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짜장면 먹으러 한국 가겠다"…'사드' 등 공감대
회담 결과도 유의미한 내용이 있습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에 따르면, 박진 장관은 미국이 추진하는 반도체 공급망 대화, 즉 '칩4'(팹4) 예비 회의에 한국이 참여하기로 한 사실을 왕이 부장에게 통보했습니다. 박 장관은 그러면서 "한·중 간 경제 협력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감안할 때 '칩4'가 중국을 배제하는 협의체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미국에 설명했으며, 한국이 '칩4'에 들어가는 게 중국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다"고 왕 부장에게 얘기했습니다. "한국은 특정 국가를 배제할 의도가 전혀 없고 오히려 한국이 중국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중국과도 공급망의 안정적 관리를 위한 소통·협력을 강화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왕 부장은 "한국이 신중하게 판단하기 바란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게 외교부 고위 당국자의 전언입니다.
또 다른 핵심 쟁점이었던 '사드 문제'에 대해서도 두 장관은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에 따르면, 박 장관은 왕 부장에게 "이른바 '사드 3불'은 합의나 약속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드 3불'은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이 한창이던 지난 2017년 10월 문재인 정부가 언급한 것으로,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 방어(MD) 체계에 들어가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박 장관은 그러면서 "사드 3불이 거론될수록 양국 국민들의 상호 인식이 나빠지고 양국 관계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며 "더 이상 이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게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중국 측도 사드 문제가 향후 한·중 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 명확하게 공감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밖에 두 장관은 올해 안에 2+2 외교·국방 차관급 대화를 개최하기로 합의했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 투자 후속 협상을 가속화하기로 했습니다. 문화·인적 교류 활성화를 위한 문화 콘텐츠 교류 확대, 한·중 간 항공편 증편에 대해서도 공감했습니다.
펠로시 타이완 방문, 한·중 외교회담에 영향 미쳤나
이와 관련해 한 외교 소식통은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타이완 방문이 이번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펠로시 의장의 타이완 방문 이후 타이완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미·중 갈등이 더욱 격해지는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마저 적으로 돌리려 하진 않을 것이란 해석입니다. 타이완 문제 등을 둘러싸고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에 우군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립군을 두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관영매체, 윤 대통령-펠로시 면담 불발 잇단 보도
중국 관영매체들은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면담하지 않은 사실을 연일 보도했습니다. 관영 환구시보는 지난 4일 '펠로시 의장이 한국에 도착한 날 저녁,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대학로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배우들과 만찬을 했다'고 보도한 데 이어, '펠로시 의장이 한국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펠로시 의장 면담은 미·중 갈등 속에 한국에 부담이 된다', '전직 미국 정부 관리는 한·미 관계에 대한 모욕이라 말했다' 등 관련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타이완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 안 만나는 걸로 결정한 것 같다", "안 만나는 게 결과적으로 낫다"는 일부 한국 전문가들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인용했고, "미국에서 누가 오면 무조건 버선발로 달려 나가야 하느냐'는 한국 네티즌의 댓글을 소개했습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펠로시 의장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오산 공군기지에 한국 측 의전 인력이 아무도 나가지 않은 사실도 함께 전했습니다.
의도는 뻔합니다. 펠로시 의장이 한국에서 외교적 무시를 당했고 한·미 관계에 틈이 생겼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왕이 부장의 '짜장면' 발언이 이와 결코 무관되게 생각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한국 측 인사가 펠로시 의장을 마중 나가지 않고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은 게 중국의 심기를 피게 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를 놓고 여당이나 보수 진영에서 한·미 관계의 훼손을 가져올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다시 출발점에 선 듯한 모양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