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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대로 살 순 없다'는 하청 노동자에게 날아든 470억 소장

벼랑 끝에 선 노동자들의 파업, 경영진 책임은?

[취재파일] '이대로 살 순 없다'는 하청 노동자에게 날아든 470억 소장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다시 거리에 앉았습니다. 51일간의 파업을 끝낸 지 한 달 여 만입니다. 국회 앞에서 지난 18일부터 단식 중인 김형수 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을 만났습니다.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었지만 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고, 검게 그을린 얼굴의 김 지회장은 인터뷰 내내 자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김 지회장은 어렵게 일군 노사 합의 이후,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가 다시 거리에 나온 이유, 파업 이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약속' 때문입니다.
김형수 지회장_제희원 기자 취파
"(노사)합의 문구에 보면 폐업이 된, 그리고 폐업이 예정돼 있는 4개 업체 조합원들을 고용 승계하겠다. 그것을 위해 협력사와 원청도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내용적으로 합의가 됐습니다. 원청에선 (그간) 인력 부족 등의 문제가 있었기에 쉽게 풀릴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얘기했었고, 원청의 입장을 반영해서 합의문에는 '최대한 노력한다'는 정도로 담았던 것인데 지켜지지 않고 있어요." - 김형수 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

정부는 조선업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외국인 비자 제한을 풀어서라도 인력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을 내놨습니다. 그만큼 요즘 조선소에 배 만들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번 파업에 참여했던 숙련공 42명의 자리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대부분 경력 10년차 이상으로 4~50대 가장들입니다. 이들 역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현실적으로 올려달라며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김형수 지회장_제희원 기자 취파
"이번 합의를 통해 원하청 간에 신뢰 구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파업의 이유였던) 임금 부분에서 많이 양보를 하며 투쟁을 마무리한 것이고요. (그런데)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우조선 원청과 산업은행이 하청노동자들을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 인식이 강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고…."

다시 거리로 나와 끼니를 끊는 동안 사측의 손배소 검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파업 기간, 사측과 언론은 "하청노조의 조선소 점거로 인해 발생한 손실이 8천 억 원에 달한다"고 추정했습니다. 옥포조선소 5개 도크가 모두 멈춘 상황에서 선박 인도 지연배상금 등을 모두 물어내는 상황을 가정한 매출 피해액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업 당시 실제 조업을 멈춘 곳은 제1도크뿐이었고, 지연배상금 역시 기간 안에 선박을 인도하면 배상하지 않아도 되는 금액이어서 확실한 손해로 보기 어렵습니다. 분초 단위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다른 공장과 달리, 길게는 몇 년을 두고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업 특성상 손해액 산출은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인터뷰 닷새 뒤 대우조선해양은 이들 집행부에 470억 원을 물어내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8천 억이 어느새 470억 원으로 줄었지만, 그럼에도 손배·가압류 역사상 개별 노동자에게 청구된 가장 큰 금액입니다. 김 지회장은 한 달에 200만 원도 못 받는 하청 노동자한테 8천억이나 470억이나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김형수 지회장_제희원 기자 취파
"예전에 '조선소에 가면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는 얘기들이 있었는데 그때도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힘들게 살았고요. 이번 (파업을) 계기로 하청 노동자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꾸기를 바랐던 것인데. 정규직만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규직의 한 60%, 70% 정도만 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안 들어주면서 그거에 대해서 손배를 몇 백억 때렸다. 이거는 정말 비인간적이다…. (회사에선) 손배를 안 하면 자신들이 배임에 걸린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지 않으면 배임에 걸린다면 법을 바꿔야 되는 거죠."

한국에서 유독 '손배소' 남용…영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요.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은 불법파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불법과 합법을 판단하는 '위법성'에 대한 엄격한 판단이 이뤄지는데, '누구의 어떠한 행위가 무슨 근거로 위법한 것인지, 구체적 위법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는 무엇인지' 고찰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쟁의행위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합법과 불법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파업에 대한 정부 태도도 신중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실제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로 이어지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독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영국 역시 노동조합 규모에 따라 손해배상 상한선을 법률에 규정하고 있지만, 사용자가 손배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보고된 바 없습니다. 사용자가 무기로서 손해배상을 이용하는 문화가 없다는 점과 소송에서의 논란과 불확실성보단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는 당사자의 필요 때문에 소송을 피해간다는 건데 우리와 대조적입니다.

"하청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지 않아서 배임에 걸린다면, 법을 바꿔야죠"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
'파업의 시작'을 어디로 볼 건지도 곱씹어 볼 부분입니다. 단순히 노동자의 쟁위 행위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노사 갈등을 조율할 수는 없었는지, 이에 대한 경영진의 책임은 어디까지 볼 것인지 등입니다. 만약 파업의 귀책사유가 사용자에게도 부분 인정된다면, 손해에 대한 책임을 사용자가 분담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스스로 쇠감옥에 들어가 농성한 유최안 부지회장은 파업을 끝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눈물로 띄운 배로 세계 1등이 무슨 소용인가. 이대로 살 수 없어, 이 상황을 바꾸고 싶다."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가압류를 제한하는 내용의 '노란봉투법'은 2015년 처음 발의됐지만 20대·21대 국회에서도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국회의 시간입니다.

<참고자료>
조경배 순천향대 법대 교수, 해외입법례를 통해 본 한국사회의 손배가압류 문제점, (2022 조선업의 위기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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