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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창작 뮤지컬'인데 왜 자꾸 외국 얘기를 하는 걸까

창작 뮤지컬과 라이선스 뮤지컬 사이

[취재파일] '창작 뮤지컬'인데 왜 자꾸 외국 얘기를 하는 걸까
웃는 남자. The Man Who laughs. 요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천 석을 날마다 가득 채우는 뮤지컬 제목입니다. 배경은 17세기 영국, 원작은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귀족들의 놀잇감으로 어린 시절 기이하게 찢긴 입을 갖게 된 그웬플린이라는 남자입니다. 이 역할은 '배트맨'의 조커 캐릭터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 배우들이 한국어로 공연하지만, 대본 음악 연출은 외국인 창작진이 맡았습니다.

이 뮤지컬은 어느 나라 작품일까요? 프랑스, 혹은 영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닙니다. 한국의 '창작 뮤지컬'입니다. 모든 공연이 다 '창작'이지, 창작 아닌 것이 어디 있나 싶지만, 여기서 '창작'이라는 말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창작했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창작 뮤지컬'과 대비되는 게 '라이선스 뮤지컬'입니다. 외국 작품 판권을 사서 한국어로 공연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나 '아이다' '위키드' '빌리 엘리어트' 같은 유명 작품들이 다 한국어 라이선스로 공연됐습니다.

창작 뮤지컬, 라이선스 뮤지컬 외에 뮤지컬 내한공연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라이언 킹' 월드투어팀이 한국에 와서 영어로 공연하는 경우죠. 내한공연팀이 선보이는 공연을 한국에서는 원어로 공연한다는 의미로 '오리지널(original)'이라고 많이 부르는데요, 사실 '오리지널'은 초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은 1986년 런던 초연 프로덕션을 뜻하고, 뮤지컬 '헤드윅'의 오리지널 캐스트, 즉 초연 당시 출연 배우는 존 카메론 미첼, 이런 식입니다.

'웃는 남자'에서 보듯, 요즘 창작뮤지컬은 얼핏 보기에는 라이선스 뮤지컬과 별 차이가 안 납니다. 배경이 외국이고 배역도 다 외국인 캐릭터입니다. 대극장 창작 뮤지컬의 경우 외국 소설이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경우가 많죠. 웃는 남자 뿐 아니라 마타 하리, 엑스칼리버, 도리안 그레이, 벤허, 프랑켄슈타인이 모두 대극장 창작 뮤지컬입니다.

소극장 창작 뮤지컬은 해외 유명인사, 특히 유명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많이 다룹니다.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파리넬리, 프리다, 고흐, 니진스키, 차이콥스키, 랭보, 디아길레프, 메리 셀리, 살리에르, 셰익스피어,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수많은 예술가들이 창작 뮤지컬의 소재가 됐고, 지금도 계속 신작이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에 저도 의문을 가졌던 현상인데요, 이를 SBS8뉴스 주말 심층코너 '더 스페셜리스트' 에서 다뤄봤습니다. ▶ [더스페셜리스트] 메이드 인 코리아-이게 창작 뮤지컬이라고? 더 스페셜리스트는 다른 기사보다는 분량이 길지만 그래도 못 다한 얘기들이 많아서, 뮤지컬 박병성 평론가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 봤습니다.

박병성 뮤지컬 평론가

Q. 창작 뮤지컬과 라이선스 뮤지컬의 개념 정리?
A. 일단 한국 사람들이 한국 시장에서 만든 뮤지컬을 '창작 뮤지컬'로 볼 수 있을 텐데, 뮤지컬 업계에서는 한국 제작사가 만들어서 지식재산권을 갖고 있는 뮤지컬을 '창작 뮤지컬'이라고 한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외국 뮤지컬의 판권을 해외에서 들여와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Q. 그냥 '한국 뮤지컬'이 아니라 '창작 뮤지컬'로 부르는 이유는?
A. 사실 '창작 뮤지컬'이라는 용어 자체에 모순이 있기는 하다. 모든 공연이 다 '창작' 아닌가. 하지만 뮤지컬에선 오래 전부터 정착된 개념이다. 문학에선 '한국 문학/외국 문학'으로 구분하는데, 뮤지컬에서는 '한국 뮤지컬' 대신 '창작 뮤지컬'로 부르는 이유는, '라이선스 뮤지컬'의 존재 때문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한국에서 공연하는데, 원작이 외국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 뮤지컬에서 배제해야 할까? 특히 라이선스 뮤지컬 중에서도 대본과 음악만 '스몰 라이선스'로 들여오고 연출 무대 의상 등을 한국에서 새로 창작하는 '넌-레플리카(Non-replica)' 프로덕션일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1990년대까지는 창작 뮤지컬/번역 뮤지컬이라고 구분했는데, 당시엔 제대로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외국 작품을 공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라이선스 뮤지컬' 개념이 정착됐다.

(*캣츠, 레미제라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같은 유명 뮤지컬들은 정식 라이선스 공연이 이뤄지기 전인 80~90년대에 이미 한국에서 공연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뮤지컬 시장이 극히 작아 해외에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지식재산권 개념이 지금처럼 철저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한국뮤지컬어워즈는 '창작 뮤지컬'과 '라이선스 뮤지컬'을 분류해 시상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뮤지컬'은 창작이든 라이선스이든 한국 시장에서 한국어로 올라가는 뮤지컬을 폭넓게 지칭하는 말이 됩니다.

