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그사람] 떠남의 미학을 보여주는 사람, 김종철

[그사람] 떠남의 미학을 보여주는 사람, 김종철

윤춘호(논설위원)

작성 2022.08.06 07:39 수정 2022.08.06 12:29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그사람] 떠남의 미학을 보여주는 사람, 김종철

1. 나는 내세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퇴직한 기자 이야기다. CBS에서 6년, 한겨레신문에서 27년의 시간을 보냈다. 기자로 있는 동안 주로 정치 분야를 취재했고 퇴임 직전인 지난 5월까지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김종철의 여기>라는 타이틀로 심층 인물 탐구 기사를 써왔다. 주말 아침 이 사람 인터뷰 기사를 보는 게 낙이었다. 필자 역시 몇 년 전부터 사람에 대한 스토리를 써오고 있는지라 이 사람 글에 더 관심이 갔다.

만기 제대하듯 훌훌 털고 언론계를 떠난 이 사람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30여 년의 기자 생활을 마감하는 소회, 인터뷰 뒷이야기, 퇴직 후 계획 등등. 한번 만나자고 했더니 극구 사양했다. 자신은 인터뷰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며 기자를 만날 거면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누구를 하면 좋을 것이라는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래도 인터뷰 요청을 끝내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120여 명이 넘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사람이다. 섭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에 마냥 거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섭외는 쉽지 않았지만 일단 대화가 시작되니 이 사람도 할 말이 적지 않았던 듯싶었다.

김종철 전 한겨레신문 기자(왼쪽)

기자들은 자신들의 동료, 선후배를 평가하는 데 박절하다 싶을 만큼 인색하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욱 인색하다. 자기 자랑하는 것은 남세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터뷰 중에도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더니 인터뷰가 끝나고 난 뒤에도 메일을 보내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 포장 같은 것은 걷어내달라고 당부했다. 언론계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24시간 단위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 기록이 기사의 형태로 고스란히 남는다. 기사는 한 사람이 살아온 지울 수 없는 흔적이기도 하다. 그런 기록과 흔적이 30년 넘게 쌓이면 거짓말을 하려 해도 할 도리가 없다. 없는 기록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처럼 있는 기록을 지울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뻔하게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습이 실제와 다르게 그려져 남들의 웃음을 사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름이야 익히 알던 기자였다. 몇 년 전 <이달의 기자상> 심사위원회에서 만났고 그 인연으로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보는 사람이다. 말과 글에 못지않게 몸가짐과 행동이 더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함께 하면 그 자리 품격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어떤 이가 '등이 곧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었다. 목소리가 크거나 말주변이 좋지도,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이 사람이 앉은 자리는 꽉 차 있는 느낌이었고 어쩌다 자리를 비우면 그 빈자리가 커 보였다. 언론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 본인부터 손사래 칠 테지만 언론인의 한 전형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2. 모범생, 운동권 그리고 기자

상주 시내에서 고향 면 소재지까지 30리, 거기에서 이 사람이 태어난 마을까지는 10리를 더 가야했다. 버스도 안 다니던 벽촌이었다. 졸업생들에게 경찰지서장, 면장이 상을 주던 초등학교를 다녔다. 빈농에 가까운 집안의 공부 잘하는 장남이었다. 고등학교 때 어려운 가정 형편에 먼 대구까지 유학을 보낸 것을 보면 장남에 대한 집안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성광고 2학년 때 나랏님 같았던 박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전교생이 대구 실내체육관에 차려진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던 공부 잘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던 모범생이었다. 경북 출신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으니 혹시 TK 정서 같은 게 있었을까.

김종철 그사람 / 1979년 고2 시절

"그때는 TK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습니다. 그러니 TK에 대한 긍지나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구요. 경북고 같은 유서 깊은 학교를 다녔다면 혹시 그런 말을 선생님들에게서 들었을지 모르지만 제가 다닌 학교는 평준화 이전에는 그렇게 좋은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TK, TK 정신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어렸을 때 꿈이 선생님이었다. 1981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교사가 되는 데 필요한 과목을 들으면서 꿈을 버리지 않았다. 대학 4학년 때 교생 실습만 나갔다면 역사 선생님이 되었을 것인데 학생운동이 발목을 잡았다.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이 되는 바람에 교생 실습을 나가지 못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은 꿈을 학생운동과 바꾸어버렸다. 데모하면 안 된다는 말을 귀가 닳게 들었지만 세상의 비밀을 엿본 이 사람이 운동권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처럼 보였다. 미팅을 즐기고 일찍부터 도서관에서 법전을 파고드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될 거 같았다.

