만 명 중 6만 명 또는 3개 사단이 6·25 전쟁에 참전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미군 부대가 부산과 마산, 목포로 상륙해 북진할 것으로 봤습니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북한군이 더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 미군의 북진 길목인 대전과 금산, 대구를 점령해야 한다고 스탈린에게 얘기했습니다. 소련도 북한에 압력을 넣어 달라는 것인데, 미군이 북한군의 저지로 상륙을 못하거나 북진하지 못하면 중국이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제안 모두 중국은 참전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는 분석했습니다. 중국이 이 때만 해도 미국과의 충돌 등을 이유로 전쟁 참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중국 "참전한다면 북한군으로 위장"…소련에 공군 엄호 요청

중국이 세 번째로 제시한 해결책이 앞에서 언급한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참전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제안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즉 만부득이한 경우 참전한다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여기에도 단서를 붙였습니다. 먼저, 중국군은 북한군으로 위장해 참전하겠다고 했습니다. 참전 부대도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지원군'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지원'은 '돕다'는 의미의 '支援'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여 나선다는 의미의 '志愿'입니다. 중국 매체들은 지원군을 영문으로 'Volunteers'라고 표기하는데, 자발적으로 참여한 볼런티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든 중국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면서 중국은 소련에 '공군 엄호'를 부탁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열악하나마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투기 지원이 아닌 직접적인 엄호를 소련에 요청한 이유는 뭘까요. 지상군은 북한군으로 위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투기는 얘기가 다릅니다. 중국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에 출현하는 순간 중국의 참전 사실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때문에 중국은 소련에 '대신' 엄호를 부탁한 건데, 당시 소련도 한반도에서 미국과 충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공군 엄호를 소련이 승락할 리 만무한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의 이 세 번째 제안은 결국 중국군의 참전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소련에 무리한 요구를 한 것으로, 이 또한 참전을 꺼린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연구진은 해석했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 김동길 교수(사진 가운데)와 저우톈위 연구원(왼쪽)

 

중국, '미군 평양~원산에서 진군 멈춘다' 북한 정보 믿고 참전

여기서 몇 가지 의문점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참전 쪽으로 최종 입장이 바뀌었는지, 저우언라이의 전보가 왜 그동안 일부만 공개돼 왔는지 등입니다.

중국은 이후에도 소련의 참전·지원 여부, 중국 국내 상황, 전쟁 승리·장기화 가능성 등을 놓고 6·25 전쟁 참전 여부를 계속 저울질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전황이 북한에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중국에 대한 북한의 참전 요구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6·25 전쟁 참전을 선언했다가 철회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1950년 10월 13일 인민지원군 사령관이던 펑더화이(팽덕회)의 보고였습니다. 펑더화이는 북한 내무상 박일우로부터 입수한 최신 정보를 중국 정치국회의에서 보고했는데, '미군이 평양~원산에서 진군을 멈출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펑더화이는 이를 근거로 "중국이 참전할 경우 미군과 싸우지 않고도 북한 북부 지역인 평양~원산 이북 지역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중국의 국방선을 압록강에서 평양~원산 이북 지역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마오쩌둥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타였습니다. 이 보고 이후 6일 만에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넜지만, 미군이 평양~원산에서 진군을 멈추지 않고 북진을 계속하면서 중국의 '무혈입성' 기대는 물건너가고 말았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

그동안 공개됐던 저우언라이의 7월 2일 전보 내용 일부는 소련 측 학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 공개한 것이었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 연구진은 소련이 6·25 전쟁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중국이 초기부터 6·25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고, 중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한 것이지, 소련과는 관련이 없다고 강변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6·25 참전이 항미원조를 위한 마오 주석의 대결단이라고 선전해 온 중국의 입장에서는 참전에 앞서 이런 우왕좌왕했던 모습을, 싸우지 않고 국방선을 넓히려고 했던 속내를 먼저 나서서 보여주기는 싫었을 것입니다. 저우언라이 전보의 전문이 72년이 지나서야 공개된 이유입니다.
 

"북한, 미국 개입 가능성 오판"…북·중 혈맹 관계 재조명 이뤄지나

이번 연구는 역사학회 역사학보에도 투고됐습니다. 학계에선 이번 연구가 중국과 북한의 혈맹 관계에 대한 재조명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나라는 항일 무장투쟁과 6·25 전쟁을 혈맹의 중요 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6·25에 참전한 게 아님이 밝혀졌고,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북한의 잘못된 미군 북진 정보 때문에 중국이 참전한 사실, 중국의 참전 목적이 중국의 국방선을 넓히기 위함이었던 사실 등이 드러난 만큼 어느 정도 관계 재설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시각입니다.

이번 연구는 베이징대 한반도 연구센터가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했다.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의 마지막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북한 동지들이 미국의 무장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 지난해(1949년) 마오쩌둥은 북한 인사에게 미국의 무장 개입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올해(1950년) 김일성을 만났을 때도 재차 강조했지만 김일성은 미국의 무장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답했다."

북한의 오판을 지적한 것으로, 북한 때문에 중국도 원치 않은 상황에 몰렸다는 원망이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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