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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취준생 분투기…그리고 깨꽃이 되어 [북적북적]

실버 취준생 분투기…그리고 깨꽃이 되어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43: 실버 취준생 분투기…그리고 깨꽃이 되어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쓴다. 하나, 둘 작품을 완성하는 기쁨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봄을 지나 '여름'이라 함이 어색하지 않은 6월 중순입니다. 문득 돌아보면 시간, 그리고 세월만큼은 참 빠르다는 걸 절감하게 되네요. 2022년도 거진 절반이 지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20살, 30살, 40살, 50살… 이렇게 10년 단위 나이에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죠. 저도 그랬나 싶어 돌아보니 스무 살 때는 고3, 대학 진학이 맞물려 큰 감흥이 없었던 것 같고 서른에는 회사에선 아직 애송이 시절이라 정신없었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대사를 치러내느라 역시 휘리릭 지나갔습니다. 마흔은 어땠나 잘 기억나지 않고... 애써 외면했던 걸까요. 쉰, 그리고 예순, 그다음은 어떨까요. 스물부터 마흔까지 흘러온 시간을 반추해보면 역시나 훅 다가올 것 같습니다.  
 
이런 자잘한 저의 감상은, 이번 책과 당연하게도 관련 있습니다. 62세에 취업전선에 나서고 70세에 다다라 본격적인 글쓰기에 정진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1953년생. 할머니라 부름이 어색하지 않을 이순자 작가의 책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이번 주 북적북적이 고른 책입니다.   
 
작가는 <실버 취준생 분투기>라는 제목의 수필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2021년 매일신문의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됐던 글로, 조금 시차를 두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회자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별다른 경력이 없는 노년에 가까운 여성, 그 노동력이 필요한 곳은 이 사회 도처에 많지만 그들이 받는 대우나 노동 환경은 처참할 정도의 수준일 때가 많습니다. 경험하지 않고 세세히 알기 힘든데 그 고된 경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건 역시 글입니다. 글의 힘입니다.   
 
"이렇게 많은 능력이 사장된다는 게 안타깝다고 이력서를 손에 들고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 굿이다. 나도 안다, 이 마음이 너도나도 구직활동에 나선 초로의 구직자들의 '아직은 대접받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걸. 그걸 적당히 다루는 방법을 직원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혹시 청소나 단순 작업 같은 일도 하실 수 있겠느냐며 공손하게 물었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력이나 경력이 화려하면 채용이 어려우니 다시 작성하라는 말에 얼른 순응했다... '중학교 졸업' 한 줄로 마감한 이력서를 받아 든 직원이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에서 
 
"이제 내 나이 예순아홉. 내년이면 일흔이 된다. 늘그막에 먹고살려고 학력과 이력을 속인 내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결혼 후 시어른들을 모시고 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 한 번도 나 자신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그 벌을 60대 초반에 톡톡히 치렀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온갖 일 다 겪으면서 그 고초가 나의 몫이라 여겼다. 명절이면 100명의 손님을 치렀고, 시동생 결혼식 음식도 시할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집에서 300명 손님을 혼자 치렀다. 심지어 시외삼촌 상을 당했을 때도 그 집 딸과 며느리는 방 안에 앉아 울기만 해 그 많은 손님 수발을 혼자 드느라 상이 나던 날 쓰러졌다... 하다못해 친척들 돌, 백일, 약혼식, 결혼식까지. 시댁은 물론 시할머니의 친정, 시어머니의 친정 일까지 불려 다녔다. 그곳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내 인생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에서 

자격증 많고 고학력이라 오히려 단순 업무 저임금 일자리엔 적합하지 않다, 하여 이력서를 거짓으로 써 취직을 했으나 단순 노동과 청소 같은 육체노동을 감당하긴 쉽지 않고 며칠 만에 그만두니 그동안의 임금은 받지 못하고... 어린이집 주방에서 부실 급식을 강요받아 그만두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가 구조받고... 요양보호사 자격을 땄는데 남성 이용자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청년 취준생에 비하면 주목받지도, 큰 문제로 여겨지지도 않는 '실버 취준생'의 생생하다 못해 절절한 분투기는 담담하게 적혀 있지만 큰 울림을 줍니다. 최근 폐지 줍는 노인들에 주목해 그들의 동선을 GPS로 추적하고 산업 기여도를 수치화해보려 노력했던 한 인상적인 기사도 떠올랐습니다. 
 
이런 분투를 거쳐 작가는 비로소 글쓰기의 길에 들어섭니다. 2021년 문학상 당선은 작은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지병이 악화돼 작가는 세상을 떠납니다. 몇 달이 흘러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고 저는 이미 별세한 줄도 모르고 글을 읽었습니다. 작가의 노트북에 남아있던 유고를 모아 책으로 나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북적북적에서 읽게 되기까지의 사연입니다. 죽는 날까지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던 작가는, 그 시간이 비록 길진 않았지만 다짐대로 해냈고 결실을 맺었습니다. 어떤 픽션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더 극적입니다.  
 
누구나 작가를 할 수 있는 시대지만 그만큼 아무나 좋은 글을 쓰기는 힘듭니다. 나이 일흔에 세상을 등진 게 꼭 요절이라고만 할 순 없겠으나 작가의 삶으로 보면 더 오래 활동하셨으면.. 하고 아쉬운 마음이 짙어집니다. 저와는 정말 사소한 인연이겠으나 이순자 작가의 글만큼 기억할 수 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얘야, 이거 봐라. 깨가 지절로 피었다."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나이테 중앙에 들깨꽃이 피었다. 
"이게 똑 너 닮지 않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몰라도 조금 있으면 깨 송이 영글 텐디, 영글어 너처럼 고수불 텐디. 니도 고순 냄새 풍기고 가버릴 거지? 진정으로 말해보거래이." 
이사 온 지 겨우 반년인데 나한테 벌써 저리도 깊은 정을 품었나 싶어 가슴이 찡했다. 
-<은행나무 그루터기에 깨꽃 피었네>에서 


시집과 산문집 두 권이 유고집으로 출간됐고 제가 읽은 건 산문집입니다. 책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아니라 아흔 살 노부부와 인연을 담은 <은행나무 그루터기에 깨꽃 피었네>라는 글에서 제목이 나왔습니다.  
 
*출판사 휴머니스트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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