1981년 대학교 1학년 시절 총장배 마라톤 대회 모습

"역사와 세상을 알게 된 이후에는 저에 대한 부모님의 간절한 기대 때문에 괴롭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넘어서서 지식인으로 해야 될 일이 있구나, 내가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고 희생이 될지라도 그 부분들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1984년 11월 3일 학생의 날, 서울 시내 대학교 연합 시위를 주도했다. 잡혀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찰이 잡아가질 않았다. 공장에 들어가 짧게 노동자 생활을 했지만 그곳이 자기 자리는 아니었다. 군 제대 후 대한생명에 취직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7개월 정도 다닌 뒤 그만 두고 언론사 시험을 준비해 1989년 CBS 기자가 되었고 1995년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생운동에 이어 사회운동 차원에서 언론계를 선택하는 것은 그 당시에 일종의 유행이었다. 이 사람 역시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1991년 CBS 정치부 기자 시절

3. 자기 이름 석 자로 족한 사람

기자가 된 이후 정치부, 그 중에서도 보수 정당 취재를 주로 맡았다. 민정당부터 시작해 민자당, 한나라당, 새누리당까지 취재했다. 경북 출신이라는 점이 출입처 배정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한겨레라는 진보 매체 소속이었지만 그 당시 보수 정당 인사들은 김종철이 쓴 기사라고 하면 다들 인정했다. 이 사람이 적용하는 자의 길이가 사람이나 진영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다.

"한나라당 출입을 하다가 민주당을 갔는데 그때 한나라당쪽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대요. 김종철 기자 민주당에 가서 쓰는 거 보니까 저 기자는 믿을 만하다고.… 기사를 쓸 때 글을 모질게 쓰기보다는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식으로 써야겠다, 단어가 강하다고 사람들한테 박수받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설득하고 수긍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기사를 썼던 거 같아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평가가 후하다. 유승민에게 이 사람에 대해 물었더니 꽤 긴 답문을 보내왔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이 참 맑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투명하다. 일부 운동권의 극렬함이나 고집, 오만 같은 것이 없다… 모든 인간에 대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다. 말이 가볍지 않고 예의를 지키고 진중하다." / 유승민 전 국회의원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이 두 번째 대선을 준비할 때 이야기다. 이 총재가 기자들 몇 명을 정기적으로 만나 조언을 듣고 대화를 하는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거기에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이회창 측근에게 받았다.

"내 취재 대상 중에 가장 높은 사람과 만나는 거니까 그런 모임에 가면 남들이 못 듣는 정보도 들을 수 있고 좋은 기회일 수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건 언론인으로 바른 취재 방법이 아닌 거 같더라구요. 거기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결국은 정치인 조언 그룹이 되는 건데, 그런 것은 아닌 거 같아서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성실한 기자였지만 기자로서 전설은 아니었다. 세상을 뒤흔든 특종을 한 적도 없고 유려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거나 논리가 선연해서 읽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쪽은 아니었다.

"제 글이 썩 눈에 띄고 그랬던 것은 아닌 거 같아요. 그런 것은 아니었고 부드러우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 정도였죠.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글을 쓸 때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생각할 거리를 주자는 마음이었지 글 한 편이 세상을 뒤집거나 그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기자들에게는 몇 가지 불치의 병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내가 누굴 잘 아는데' 하는 병이다. 그런 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두어 차례 얼굴을 봐왔지만 '내가 누굴 아는데', '내가 누굴 만났는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사람을 아는 체하지 않고, 남의 말을 내 말인 양 옮기는 경우도 없다. 내 이름 석 자로 족하니, 굳이 다른 사람의 이름 같은 것을 빌릴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한 번도 사람 자랑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가요?
"일부러 그렇게 한다기보다 젊었을 때부터 누구를 안다고 하고, 누구에게 기대서 뭘 하겠다는 생각은 안 했고 그러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어요. 누구의 권위나 힘에 기대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언론사 선후배 관계도 마찬가지다. 후배들에게 추앙에 가까운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이런 것을 고마워하지만 자랑하지는 않는다. 그런 티도 내지 않는다. 인연에 매이지 않고 사람에 매이지 않는다. 이제 나는 할 만큼 했다며 개운한 표정으로 현직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사람에 기대지 않고 인연에 매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09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특별 인터뷰

