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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EYE] 야만의 시대, 미-중 줄서기 강요 대응책은?

외교의 시대에서 무력의 시대로

현란한 외교의 시대가 야만의 무력 시대로 바뀌고 있다. 21세기에는 더 이상 큰 전쟁이 없을 거라던 순진한 전망은 이미 잿빛의 과거로 사라지고 있다. 국익을 이유로 러시아가 7개월째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이고, 훈련 상황이지만 중국 미사일이 타이완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다.

힘 센 놈이 내 맘대로 이익을 관철하는 야만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기구나 어설픈 국가 협약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결국 무력만이 국가의 존속을 담보할 수 있다는 잔혹한 진실을, 우리뿐만 아니라 북한도 일본도, 다른 모든 나라들도 불편하지만 깨닫고 있을 것이다.

토인비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들이 결은 조금 다르지만 "역사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만 바뀔 뿐 반복된다"고 설파한 것들이 이 시점에서는 묵직하게 뇌리를 파고든다.

낸시 펠로시 의원-윤석열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우방국 순방은 동맹 강화라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동맹국과 외교 전반에 큰 부담을 안기고 있다는 분석이 봇물이다. 국내에서도 영접 홀대 논란이 이는가 하면, 대통령이 휴가를 이유로 펠로시 의장을 대면하지 않은 건 중국 눈치 보기라는 비판을 놓고 국론 분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패권 갈등에 이은 줄서기 강요

강대국들의 패권 갈등은 필연적으로 주변국들에 대한 줄서기 강요로 이어진다. 누구 편에 확실히 설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다. 그쪽과 연대해서 국가 존속의 기본요건인 안보와 경제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줄설 수 없는 나라가 있다. 그게 바로 우리다. 안보는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경제는 중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있다. 비약해서 말하면 미국의 안보 지원 아래, 중국과의 분업을 통해 지금의 번영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양대 패권국가에 이렇게 밀접하게 엮인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보수 정권이 미국에, 진보 정권은 중국에다 무게 중심을 둘지언정, 어느 한쪽에 '몰빵'할 수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혹은 중국의 대국굴기를 혐오하는 서로 다른 성향의 국민들 역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지금 중국은 크게 열 받은 상태다. 갖은 엄포에도 감행된 펠로시의 타이완 방문으로 중국은 패권국가로의 행보에서 대내외적으로 체면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권위주의적인 국가일수록 체면에 민감하다. 맞장 뜨자고 덤볐던 미국에 찍소리도 못하는 것처럼 인식된 만큼, 차제에 자존심 회복을 위한 과격 행동을 불사할 태세다.

이 와중에 우리는 민감한 현안에서 줄서기에 직면해 있다. 목전에 다가온 게 미국이 요구하는 칩4 동맹이다. 반도체 공급체계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미국, 일본, 타이완의 동맹에 참여할 건지를 이달 말까지 미국 측에 답해줘야 한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한국의 칩4 동맹 가입은 '상업적 자살행위'가 될 거라며 겁박하고 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 반도체 수출액 가운데 중국 수출이 40%이고 홍콩을 포함하면 60%에 이르는 걸로 분석된다.

그렇다고 가입하지 않는 것은 더 큰 희생이 따른다. 우리의 메모리 반도체 역량은 미국의 원천기술과 일본의 장비에 의존하는 부분이 절대적이다. 두 나라로부터 기술과 장비를 공급받지 못하면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한국 중국

경제-안보 분리 정책 난관…국가 역량 맞게 대응

한국은 경제와 안보 분리 정책을 통해 미중 패권 경쟁에서도 잘 버텨왔지만, 양대 패권국가가 경제와 안보를 동일시하기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른바 '전략적 모호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강하게 맞부딪치는 패권에 정신없이 휘둘리며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부응하다보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양쪽에서 강한 힘으로 흔드는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줄타기에 앞서 자신의 역량부터 살펴야 한다.

한국의 국력을 대변할 수 있는 흔한 통계들을 보면, GDP 세계 10위, 국방력 세계 6위, 인구 5천만 이상 국가 중 1인당 소득 세계 6위 등이 있다. 거기다 우주 발사체에 이어 초음속 전투기의 개발과 무기 수출국으로서도 세계 10위권 내에 들었다. 종합 국력이 세계 8위라는 분석도 보인다.

일부 통계의 정확도에 작은 논란은 있겠지만, 어쨌든 한국이 현재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며 존재감 있는 나라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패권국가라 할지라도 예전처럼 막 다루기는 버거운 상대가 된 것이다.

한때 「동북아균형자론」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역으로 이용해, 우리가 주도적으로 강대국의 균형자 역할을 하자는 거였다. 이상적이지만 한국의 국력으론 비현실적이란 비판이 그때는 많았다.

균형자는 무게감이 있을 때 가능하다. 맡을 만한 무게감과 역량이 없는 국가에게 어느 강대국이 균형 잡을 역할을 시켜주겠는가.

패권을 다투는 국가들의 줄서기 압박을 목전에 두고, 우리는 스스로의 무게감을 냉철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느껴지는 우리의 무게감이 크다면, 줄서기 압박에 화가 난 한국이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밀착되는 걸 미국과 중국 모두 두려워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균형자 역할이 다가올 수도 있다.

항상 그랬듯 우리가 원하지 않았지만 패권 갈등이 우리의 외교정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요하고 있다. 이 상황을 얼마나 슬기롭게 헤쳐 나가느냐에 따라, 선진한국이 더 뻗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지가 달려있다. 그것은 또한 새 정부의 능력을 밀도 있게 시험하는 첫 관문이 될 것이다.

고철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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