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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장관 바뀌더니 미래를 내다보는 '영험한'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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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장관 바뀌더니 미래를 내다보는 '영험한' 국토교통부
1. 5월 30일 월요일 아침 7시 37분, 국토교통부가 출입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하나 보냈습니다. 'GTX 확충으로 꼭두새벽 출근길 전쟁에서 해방'이란 제목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 뭐 GTX 건설 속도를 높인다는 이야긴가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보도자료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5월 30일 14시 GTX-A 노선의 종착지인 동탄역 공사현장을 방문하여 지역주민과 만나 GTX-A 사업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듣는 기회를 가졌다. - 국토교통부 보도자료


보도자료를 보낸 시간이 아침 7시 37분인데, 14시에 그러니까 6시간 뒤에 원희룡 장관이 동탄역에서 지역주민과 만나는 미래를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기자 생활을 20년 넘게 하는 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미래를 내다본 보도자료'였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이런 문장이 이어집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동탄 주민은 동탄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지하철은 꿈도 못꾸고, 광역버스를 타야하는데 이마저도 1시간 반이 걸린다며 수도권 외곽지역은 주거격차뿐만 아니라 교통격차도 심각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GTX 개통을 앞당겨 불편을 해소해줬으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이런. 여섯 시간 뒤에 간담회에 참석한 주민이 어떤 말을 할지, 이미 모든걸 내다보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미래를 보는 유리구슬이라도 있는 걸까. 보통 영험한 공무원이 아닙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한편 평택주민은 평택도 상황은 마찬가지라며 SRT가 있지만 요금도 부담스럽고 서울 시내 환승때문에 불편해서 결국 광역버스를 타게 된다고 말하며 윤석열 대통령 공약사항인 GTX-A 노선 연장을 꼭 이행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 명이 아닙니다. 평택 주민도 여섯 시간 뒤에 있을 그 간담회에 참석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겁니다. 점입가경입니다. 그리고 원 장관은 또 이렇게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원 장관은 GTX 사업은 수도권의 교통난 해소뿐 아니라 좋은 입지의 희소가치를 분산시켜 근본적인 주거안정을 도모하는 핵심사업임을 강조하며 기획연구를 통해 다양한 조기 추진방안을 마련하여 국민들의 출퇴근 시간을 돌려드리겠다고 언급했다

보도자료는 친절하게 이런 당부를 또 담고 있습니다.

보도일시 : 2022년 5월 31일 조간부터 보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통신 방송 인터넷은 30일 15시 이후 가능)

2.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포털사이트에 '원희룡 동탄'을 쳐보면 그대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겁니다. 5월 30일 오후 3시가 되자, 원희룡 장관이 동탄역을 방문했다는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아침 보도자료에 담긴 대로, 그 동탄 주민과 그 평택 주민이 원 장관에게 했다는 민원이 또 그대로 담겼습니다. '가상의 주민들' 발언을 빼고 보도한 언론들도 있었지만, 손에 꼽을 만큼 적었습니다.

설마 했는데 당황스러웠습니다. 소설로 지어낸 보도자료가 기사가 되는 일이 2022년에 실제로 벌어지다니요.


3. 다른 부처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6월 2일, 경제단체장을 만난 보도자료를 보시죠. 일단 만남은 오후 3시에 이뤄졌고, 보도자료는 한 시간 반 뒤, 4시 반에 배포가 됐습니다. 그리고도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경제계 의견 수렴 :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투자확대와 일자리 창출, 경제 활력 회복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 중

이게 정상입니다. 실제로 이 날 경제계가 부총리에게 했던 주장은 오후 5시가 다 돼서, 기자들이 참석자들을 상대로 취재를 한 뒤에야 기사화가 됐습니다. 다른 부처들은 이렇게 일을 하고, 또 알리고 있습니다.


4. 그런데 국토부가 낸 '미래를 내다보는 보도자료'는 단 한 건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실수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 주 내내 이런 보도자료를 내놨습니다.

다음 날인 31일 화요일 아침 7시 33분에 보낸 보도자료입니다.
국토교통부(장관 원희룡)는 5월 31일 철도산업계와의 소통을 통한 미래 철도산업 발전방향 모색을 주제로 철도차량 부품업계, 신호업계 및 궤도업계와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역시 일곱 시간 뒤에 벌어질 미래, 참석자들의 발언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관계 기업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먼저 철도용품 공인시첨인 형식승인 제작자승인에 비용부담이 많고 다년 납품 사업의 경우 유사한 항목에 대해 매번 승인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개선을 요청하였다

그 다음 날은 선거날이라 하루 쉬었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이번에는 원희룡 장관이 전세사기 피해자를 만났다는 보도자료를, 10시 만남이 시작되고 2분 뒤에 보냅니다. 역시 또, 아마 아직 시작도 안했을 피해자의 말이 들어있었습니다.

서울 강서구 거주 당시 전세사기 피해를 직접 경험한 시민은 전세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릴 뻔한 임차인의 막막했던 심정을 토로하면서, 전세보증 가입을 통해 본인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만큼 국가가 공적 책임을 다해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박현민 공인중개사는 전세물건의 보증금이 매매가격보다 높다고 의심되면 공인중개사가 나서서 깡통전세의 위험성을 알리는 등 전세사기 피해를 막기 위한 업계의 노력도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역시 또, 기사가 됐습니다.


5. 좋게 보려고 노력하면, 정책을 새로 가다듬고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알려야겠다, 이런 조바심에 벌어진 일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잘못된 방법입니다. 현장 의견을 들으려면 제대로 들어야지요. 있지도 않은, 혹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렇게 생색을 내고 사진찍기용 행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진짜 민심 행보를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있을 겁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리해야 될 기사가 수북히 쌓여있을 겁니다. 뻔한 보도자료는 빨리 처리하고 기획기사, 발굴기사 써야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최소한, 저 가상의 인터뷰들은 빼고 기사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보도자료를 내는 국토부에게 따끔하게 지적을 해야 됩니다. 자꾸 그렇게 기사를 내주니까 잘못된 자료를 계속 내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토부의 잘못된 행태도 바뀌고, 기자들의 행태도 바뀌는지 주시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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