 

4. 평기자로 돌아와 화양연화 시절을 열다

수석부국장 격인 편집국 신문부문장까지 올랐지만 편집국장이 되지는 못했다. 그럴 경우 논설위원으로 가는 게 관행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오를 수 있는 고지가 없어진 상황, 좀 쉬겠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었지만 이 사람은 뉴스 현장으로 복귀했다.

"편집국 간부 마치면 본인의 희망을 존중해서 인사를 하는 게 관례죠. 논설위원실을 갈 수 있었는데 그건 너무 쉬운 선택인 거 같더라구요. 논설위원실에 가면 칼럼 쓰고 사설 쓰고 품격도 있고 좋죠. 그런데 저는 그전에 3년 가까이 그 일을 했고 무엇보다 거기는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거기를 또 가는 것은 아닌 거 같아서 편집부든 디지털 부서든 어디든 평기자로 가겠다 했는데 토요판을 가게 된 거죠."

후배의 지시를 받는 자리였고 후배들과 똑같이 기획을 하고 기사를 쓰는 자리였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업 부서에 있을 때보다 여유를 가지고 깊이 있는 기사를 다룰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남을 비판하지 않아도 좋았다고 했다.

"현업 부서에 있을 때 나름 절제한다고 했지만 비판의 칼을 휘둘렀죠. 글의 형태로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이 가장 아픈 거 같아요. 글은 오래 가잖아요. 젊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나이 들수록 글은 진짜 조심해야 되는 구나 싶었죠. 토요판에 와서는 그런 부담이 없어 좋았어요."

같은 부서 후배들은 "고민이 있으면 이 사람 얼굴을 쳐다봤고, 기사 방향을 정하기 어려울 때도 이 사람 얼굴을 쳐다봤다. 하다못해 점심 메뉴가 잘 안 잡힐 때도" 이 사람을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정답을 내줬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의지가 됐던 모양이다.
논설위원을 하고 정치부장을 하고 부국장을 할 때도 좋은 기자였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본인 말대로 평범한 기자였고 그런 기자는 이 사람 말고도 많았다. 논설실로 복귀했더라면 그저 그런 언론인의 한 명으로 정년을 맞았을 것이다. 토요판에 와서 기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새겨나가기 시작했다. 원세훈을 주어로 한 국정원 댓글 관련 기사,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 관련 기사 같은 호흡이 긴 기사를 통해 자신의 '취재 영역'을 구축해나갔다. 기자로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좋은 동료들까지 있었다. 토요판에 있던 6년이 자신의 기자 인생에서 화양연화 시절이라고 했다.

"제가 마지막에 후배들에게 박수받으면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인데 제가 현장에서 후배들과 같이 일을 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제가 만약 마지막 6년 동안 편집국 간부로 있었다면 그러기 어려웠을 거예요. 간부는 책임지는 자리잖아요.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면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되는 거고 그랬다면 역할 때문에 후배들과 부딪히고 그랬을 텐데 저는 마지막 6년을 후배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있으면서 같이 데스크로부터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잖아요. 그래서 후배들과 동료 의식이 생겼던 거 같아요."
 

5. 내 목소리는 줄이고 그들의 목소리는 높이고

데스크로부터 심층 인터뷰 코너를 맡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불감청 고소원의 심정이었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말은 못하던 차였다. <김종철의 여기>라는 타이틀로 한 달에 한 번 원고지 50매 안팎의 인터뷰 기사를 썼다. 이름을 알 만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주류보다는 비주류, 높은 자리보다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 빛나는 자리보다는 어두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댓글이나 조회수 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다.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기사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기사도 있었다. 그렇지만 의미 없는 기사, 의미 없는 인물은 없었다.
 
