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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 저수지도 수도꼭지도 말랐다…멕시코 강타한 가뭄

지구온난화, 저수지도 수도꼭지도 말랐다…멕시코 강타한 가뭄
메마르고 황량한 풀밭에 식당 건물 한 채가 서 있습니다.

멕시코 북부 누에보레온주 산티아고에 있는 이 식당의 이름은 '엘플로탄테'(El Flotante).

'수상(水上) 식당'이라는 뜻입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저수지를 찾은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들어가 물 위에서 식사를 즐기던 이곳은 메마른 땅 위에 방치된 채 찾는 이 없는 폐건물로 변했습니다.

물 한 방울 없는 부엌 개수대에는 설거지할 그릇들이 그대로 옆에 쌓였습니다.

저수지 수상식당 (사진=연합뉴스)

멕시코 북부 몬테레이 일대에 극심한 '물 위기'가 닥쳤습니다.

기후변화가 부추긴 가뭄과 물 수요 급증 속에 저수지가 말랐고, 물 공급이 줄자 당국은 단수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3월 시작된 순환 단수는 점점 심각해진 끝에 6월부터는 오전 몇 시간만 수돗물이 나옵니다.

물이 나오는 시간에도 수압이 약해 졸졸 나오거나, 아예 며칠씩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일도 흔합니다.

수돗물 나오지 않는 멕시코 북부 가정집 (사진=연합뉴스)

편하게 수도꼭지만 열면 콸콸 쏟아지던 물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은 이제 발품을 팔아야 하는 실정입니다.

지자체가 곳곳에 설치한 대형 물탱크나 '피파'(pipa)라고 부르는 급수 트럭에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가서 잔뜩 물을 받아오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곳곳에 있는 급수시설엔 어김없이 플라스틱 물통을 갖다 대고 물을 받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급수 트럭이 자주 찾지 않는 지역은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물을 받기도 합니다.

양동이부터 빈 세제 통까지 10개가 넘는 통을 차에 싣고 와서 옅은 갈색빛이 도는 급수 트럭의 물을 받은 한 주민은 "주로 화장실 변기 내리는 데 쓴다. (그래봐야) 2∼3일쯤 간다"고 했습니다.

먹는 물은 사야 하는데 수요가 늘다 보니 물값도 1.5배쯤 올랐고, 그나마 대형 마트에선 사재기를 막기 위해 1인당 구매 수량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급수시설 수질이 낮아지면 씻을 물도 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주민들은 말 그대로 처음 닥친 '물 귀한 삶'에 힘겹게 적응해나가고 있습니다.

아포다카 주민 알바로 타호나르(63)는 "새벽 4시부터 9시까지만 물이 나와서 물 나오는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물을 받는다"며 "세차는 꿈도 못 꾸고 세탁 횟수도 줄였다"고 말했습니다.

남편과 물을 받으러 온 마르셀라 카란사(40)는 "개 목욕은 거의 못 시키고 있다"며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물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스트레스"라고 토로했습니다.

급수트럭에서 물 받는 멕시코 주민 (사진=연합뉴스)

물 위기는 서민들에게 더 가혹합니다.

자체 급수시설이 잘 갖춰진 고급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물을 쓸 수 있고,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도 여유가 있으면 물탱크와 양수기 등을 설치하지만, 서민들은 꼼짝없이 야속한 수도꼭지를 원망해야 합니다.

기반시설이 열악한 극빈국 오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에보레온주 주도 몬테레이와 위성도시들을 합친 몬테레이 대도시권은 인구 500만여 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권입니다.

미국 국경과 가깝기 때문에 기아차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 공장도 많아 소득 수준이 높은 산업도시이며, 한인들도 많이 거주합니다.

몬테레이 일대에 공급되는 물의 60%는 댐 저수지 3곳에서 오는데, 이중 세로프리에토 저수지는 지난달 이미 바닥났고, 라보카 저수율도 한 자릿수입니다.

나머지 엘쿠치요 댐 저수율은 40% 수준입니다.

현지시간 2일, 산티아고의 라보카 댐은 한눈에도 황량해 보입니다.

두 곳의 수상 식당은 모두 육지 위에 올라온 채 영업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때 물 위에 떠 있었을 배 몇 척도 모래밭이나 풀밭에 방치됐습니다.

흙바닥에 깔린 조개껍데기가 이곳이 한때 물 속이었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나마 수분이 남아있는 곳의 풀은 푸른색이지만, 비 오지 않는 날이 이어지자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말라갑니다.

얼마 남지 않은 물에는 오리 떼가 모여 있습니다.

헤엄칠 물도, 잡을 먹이도 줄어든 오리들은 사람이 다가가자 먹이를 기대하며 몰려들어 꽥꽥댔습니다.

주말이면 행락객들이 모여 보트도 타던 유원지였지만, 물이 마른 저수지를 찾는 이들은 없습니다.

멕시코 저수지 (사진=연합뉴스)

입구에서 상점을 하는 로시오 실바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뒤져 저수지에 물이 많고 연휴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2∼3년 전 사진들을 보여줬습니다.

실바는 "지난해 몇 개월 사이에 물이 빠르게 말라갔다"며 "35년째 이곳에 살고 예전에도 가뭄은 있었지만 이렇게 물이 마른 건 처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몬테레이의 저수지가 바닥까지 말라버리고, 주민들이 유례없는 물 위기를 겪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유례없는 가뭄입니다.

지난 7월 누에보레온주에 내린 비는 예년의 10%에 불과하다고 당국은 밝혔습니다.

이미 6년 전부터 강수량은 예년 평균을 밑돌았습니다.

이번 가뭄이 인위적인 기후변화의 산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기후변화로 강수 패턴에 변화가 오고 가뭄 등 극단적인 기상 재난이 증가한다는 점에는 여러 과학자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멕시코 지역 가뭄과 연관이 있는 기상현상인 '라니냐'(서태평양 해수 온도 상승으로 동태평양 수온이 낮아지는 현상)도 기후변화를 만나 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아울러 지구 온난화로 저수지 물이 더 빨리 증발한 것도 물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사무엘 가르시아 누에보레온 주지사는 최근 "기후변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기 바로 그 결과가 있다. 이건 명백한 기후변화의 결과"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기후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당국도 책임을 피할 순 없습니다.

가뭄과 물 위기에 특히 취약한 지역임에도 지속가능한 물 공급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몬테레이 일대에 기업체들이 찾아오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누에보레온주 인구는 2000년과 2020년 사이 50% 급증했습니다.

인구가 늘면서 물 수요도 45%(2000∼2013년)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공급량은 12% 증가하는 데 그쳤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습니다.

주민들에 물 공급하는 급수 트럭 (사진=연합뉴스)

주민들은 가정용수 공급이 제한되는 동안에도 하이네켄, 코카콜라 등 글로벌 음료 기업들은 계속 공장을 돌리고 있다며 허가를 취소하라고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물 위기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까지 동원해 물을 수송하는 한편 새 댐과 송수로 건설 계획도 밝혔습니다.

그러나 단기간에 물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해법은 아니다 보니 주민들은 8월 무렵 시작되는 우기에 큰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후변화로 허리케인은 더 강력해졌고, 오랜 가뭄으로 딱딱해진 지반은 물난리에 더 취약합니다.

가뭄이라는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허리케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입니다.

현지주민 리카르도 마르티네스는 "허리케인 시즌이 끝나가는 9∼10월이 마지막 기회"라며 "그때도 큰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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