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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의붓아빠, 딸 성폭행 인정"…판사도 울먹였다

[취재파일] "의붓아빠, 딸 성폭행 인정"…판사도 울먹였다
열 다섯, 꿈 많은 소녀들이 한날한시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지난해 5월,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청주 여중생들 사망 사건'입니다. 의붓아빠 A 씨는 딸 아름이(가명)의 친구 미소(가명)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술, 진정제를 먹여 심신미약 상태로 만든 뒤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지만, A 씨는 줄곧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아이들의 죽음 이후, 우리는 남겨진 기록을 벼리며 아이들이 겪은 고통과 피해를 역추적해야 했습니다.

1심에서 징역 20년이 선고됐지만, 2심 판단은 달랐습니다. 징역 25년으로 형량이 늘었고, 딸 아름이를 성폭행한 혐의가 인정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지난 9일 열린 항소심 판결문에 담긴 재판부 판단을 곱씹어봅니다.
 

같은 증거, 다른 판단…딸 성폭행 인정한 이유

 
1심 이후 A 씨와 검찰, 모두 항소를 제기했습니다. 거듭 변명하며 혐의를 부인했던 A 씨는 형이 지나치다고, 무기징역을 구형한 검찰은 형이 부족하다는 취지였습니다. 1심은 A 씨가 딸 아름이를 성폭행한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폭행이 일어났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본 겁니다. ① "아빠가 성폭행을 했어요. 제 생식기에 무엇인가가 들어오긴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라는 진술이 성기가 삽입됐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 ② (A 씨가 성기확대술을 했음에도) "아픈 건 없었다"고 말한 점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아이가 이미 숨졌기 때문에, 생전 남긴 경찰 진술 조서나 상담 기록, 진료기록부, 메시지 내역 등을 살펴야 했습니다.

2심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법관의 자율적 판단(자유심증)으로 증거를 채택해 인정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판결문에선 약 17 페이지에 걸쳐 증거를 하나하나 뜯어봤습니다. ① 아름이가 지난해 2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아버지가 성폭행을 했다. 지금도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면 무서워서 이불을 꾸리고 잔다"고 밝히고 성폭행과 성추행의 차이를 알리며 정확한 피해 사실을 묻는 의사의 질문에도 "성폭행이 맞다"는 취지로 대답한 것, ② 3월 경찰에 범행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한 점, ③ 4월 친모와 찾은 해바라기 센터에서 "아빠한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신분으로 녹음을 하러 왔다"고 말한 점 등을 들어 피해 진술이 지속적이고 상세해 믿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여러 주변인 진술도 아름이의 성폭행 피해가 진실임을 뒷받침한다고 봤습니다.

1심은 아름이가 A 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인정하기엔 진술이 모호하거나, 오히려 배치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폭행 당한 것) 잘 생각해보니까 꿈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아름이가 자신의 성폭행 피해를 친구에게 고백한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 '꿈인 것 같다'며 번복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최초 신고 후 경찰 조사까지 아름이가 A 씨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고 봤습니다. 아름이 보는 앞에서 친엄마가 "잠깐만요, 아니 아빠한테 성폭행을 당했어? 성폭행을 당한 일이 없는데 왜 성폭행을 당했다고"고 말한 것도 이후 진술을 번복하게 했을 수 있다고 판시했습니다.

계부 성범죄 피해 여중생 추모

판결문에 적힌 고통의 시간, 그리고 가족 성폭력 범죄의 특성

"엄마가 걱정하실까봐 새아빠랑 꿈을 꾼 것처럼... 정신과에서 얘기한 것들 (경찰) 조사 받았다. 아니라고 얘기하니까 좋았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편했다. 더 말하지 않는 걸로 하고 싶어요. 그냥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지난해 3월, 정신과 2차 면담에서 아름이의 말)

1심과 2심은 서로 동일한 증거를 놓고 봤지만, 2심은 가족 성폭력 범죄 특성이나 아름이의 당시 심리 상황 등을 고려하며 원심과 다른 판단을 내놨습니다. 아름이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임상심리학 박사는 "아름이가 어린시절 친부와 사별을 겪은 뒤 친모로부터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을 친밀한 친구처럼 대하고 정서적 소통이 가능한 A 씨에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등 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A 씨가 신고된 상황이 자기 잘못이라는 죄책감을 지니거나, 이별 및 유기에 대한 공포로 자신이 이별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리를 지니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피해 사실을 번복하면서 A 씨에 협조한 건 이러한 심리에 따른 것이며, 진술이 허위거나 왜곡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딸이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 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 차분하게 판결문을 읽어 내려간 판사는 위 대목에서 멈칫하며 울먹였다고 합니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에서 "아름이는 가족이 해체될 것을 두려워하며 A 씨를 두둔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과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A 씨는 자신의 범행을 천연덕스럽게 부인함으로써 피해자들에게 더 극심한 고통에서 괴로워하게 하였는 바, 피해자들이 주어진 현실을 더 못 견디고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됐다"고 적시했습니다. 또 "가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한 공포감,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A 씨의 성폭행 범행을 누설한 죄책감 등을 이용해 A 씨가 아름이의 진술을 번복하게 하고, 친구 미소의 동향을 보고하는 등 '방어수단'으로 이용했다"고 적었습니다. 아름이가 겪었던 고통과 혼란,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진 과정이 판결문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청주 여중생 사건을 맡아온 김석민 충북법무사회장은 "이번 항소심 판결은 아름이의 '진술일관성'을 달리 본 것으로, 재판부가 증거를 충분히 검토한 후 A 씨의 강압·회유, 아름이의 심리상태 등을 이유로 진술이 번복된 전후사정을 참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름이처럼 가족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경우 직접 신고에 이르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대부분 어린 나이에 피해를 당해 상황을 제대로 해석하기 어렵고, 가해자들도 애정 표현을 빙자해 성적인 접촉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족이 피해를 덮도록 회유하거나, 분리 이후 경제적 어려움, 보복 등을 걱정하며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현숙 '탁틴내일' 상담소 상임대표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잊고 살려고 한다' '없던 일로 생각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름이가 '꿈인 것 같다' '아니라고 말하니 마음이 편했다'고 얘기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을 겁니다.

청주 여중생 유족 (사진=연합뉴스)

"아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 우린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지난해 이 사건이 알려진 당시에도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특히 아름이는 성폭행을 당한 의붓아빠로부터 제때 분리되지 못했습니다. 현행법은 성폭력 등 학대 위험에 놓인 아이를 보호 시설로 옮기도록 하면서도,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아동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경찰 수사가 한창일 때, '분리를 원치 않는다'는 아름이의 의사에 따라 A 씨와 한집에서 단둘이 살았습니다. 그동안 A 씨는 '청주 변호사' 등을 검색하거나, 자신의 혐의를 부정할 수 있는 증거 사진을 새로 수집했습니다. 또 딸의 휴대전화를 검열하고 진술 내용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가족 내에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그것도 보호자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입었다면 아동의 의사와 상관 없이 신속하게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야 한다"며 입법 공백을 지적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신고는 매년 평균 405건. 친족 성폭력에 대한 상담도 늘고 있는데, 절반 가까이가 초등학생 시절 피해를 입었습니다. 피해자가 신고하기 어렵다는 특성 때문에, 수면 아래 놓인 실제 피해 규모는 더 클 수 있습니다.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거나, 가족에 신고 의무를 두는 법안도 발의됐지만 아직 논의에 진전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또 잃을 순 없습니다. 당장 친족 성폭력 범죄를 근절할 수 없다면, 용기를 내 피해를 알리려는 아이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하루빨리 보호 공백을 메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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