"목소리가 약한 분들, 마이크가 없는 분들한테 마이크를 쥐어드리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굳이 제가 안 만나도 자기들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 그런 분들보다는 자기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분들,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 글은 목표가 분명했다. 취재원과 공감하는 것, 그 공감의 폭을 넓히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다. 답변 내용 가운데 의문이 남거나 사실관계에서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며 추궁하듯 '사실'을 따지는 모습은 찾기 쉽지 않다. 이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담을 수는 없었을까, 같은 편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이 지나친 것은 아닌가, 격려가 아니라 비판이 필요한 대목에서도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들 때도 적지 않았다.

"저도 이게 제 글의 한계이자 약점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일단 그 사람의 철학, 됨됨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했던 거죠. 그러니 인터뷰 과정 자체가 편하고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모두 편안하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인물 인터뷰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게 아닌가 싶어요. 본인들이 싫어할 질문도 하긴 했어요.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 부족했는지는 모르지요. 그렇지만 알면서 저 사람이 싫어할 질문이니 빼놓고 간다 이런 건 없었어요."

기자들은 비판이라는 말을 신주단지 모시 듯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비판이 언론의 본령이라고 믿는 것은 이 사람도 예외가 아닐 텐데 '지적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취재원에게 충고하거나 조언하지 않는다. 평가하거나 판단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고집스럽다. 세상사가 그리 쉽게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 기꺼이 '당신이 옳다'는 응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우리 편이니 옳다'고 들릴 때도 가끔 있긴 했다.

직책이 있는 사람은 직책으로 부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들뻘인 대학생에게 '선생님'이라고 쓴다. '누구누구 씨' 정도면 적당할 듯한 사람에게도 '선생님'이란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그 사람들에게 배울 게 있고 실제로 배운 게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에서 김종철의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묻는 사람의 목소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답하는 인터뷰이의 목소리와 모습을 크고 환하게 보여준다. 인터뷰이와 자신과의 개인적 인연을 들먹이지 않는다. 좋은 문장에 대한 욕심이 없을 리 없는데 그런 욕심도 싹 걷어내고 쓴다. 술술 읽힐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문장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고른 인물들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거칠고 막무가내이고 때로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이 사람 글을 통해 인간적이고 따스하고 넉넉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김종철의 힘이다. 인터뷰 기사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글을 쓰기란 더욱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오래 살아남을 글을 썼다. 자신을 지우려 애쓴 덕이다.

퇴임 즈음해서 연재했던 인터뷰 기사를 묶어 <각별한 당신>이라는 책을 냈다. 책을 낸 사실을 페이스북에도 알리고 북 토크쇼도 하면서 홍보에 애를 쓴다.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출판사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서울 통의동에 있는 한 책방에서 열린 첫 번째 북토크쇼에는 20명의 인터뷰이 가운데 12명이 참석했다. 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인터뷰 한 번 했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저자의 북 토크쇼에 참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한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아니고 사례비를 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6.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어야죠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은 인권운동가 박래군이다. 그 인터뷰 기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요즘 기준으로는 아직 젊은데 왜 은퇴하려고 해요? (김종철)
"우리 사회도 혁신과 물갈이가 필요하거든요. 나름 시대정신을 업그레이드 해왔지만 변화를 못 쫓아가는 거 같아요. 우리 세대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 중심을 (다음 세대로) 옮겨줘야 해요." (박래군)

공감하면서도, 열악한 운동 현실이 떠올라 그의 꿈 실현에 선뜻 손들어주지 못했다. 이달 말 정년을 앞두고, '래군 형'에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고잔역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김종철의 여기'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물러난다는 것을 '이달 말 정년을 앞두고'라는 단 아홉 자로 독자에게 알렸다. 박래군의 입을 빌려 자신이 왜 물러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5년 넘게 해오던 일을 이렇게 마무리하다니 다소 황당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정리하는 게 이 사람 답기도 했다.

