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미운 이미지로 지지층 결집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찍힌 좋은 사진도 많건만, 유독 미운 모습만 부각시킨다. 그걸 내놓는 미디어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냥감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뒤이어 해당 미디어와 같은 성향을 가진 지지층들이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를 통해 상대 정치인의 미운 사진을 부지런히 퍼 나른다.
이러니 요즘은 공정성을 담보할 미디어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사실 수많은 미디어들은 일찌감치 여론 선도라는 거창한 역할은 포기하고 여론 영합의 길을 선택했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훌륭한 의제로 존경받기보다는, 팬덤 정치에 편승해 여론에 영합하는 게 훨씬 손쉬운 생존 방법이란 걸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가끔 나오는 개별 미디어들의 신뢰성 조사도 알고 보면 아전인수인 경우가 많다. 조사 대상자에 어느 편이 많이 포함됐느냐에 따라, 가장 편향적인 미디어가 어이없게도 공정성과 신뢰도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쨌든, 미디어 입장에서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의 미운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여론 영합에 더할 수 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 미운 모습은 반대편의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을 대동단결하게 하는 동시에, 기존의 정치적 신념을 강화하는 촉진제로 작용한다.
여론 시장의 상황이 이러니 균형 잡힌 중도적 사고나, 상황에 대한 숙고는 기회주의로 치부된다. 정치 지망생 혹은 공무원이라면 누구 편이냐를 확실히 해야 ‘운빨’에 따른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다양한 편향성은 민주주의의 요소
문제는 극단성이다. 정치적 양극화의 대명사인 극단적 팬덤은 소통과 조율을 불가능하게 한다. 소통과 조율이 없는 정치는 동맥경화로 죽어가는 몸과 같다. 민주주의가 좀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다.
단절과 외로움이 팬덤의 근저
거기서 좌절을 느낀 사람들이 아바타를 찾았다.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힘 있는 정치인이 그들의 아바타가 됐다. 나의 고립을 풀어줄 아바타, 세상의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줄 아바타는 나 자신의 분신이기에, 나를 사랑하듯 그 정치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 정치인의 판단이 포퓰리즘일지라도, 비현실적일지라도, 정책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내 분신이기에 용서한다. 그 결과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책 성패에 따라 이뤄져야 할 정치적 지지행태가 사라지고, 팬덤에 따른 무조건적 지지가 자리를 굳혔다.
팬덤의 특징은 다른 목소리를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토대인 다양성을 해친다. 다양한 목소리가 없는 사회, 있어도 숨죽이는 사회는 더 이상 민주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수없는 외침이지만 정치가 바뀌고 국회가 바뀌어야 한다. 극단적인 팬심이 간혹 스토커가 돼서 자신이 그토록 따르던 스타를 해치는 사례처럼, 팬덤이 자신을 덮칠 수도 있다는 걸 정치인들도 깨달아야 한다.
정치인의 본성이 표에 의해 움직이기에,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팔로워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마냥 구조적 모순을 탓하고 사회를 탓하다 보면 수렁은 더욱 깊어진다. 정치리더와 팔로워 모두 이제는 서로 다른 견해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포용하는 길로, 터벅터벅 지친 걸음을 옮겨야 할 때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이다.
고철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