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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임금을 동결시켜라!??

[취재파일]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임금을 동결시켜라!??

연일 '대기업 임금 인상' 때리기

지난 6월 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총 회장단과의 간담회에서 일부 IT 기업과 대기업 중심으로 나타나는 임금 인상 경향을 지적하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상위 기업 중심으로 성과 보상 또는 인재 확보라는 명분으로 경쟁적으로 높은 임금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과도한 임금 인상은 고물가 상황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더욱 확대해 근로 취약계층의 상대적 박탈감도 키운다. 이건 결국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


불과 보름 뒤인 지난달 13일에도 추 부총리는 대한상의 포럼에서 진행한 강연에서 임금인상을 자제할 것을 거듭 당부했습니다.
 

"물가가 전방위적으로 오르고 있어 인건비 상승까지 맞물리면서 인플레이션 악순환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이처럼, 경제 수장이 직접 나서 임금 인상을 경계하는 이유는 '인플레이션 악순환'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물가가 많이 올랐는데 여기에 임금 인상까지 이뤄지면, 인상분은 비용으로 전가돼 결과적으로 추가적인 물가 상승을 불러올 것을 우려하는 겁니다. 이에 부응하듯 지난달 25일,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물가-임금 관계 점검>이라는 제목의 자료를 내고 아래와 같이 둘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했습니다.
 

"최근과 같이 물가 오름세가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는 기대인플레이션이 불안해질 경우 물가-임금 간 상호작용이 강화되면서 고물가 상황이 고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선제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정책 대응을 통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의 확산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급 충격으로 생긴 '트라우마'

사실, 높아진 임금이 물가 상승에 영향을 미치는 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총수요가 증가합니다. 늘어난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기업들은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원자재 가격은 물론 노동자 임금도 오르게 마련입니다. 생산 요소의 가격이 올랐으니 기업은 당연히 물건 값을 올립니다.

물가 상승 수준이 너무 높아질 경우에는 정부는 금리를 올리고 지출을 줄이며 긴축에 나섭니다. 긴축 조치는 경제 성장을 위축시켜 먼저 수요가 줄고 생산 활동도 잇따라 줄면서 자연스럽게 임금을 비롯한 생산 요소의 가치도 떨어집니다. 이는 물가 안정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물가와 실업률은 역방향으로 움직이는데(필립스 곡선), 경제 당국은 둘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때로는 물가를, 때로는 실업률을 선택하며 국가 살림을 꾸려왔습니다.

필립스 곡선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성장은 멈추고 실업률은 높아졌지만, 물가는 오히려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1973년, 1979년)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물가가 기록적으로 치솟았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면서 생산이 위축됐고 경기는 침체돼 실업자 수는 늘어났습니다. 필립스 곡선에 따르면, 경기가 침체 국면에 들어서 생산은 줄고 실업이 늘었다면 물가도 서서히 안정이 돼야합니다만, 오일 쇼크의 여파로 유가가 고공행진하면서 물가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배럴당 4달러 수준이던 유가가 14.5달러까지 상승했던 1차 오일쇼크 당시 미국의 실업률은 1.5% 포인트 가까이 높아졌는데, 소비자물가지수 역시 3%대에서 12%대로 치솟았습니다. 유가가 배럴당 30달러를 처음으로 넘어섰던 2차 오일쇼크 당시에도 실업률이 약 2% 포인트나 상승했는데, 같은 기간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9%대에서 14%대로 치솟았습니다.(실업률과 소비자물가지수는 상승폭을 잘 보여주기 위해 월별 수치를 인용했습니다.)

1970~80년 대 필립스 곡선 움직임(연도별)

필립스 곡선이 길을 잃고 불황(경기 침체‧실업 증가)과 물가 상승이 함께 찾아오는 스태그플레이션은 반세기 가까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추 부총리가 임금 인상을 공개적으로 경계하는 것도 상당 부분은 이 트라우마 때문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연료 및 곡물 시장에서의 공급 충격은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과 닮아 있는데,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에 기름이라도 붓는다면 그 충격은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0s vs 2020s : 임금이 아니라 이윤