정년을 맞았지만 본인이 원했다면 더 일할 수 있고 회사에서도 그것을 권했다. 독자들 반응이 좋았던 인터뷰 코너만 맡아달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할 만큼 했고 이제는 떠날 때라는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 사람에게 기자로서 더 일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러고 싶지 않단다. 굳이 현직을 떠나는 이유를 길게 설명했는데 짧게 줄이면 그렇게 좋은 자리를 나 혼자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제가 어떻게 보면 빛이 나는 역할을 했잖아요. 제 이름을 걸고, 큰 지면을 할애 받아서 기사를 썼으니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였죠.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제가 계속 하는 것은 너무 욕심이 될 거 같더라구요. 제가 자리를 비워줘야지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더 능력이 있는 후배들에게 기회가 가지 않겠습니까."

1980년대 말 언론계에 들어온 자신의 전성기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이었다며 바뀐 세상에서는 바뀐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언론계의 문제는 지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해결할 몫이라고 했다.

"물론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이 있죠. 이걸 지금 친구들에게 '너희들 이러면 안 돼, 이렇게 해야 돼' 혹은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라고 이야기한다고 '그게 맞습니다'라고 후배들이 따라올 거 같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거 자체도 옳지 않다고 봐요. 지금 저나 제 세대 역할은 힘들어 하는 후배들이 길게 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조선일보 김대중 전 주필 같은 경우는 언론계에 60년 가깝게 있지 않습니까. 논조에 대한 찬반은 있겠지만 그런 경험을 살려서 계속 언론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좋은 거 아닐까요?

답이 나오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그 부분은…"

-아… 예

"그분은 이미 무대에서 진작에 퇴장했어야 될 인물 아닌가… 퇴장해줘야지, 무대가 비어야지 다른 사람이 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똑 같은 사람이 수십 년째 하고 있다는 게 우선 신선하지 않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져요…. 지금 시대는 엄청 앞서 있고 한때 역사의 무대에 섰던 사람들이 이미 다 내려가 있는데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 분들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고 봐요"
 

7. 일만큼 개인의 삶도 중요하죠

생사의 기로에 선 경험이 있다. 2007년 건강 검진에서 췌장 쪽에 안 좋은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40대 중반이었다. 기자로서 한창 일할 때였고 일로나 조직에서나 정점을 향해 치닫던 시기였다. 중학생,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대학생만 되어도 좋을 텐데 싶었다.

"제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당사자가 힘들어 할 거 같아서 면회를 갈 때도 차 안에서 미리 실컷 울고 얼굴 볼 때는 밝은 모습 보이고 그랬는데 정작 본인은 굉장히 담담하더라구요. 퇴원해서는 제 손이 잘 닿지 않는 창틀 같은 거 닦아 놓고 그랬는데 자기 없으면 이런 데 청소를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동안 잘 살았고 언젠가는 가야 되는데 그냥 담담하다 그러더라구요. 남편이지만 참 희한한 사람이다 생각했습니다." 정연 / 김종철 부인

희소한 암이어서 수술 이후에 의사들도 어떻게 치료를 해야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본인이 직접 외국 논문들을 뒤져가며 공부를 했다.

"수술을 받은 후에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항암 치료는 받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어요. 재발할 수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때부터 제 몸에 대해 처음으로 신경을 썼죠. 술도 끊고 먹는 것도 신경을 써서 텃밭에서 일종의 유기농법으로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고요. 그때 논설위원으로 일할 때인데 외부 활동도 줄이고…."

김종철 그사람 / 주말텃밭 첫해 고구마캐기

그때부터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일에 밀려 뒷전이었던 가정도 챙기기 시작했다. 요리와 청소 같은 가사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건강을 회복한 뒤 그 바쁜 정치부장 보직을 맡았을 때도 일과 삶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했다.

"기자들은 일에 치여서 자신의 일상이나 가족 같은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을 놓치기 쉽잖아요. 건강을 해치기도 쉽고…. 김종철 선배가 췌장이 안 좋아서 엄청 고생을 하셨는데 그 때문인지 기자라고 하는 틀에 갇히기 보다는 자기 삶과 일을 균형감 있게 가져가려고 노력하시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저 사람은 기자다 뭐다 이전에 일도 열심히 하지만 자기 삶도 잘 돌보는 건강한 사람이다 이런 이미지를 주는 거 같아요." 이주현/ 한겨레 이슈부문장

