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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경제 위기에 지정학적 위기…"1970년대보다 더 나쁘다" 잇단 경고

[취재파일] 경제 위기에 지정학적 위기…"1970년대보다 더 나쁘다" 잇단 경고

니얼 퍼거슨, "전염병-전쟁-인플레이션…2020년대는 1970년대와 닮은꼴"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 지난 2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암브로세티 포럼(Ambrosetti Forum)에 참석해 전 세계가 1970년대 보다 더 나쁜 정치 경제적인 위험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퍼거슨은 미국 경제전문매체 CNBC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sleepwalking)."고 말했다.

니얼 퍼거슨은 1년 전인 작년 9월에도 암브로세티 포럼에 참석해 "전쟁이라도 터지면 인플레이션이 촉발될 것이다."라고 경고한 당사자여서 그의 말은 설득력을 더한다. 당시 제롬 파월 미국 연준의장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스티글리츠 교수 등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퍼거슨은 인플레이션이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공급망 붕괴와 막대한 통화 방출로 촉발됐고, 전쟁으로 더 악화할 수 있음을 예고했다.

퍼거슨이 재연을 경고한 50년 전 1970년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로 옛 소련과 미국의 냉전 상황이 고조된 가운데 베트남 전쟁(1964-1975),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의 욤키프르 전쟁(1973)에 따른 1차 석유파동,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1979)에 따른 2차 석유파동,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고강도 금융긴축, 그리고 경기침체가 이어진 상황을 말한다.

당시 미국은 막대한 베트남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달러를 마구 찍어냈고, 달러 가치가 하락하자 프랑스 등 일부 국가들은 금 1온스에 35 미국 달러를 주기로 한 브레튼우즈협정(금본위제)에 따라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것(금태환)을 요구했다. 이에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달러를 계속 찍어 내면서 인플레이션이 촉발됐다.

통화량이 급증한 상황에서 1979년 이란에서는 반미를 내세운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났고, 이란은 미국 등 서방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선언했다. 석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촉발되자 당시 미국 연준 의장이었던 폴 볼커(Paul Volcker)는 5%였던 기준금리를 19%까지 인상하면서 물가를 잡는 데 성공했지만, 고강도의 금융긴축으로 심각한 경기침체가 유발됐고 주가는 폭락했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왼쪽 파랑)과 다우지수(오른쪽 검정)

파월 연준의장은 폴 볼커의 부활…"경기 소프트랜딩 물 건너갔다"

니얼 퍼거슨은 이탈리아 암브로세티 포럼 직후 가진 미국 C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미중간의 갈등 격화 등 지금 2020년대의 상황은 잘못된 재정통화정책과 전쟁, 에너지 위기가 이어진 1970년대의 상황과 구성요소가 유사하다고 말했다. 광범위한 전염병 같은 예상하지 못한 위기가 발생해 경제를 와해시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규모 통화재정정책에 이어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하면서 통제하기 힘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패턴이 이어졌다는 진단이다. 특히 지금의 상황은 훨씬 규모가 커진 부채, 생산성의 하락, 악화한 인구구조에 진영 간 관계 개선(détente) 가능성도 낮아 지난 1970년대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퍼거슨은 사람들이 평균의 함정에 빠져 정규 분포를 믿고 갑작스러운 위기 발생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지만 전쟁이나 금융위기, 수백만 명을 숨지게 하는 전 세계적인 전염병은 비선형적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이 코로나19 위기도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안이하게 판단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미국 기준금리(왼쪽 파랑)와 경제성장률(오른쪽 검정)