*영화계에선 최근 외국인 감독 한국인 배우가 찍은 '브로커'나 '배니싱: 미제 사건'이 나오면서 영화의 '국적'이 화두가 됐는데, 라이선스 뮤지컬 공연으로 글로벌 협업을 일찍 시작한 뮤지컬계에선 이미 10여 년 전에 외국인 창작진이 참여한 창작뮤지컬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엔 외국인 작가와 연출가, 음악가가 만든 뮤지컬이 과연 '창작 뮤지컬'이냐 논란도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 제작사가 외국인 창작진을 기용해 만든 작품도 '창작 뮤지컬'로 봅니다. 제작사와 지식재산권을 기준으로 보는 겁니다. 한국 제작사가 해외 제작진과 해외에서 먼저 개발해 공연하는 작품, 혹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인데 한국 회사가 투자자로 참여하는 작품 등 글로벌 협업의 형태도 다양해서 '창작 뮤지컬'의 기준을 어디까지 봐야 할지, 점점 더 양상이 복잡해지는 추세입니다.


Q. 뮤지컬 제작사들이 대형 창작뮤지컬에 뛰어드는 이유는?
A 예전에는 라이센스 뮤지컬 위주로 대극장 공연이 펼쳐졌는데 이제 라이선스 뮤지컬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들어왔고, 새로 들여올 수 있는 작품들도 한계가 있다. 또 라이선스 뮤지컬은 해외 수출이나 부가 상품 같은 사업 확장에 제약이 많다. 그래서 초기투자 비용이나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창작 뮤지컬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온 것.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Q. 요즘 대형 창작 뮤지컬들은 얼핏 보면 라이선스 뮤지컬과 구분이 잘 안 되는데?
A. 2010년 이후부터 창작 뮤지컬 중에서도 서양을 배경으로 하는 대형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다. 대형 창작 뮤지컬들이 이전에도 있었지만, 라이선스 뮤지컬에 비하면 경쟁력 있는 작품들이 많지 않았다.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 선호도가 높다 보니, 창작 뮤지컬들도 라이선스 뮤지컬과 비슷한 느낌으로 만드는 거다. (*화려한 무대 연출과 의상, 이국적 분위기 등등) 또 해외 시장 진출을 목표로 삼다 보니 한국적 소재보다는 해외에서도 잘 알려진 외국 이야기를 갖고 만드는 경우도 많다.

Q. 뮤지컬 장르가 '판타지'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보니, 잘 아는 한국 얘기보다는 낯선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게 좋아서 그런 측면도 있지 않을까.
A. 맞다. 앞서 얘기했듯 산업적, 마케팅적 이유도 있지만, 뮤지컬 자체의 장르적 특성도 이유가 된다.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가 노래와 춤을 통해 표현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판타지적 요소가 많다. 그런 특성 때문에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실적으로 디테일하게 그리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도 뮤지컬은 캣츠나 라이온 킹처럼 동물 얘기를 하거나, 미래나 옛날로 가거나, 스파이더맨이나 위키드처럼 SF와 판타지를 종종 다룬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도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이미 고전이 됐지만 '렌트'도 그렇고, '넥스트 투 노멀' '디어 에반 핸슨' 같은 작품이 그런 경우다. 대극장보다는 소극장 작품들이 대개 동시대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려는 추세다.

Q. 그런데 한국에선 대극장이든 소극장이든 외국 소재가 굉장히 많은 느낌이다.
A 소극장 창작 뮤지컬에선 원래는 한국적 소재를 많이 다뤘다. '빨래'나 '김종욱 찾기' 같은 작품들이 있지 않나. 그런데 '빨래'가 2005년에 나왔으니 꽤 오래됐는데, 이후 빨래를 대체하거나, 빨래와 유사한 창작 뮤지컬들이 별로 많이 나오지 않았다. 요즘 소극장 창작 뮤지컬들은 외국 소재를 많이 다루는데, 외국 예술가 얘기를 한다거나, 남자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거나, 이런 추세가 강한 것 같다.

요즘 한국적 소재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기는 하다. '원소스 멀티유스'의 시대, 뮤지컬이 영화나 드라마 등 인접 장르로 확장되기도 하는데, 한국적 소재일 경우가 유리하다. 외국 배경에 외국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창작 뮤지컬'을 한국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는 힘드니까.

Q. 그러고 보니 창작 뮤지컬 '김종욱찾기'나 '형제는 용감했다' 같은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A. 맞다. 최근에는 창작 뮤지컬 '차미'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발표도 있었다.

Q. 작가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외국 배경을 택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라.
A. 맞다. 창작 뮤지컬 개발하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법정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배경이라면 아무래도 한국의 실제 법 환경에 부합해야 하고,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긴다.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도록 낯선 외국을 배경으로 삼는 거다.

Q. 창작 뮤지컬 '레드북' 도 그런 경우인 것 같다. 보수적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 자신의 연애 경험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여성 작가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간다. 사실 창작 뮤지컬이 꼭 한국 얘기만 하라는 법은 없고, 외국 얘기 하는 작품들 중에 좋은 것도 많다. 그렇지만, 동시대 한국 얘기를 하는 뮤지컬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A. 그 부분이 좀 아쉽기는 하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은 뮤지컬의 역할 중에 유희의 측면, 위로나 오락에 치중한 게 많았던 것 같은데, 함께 시대를 고민하는 작품도 나왔으면 좋겠다. 다만 뮤지컬은 개발에서 창작, 실제 공연에 이르기까지,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동시대 이야기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번 공연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진 작품으로 살아남아야 하니까.

Q. '빨래' 같은 뮤지컬을 보면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온 지 2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지금도 공감하는 관객이 있다는 얘기다. 중국어와 일본어 라이선스 공연도 했고.
A. 2005년에 만들어졌지만 실제 극 중 배경은 그 이전인데, 도시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보니까, 어떤 도시이든 발달하면 할수록 외곽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고, 이들의 설움이나 애환들은 마찬가지여서 시대가 지나도 이런 작품들은 공감을 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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