퇴직할 때 후배들이 <여기, 김종철>이라는 책을 만들어 줬다. 세상에 단 한 권인 책이다. 28명의 후배들이 이 사람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제대로 된 인터뷰까지 담겼는데 떠나는 선배에 대한 덕담인 것을 감안하고 봐도 그 내용이 사뭇 감동적이다. 자세를 고쳐 앉게 하던 기품 있는 선배, 자신의 결혼 문제도 상의하던 따뜻한 선배로 기억된다. 이 사람 때문에 한겨레에 들어오고 싶었고, 이 사람 때문에 특정 부서를 지망했다는 사람, 20년이 넘는 언론사 생활 중에 가장 아쉬운 일은 이 사람과 한 번도 같은 부서에서 일하지 못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다. 조직의 기둥과 모범을 넘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추앙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후배들이 만들어 준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

8. 언론의 '타락'은 자업자득

30여 년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면서 대기업 임원 연봉에도 못 미치는 퇴직금을 받을 때 내 반평생의 대가가 이것뿐인가 싶었다. 그래도 언론이 기세등등했던 시기에 기자 생활을 하면서 기득권으로 살았다고 생각한다.

"큰 틀에서 보면 저도 가진 계층에 속하지요. 봉급 수준을 떠나서 우리 사회를 움직여가는 집단 중에 언론이 들어가는데 제가 몸담았던 매체도 수백 명이 일하는 기성 언론이었죠…. 예전에 선배들이 기자가 등 따뜻하고 배 부르면 안 된다, 왜냐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인데 어느 순간 한국의 기성 언론들이 한국 사회 발전과 함께 기득권층에 속하게 된 거죠. 저 스스로 한국 사회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들어가는 기득권층이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서 그러니 좀 더 낮은 쪽의 목소리, 낮은 삶의 모습을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기자 생활을 했죠."

이 사람이 언론계에 입문했던 1980년대 말, 기자라는 직업은 꽤 자랑스러운 직업이었다. 기자들 급여와 복지는 대기업 못지않았고 자부심은 그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이 사람이 몸 담은 신문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가장 눈에 띄는 과실이었고 그 이름만으로 빛나는 곳이었다. 지난 30년 사이 언론의 위상은 급전직하했다. 산업으로서 언론이 정점을 지난 지 한참 됐고 기레기라는 멸칭이 일상화될 만큼 사회적 평판 또한 추락했다. 이 사람은 지난 30년의 언론 변화를 '타락'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외부 요인도 있지만 자업자득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념을 떠나서 언론사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 위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역할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언론이 스스로 플레이어가 돼서 정치적으로, 정략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거 같아요…. 자신들이 권력의 주체인 양, 혹은 권력을 만들겠다는 자세를 보이는데 이게 참으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의 주요 기능인 공론 형성이 너무 자의적이고 정략적인 게 가장 큰 문젭니다."

이 사람의 비판이 주로 보수 언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는데 진보 매체라고 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던 것은 아니다. '독자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라는 말에는 뚜렷한 방향과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친정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담겨 있었다. 훌훌 털고 일어서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이다.

김종철 전 한겨레신문 기자(왼쪽)

만절(晩節)이라는 말을 했다. 나이 들어서도 절개를 잃지 않고 더욱 소중히 여긴다는 뜻의 말을 가슴 속에 새긴다. 어디 기웃거리지 않고 만년에 자신의 소신을 버리는 일 없이 당당하게 나이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이 사람이 존경하는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가 많이 했던 말인데 그 말을 나이 육십이 되고 새로운 인생을 모색하면서 머릿속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기자가 돈 앞에서 무릎걸음을 하고 오늘 기사 쓰고 내일 권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 이제는 이야기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이다.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때가 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이 사람이 만절이라는 표현을 쓰니 그 고루한 말이 새롭게 들렸다.

"젊었을 때는 잘못을 해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런 기회가 좀체 없는 거 같아요…. 나이 들어서는 욕심을 안 내는 게 좋겠다 이 생각을 많이 하죠. 그래서 그 말을 마음 속에 새겨두려고 합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엉뚱하게 반국가단체라는 딱지를 안고 사는 한통련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취재해서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퇴직 후에도 사람들의 눈길이 덜 가는 곳에 관심을 둘 모양이다.

*이 인터뷰는 지난 8월 2일 SBS 목동 본사에서 진행되었다.

※ 김종철 전 기자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6일) 밤 9시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