퍼거슨은 제롬 파월 미국 연준의장이 작년 말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가 이제 입장을 완전히 바꿨다면서, 2차 석유 파동 당시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와 경기침체 우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일관되지 못한 통화정책으로 위기를 키웠던 폴 볼커 연준의장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파월 의장이 지난해 말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1970년대 같은 상황은 오지 않는다. 일시적인 2% 이상의 물가 상승은 용인할 수 있다.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 소비자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여 경제상황을 논의하는 지난 8월 26일 잭슨홀 미팅에서 파월 의장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이 정책의 최우선 목표"라고 말했고, 이제 금융시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경기를 연착륙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퍼거슨은 미국의 7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8.5%로 다소 둔화됐지만 영국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10.1%를 기록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40여 개국의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를 넘었다며,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실질금리를 플러스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질금리는 시장에서 통용되는 명목 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금리로, 실질금리를 플러스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기준금리를 물가상승률보다 높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퍼거슨은 실질금리가 물가상승률보다 높아야 한다는 말에서 주목해야 하는 지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아닌 기대인플레이션율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7월 기대인플레이션이 6.2%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퍼거슨의 주장대로 기대인플레이션보다 높은 수준으로 실질금리를 올리려면 기준 금리가 최소한 6%를 넘어야 한다는 얘기다.

퍼거슨은 연준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이라면서, 역사적으로 실질금리를 플러스로 전환하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잡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경기침체를 유발하지 않고 높은 인플레이션율을 끌어내린 역사적인 사례도 찾기 힘들다고 밝혔다.

퍼거슨은 미국의 경우 아직 실질금리가 플러스가 되지 않는 등 통화정책이 고강도 긴축으로 돌아서지 않았고, 금융시장이 얼어붙지 않아 경기침체에 빠졌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유럽의 경우 경기침체에 접어들었음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위기로 세계 경기는 이미 활력을 잃고 있다는 주장이다.
급등하는 원달러 환율

투키디데스의 함정 빠진 미국과 중국, '신냉전' 아닌 '열전(무력 충돌)' 위기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은 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 강대국이 이를 두려워해 전쟁이 일어난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Tuchididdes Trap)에 비유된다. 퍼거슨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타이완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냉전(cold war)이 아닌 진짜 무력충돌, 열전(hot war)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에 빠진 것과 달리 중국은 경기침체에 빠져 있다. 코로나19에 대처할 제대로 된 백신을 만들지 못했고, 제로 코로나를 외치며 봉쇄조치로 대응하면서 경기침체를 심화시켰다. 부채가 증가한 상황에서 부동산 경기가 침체돼 부실 대출 규모가 커지고, 인구는 곧 급격한 감소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의 인구는 21세기 말 최소한 지금의 절반 또는 극단적으로는 3분의 1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당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진핑 국가 주석은 오는 10월 전당대회에서 3연임할 것이 확실하지만, 누가 2인자가 될지는 불투명하다.

퍼거슨은 경제상황이 악화하고 당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서 중국 공산당은 경제보다는 당의 권력을 우선할 가능성이 높고, 그럴 경우 국가주의(nationalism)가 부상할 가능이 높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 이어 고위 정치인들이 잇따라 타이완을 방문하는 등 그동안의 전략적 모호성(ambiguity)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퍼거슨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표방하는 중국으로서는 타이완의 독립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사안인 만큼 타이완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신냉전이 아닌 열전(hot war)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시진핑이 3 연임을 하는 명분이 타이완을 중국에 귀속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노골적인 타이완 독립 지지 움직임은 미국과 러시아의 실질적인 무력충돌로 이어질 뻔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와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월간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한 한국의 8월 무역수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 최대 수출 대상국인 중국의 경기 침체,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 분야의 업황 악화가 겹쳐 우리나라의 8월 무역수지는 94억 7천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미-중 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으로의 수출이 더욱 줄어들 경우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퍼거슨은 "과거 한국전쟁과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전쟁과 3차 대전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극적인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서 최악의 위기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고조될 뿐 타협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오히려 미국은 타이완 문제와 함께 홍콩의 국가 보안법, 신장의 인권문제를 놓고 중국을 더욱 압박하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베트남 전쟁 등으로 고조된 양국 간의 긴장완화를 이뤄낸 것처럼 미-중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쿠바 미사일 위기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퍼거슨은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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