지금까지 일반론이었다면, 이제는 각론에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위기와 지금의 위기가 정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고 우리는 이 차이들에 얼마만큼의 가중치를 더해 지금의 상황을 분석해야하는 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5월, 이자벨 슈나벨 유럽중앙은행, ECB의 이사는 <The Globalization of Inflation> 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합니다. 이 발표 내용에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지금의 위기에 앞서 팬데믹 위기를 겪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는 규모로 각국 정부가 시장에 돈을 풀어놨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미국 연준은 지난 2020년 3월 미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을 "필요한 만큼 매입하겠다"라며 무제한 양적 완화를 선언했고,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만들었던 기업어음매입기구, CPFF를 부활시켜 코로나19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재무부, 은행, 기업 등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주요 주체들에게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실탄을 재정 적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제공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탓에 결과적으로 가계는 상당량의 초과 저축액을 쌓아둘 수 있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처분가능소득 상승 추이

이처럼 무제한적 양적 완화와 처분 가능 소득의 막대한 축적은 지금의 위기가 1970년대 위기와 가장 다른 지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자벨 슈나벨 이사가 이런 차이에서 유발되는 지금 시대의 위기 특징을 굉장히 잘 포착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자벨 슈나벨에 따르면, 과도하게 쌓인 소득은 엄청난 규모의 수요로 이어지며 이는 기업이 주도하는 물가 상승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초과 저축 -> (코로나로 억눌린) 수요 자극 -> 기업의 가격 전가력(Pricing Power) 향상

"Strict lockdowns across virtually all countries allowed households around the world to accumulate huge amounts of involuntary excess savings.
...
Although excess savings are distributed unequally both across and within economies, they have visibly boosted corporate pricing power by generating an environment in which consumers worldwide are both more willing and more able to tolerate price increases.
...
There is abundant empirical evidence suggesting that the pass-through of input costs is generally weak in the face of adverse supply shocks, such as rising energy costs, and strong in response to a favourable demand shock. So, for firms to be able to raise their prices in the way they are doing it today, they need to be operating in a market environment in which demand is strong and hence pricing power is high." 

출처 : <The Globalization of Inflation>


이를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이자벨 슈나벨은 인플레이션을 측정하는 지표로 쓰이는 GDP 디플레이터에서 세금과 노동자 임금, 기업 이윤이 각각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코로나가 시작하기 전인 2019년 4분기부터 코로나 유행이 한창이던 2020년 4분기까지는 임금이 디플레이터 변화에 크게 기여하며 많은 비중을 차지고 하고 있지만, 2021년 1분기부터는 기업 이윤의 비중이 늘기 시작해 2021년 3분기와 4분기에 이르러서는 기업 이윤이 물가 상승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인플레이션 위기 국면에서 가장 큰 이득을 취하고 있던 주체는 국가(세금)도 노동자(임금)도 아니라 기업(이윤)이었으며,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기업이 물가 상승을 주도하고 있던 것입니다.

유럽 GDP 디플레이터 분석

기업 이윤에 대한 고민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고임금은 고물가로 이어질 개연성이 충분히 있지만 고임금만이 고물가를 초래하는 건 아닙니다. 유럽의 연구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팬데믹 위기와 무제한적 양적 완화 조치 이후 찾아온 지금의 인플레이션 위기에서는 비용 상승 압박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며 기업이 고물가 흐름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1970년대 위기와 지금의 위기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더라도 가중치를 둬야할 차이점은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최근 우리나라의 기록적인 물가 상승에도 기업 이윤은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우리나라의 물가-임금 관계 점검>이란 제목의 자료를 냈던 한국은행 담당팀에 물가와 이윤의 관계도 분석한 적이 있는지, 분석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를 문의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이윤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이나 보고서는 특별히 찾지 못했다."는 내용의 답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행에서 공개하는 국민계정 자료에는 임금과 이윤에 대한 명목 수치만 제공돼 추가적인 자료 공개와 분석 없이는 기자 스스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6.3%나 급등했습니다. 이는 IMF 위기로 환율이 치솟았던 1998년 11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입니다. 물가 상승 압력이 한국 경제를 그 어느때보다 강력하게 짓누르고 있는 지금, 물가 상승의 주범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지금의 위기 국면을 잘 돌파해낼 수 있을까요?

유럽의 연구처럼 우리 역시 기업이 물가 상승을 주도했음에도 기업이 물가 상승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분석도 대책도 내놓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임금 인상은 연일 경계하면서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며 기업의 세금 부담은 줄여주고 경제 사범으로 처벌받은 총수들을 복권시키는 일이 정말 해법이 될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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