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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 정멜멜 [북적북적]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 정멜멜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51 :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 정멜멜
명확한 재능이 없어 표류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언가를 지치지 않고 좋아해왔다는 것 자체도 내가 가진 큰 재능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中

〈골라듣는 뉴스룸〉의 책 읽는 일요일, 〈북적북적〉의 이번 주 책은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정멜멜 지음, 책 읽는 수요일 펴냄)』입니다.

'빛'과 '그림자'?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상하기 힘들죠? 작가 이름도 특이하다고요?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는 사진작가 '정멜멜' 님의 에세이입니다. 정멜멜 작가는 스튜디오 '텍스처 온 텍스처'를 운영하며 여러 프로젝트의 사진을 찍고 있죠. 인터뷰에서, 광고에서, 멜멜님의 작품은 특유의 자연스러움을 뿜어냅니다. 한 동안 많이 쓰던 'O며들다' 라는 말처럼, '멜며드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그런 정멜멜 작가가 사진이 아닌 글로 두툼하고 만듦새 좋은 에세이집을 펴냈습니다. 책 속 활자를 읽기 전부터 손에 잡히는 두께와 부드러운 색깔의 종이와, 따로 모아 실은 사진만으로도 종이책이 줄 수 있는 포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읽기 시작하면, '사진만이 아니라 글로도 자연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사람이구나' 하고 놀라게 되지요.

저자가 처음부터 사진작가로 살게 된 건 아니었어요. 미대를 나와 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하며 끝없는 야근에 지쳐가던 어느 날, 회사를 호기롭게 그만두고 (많은 직장인 독자들이 부러워하고 동시에 걱정할 부분이지요?) 단골 맥주집 사장님(이 분 역시, 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소위 '갓생'을 살던 분입니다.)과 의기투합해서 새 사업을 구상합니다. '앞으로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겠어'라며, '디자인도 하고 생선도 파는' 사업을 하기로 한 겁니다. 그러나 운명일까요, 이 동업은 두 사람의 당초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요한 건 틀어진 계획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라고 썼습니다.
 
피했으면 좋았을 일도, 언젠가는 맞서야 했을 일들도 있다. 어쨌든 잘 겪어내야 처음이 된다. 그래야 그 다음이 있으니까. 시작이자 끝이 되지 않도록. 다가오는 출발들을 최선을 다해 마주하고 있다. 숙련된 내일을 만나고 싶어서 수많은 처음들을 넘는다.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中

이 책의 첫 챕터 「일과 삶」에 실린 14편의 글에는 스튜디오를 열고 자신들만의 색깔로 이어나가는 과정과, 예상치 못하게 전업 사진작가가 된 과정이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스튜디오를 연 초보 사장님으로서의 우여곡절과 지난 7년간 사무실을 세 번 옮기며 구비구비 터닝 포인트에서 느낀 점들이 담백하게 쓰여 있습니다. 책에 그런 표현이 있어요. '후회하지 않을 선택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권유할 수 없는 방식과 감각들' 이라고요.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서 보니 과연 동업은 함께하는 여행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 …(중략)… 문제는 이 여행이 끝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행의 반대말은 귀가일까. 동업의 반대말은 폐업이다. 동업은 조금 절망적으로 말하자면 서로의 발을 묶고 하염없이 달리는 2인 3각 레이스인 것이다. 대부분 어깨동무를 하고 있지만 가끔은 서로에게 침을 뱉고 싶은 마음으로 달려 나가는.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中

아침에 싸우고 점심에 화해하고 저녁에 다시 싸울지언정, '서로의 의견을 반죽하고 둥글게 굴려 만들'든,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을 이어 붙인 완전히 새롭고 거친 모습'이든, 함께가 아니라면 다다를 수 없었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결과물을 얻어왔다고 저자는 썼습니다. 매일 사소하게 진전했다고요.

스튜디오에는 이상하게도 디자인보다 사진 작업 의뢰가 점점 많아졌고, 저자는 평생 찍어왔고 사랑해왔지만 '직업'으로는 생각지 않았던 '사진'을 '일'로 삼게 됩니다. '무언가를 지치지 않고 좋아해온 재능'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죠.

이 책의 두 번째 챕터 「도시와 산책」에는 그렇게 '일'이 된 사진 작업의 결과물들과 출장, 여행에서의 사진에 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같이 떠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눈호강 챕터이지요.

세 번째 챕터 「균형과 반복」은 온전히 사진을 찍는 창작자로서의 이야기입니다. 왜 찍고, 어떤 마음으로 찍고, 어떤 시각으로 찍는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 능숙해져도 사라지지 않는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의 추격전'을 솔직하고 매력적인 문장으로 털어놓습니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나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싶어지는 사진도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좋은 창작물의 기준은 노래 부르고 싶어지는 노래, 글 쓰고 싶어지는 글,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그림 같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들이 불러일으켜지는 누군가의 결과물들을 좋아한다. 비상하고, 위대하고,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창작물도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고 너무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소비하지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반면 나는 역시 작은 세계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압도하는 무언가보다는 가능하다면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순환되는 창작을 하고 싶다. 여백이 있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사진, 가볍게 카메라는 들고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게 하는 사진이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다. 잔잔한 무언가를 별 탈 없이, 오래오래 만들어내길 바란다.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中

정멜멜 작가님의 사진이 '나도 찍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사진이듯이, 정멜멜 작가님의 글 또한 '글 쓰고 싶어지는' 글인 듯합니다. 어떻게든 좀 더 근사해 보이려 하고 성취를 과시하는 책이 넘치는 요즘,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는 좋아하는 것을 일로 삼아버린 사람이 뻐김 이나 호들갑 없이 쓴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책입니다. 8월의 한 가운데서, 이 책을 읽으며 멜멜 작가가 나누어 주는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챙겨가 보시면 어떨까요.

*출판사 '책 읽는 수요일'의 낭독 허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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