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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왜 위험을 거부하지 못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중대재해법 시행 후 넉 달 ②작업중지권과 구의역 김 군

[취재파일] '왜 위험을 거부하지 못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2016년 5월 28일, 고등학교 졸업 후 계약직 정비 기술자로 취업한 19살 청년이 구의역 승강장에서 안전문을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입사한 지 불과 7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숨지기 전 청년은 동료와의 전화 통화에서 '구의역 수리를 마치면 다음 고장 신고가 들어온 을지로4가역까지 1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고 걱정했습니다. 분초를 다투며 선로에서 홀로 일하던 이 청년에게 승강장에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2인 1조 근무가 원칙이었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청년의 갈색 가방엔 컵라면 1개와 공구와 뒤섞인 숟가락이 들어있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구의역 김 군'이라고 이름 붙인 이 청년의 죽음 이후, 6년이 흘렀습니다.

중대재해법을 취재하면서 '노동자 과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꽤나 듣습니다. 구의역 사고 직후, 김 군의 유족 역시 원청으로부터 '보고를 하지 않은 김 군의 과실' 탓에 사고가 났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구의역 사고 이전에도 2013년 성수역과 2015년 강남역에서 비슷한 사고가 2번이나 있었지만, 노동자의 '실수'가 산재로 이어지는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해명이었습니다. 중대재해법 도입 이후, 이어지는 사고들 역시 '예기치 못한 죽음'인데 경영진에게 너무 엄중한 책임을 묻는다는 말도 들려왔습니다. 산업재해를 줄여야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지만, 노사 양측이 바라보는 곳은 조금 달랐습니다. 교집합을 찾고 있을 때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작업중지권'입니다.

구의역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 중지…현실은?

산업 현장의 안전을 규율하는 법에는 '작업중지권'이 명시돼 있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근로자가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때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근로자에 대해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해 급박한 위험에 대한 판단 주체가 노동자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중지권, 법전에는 존재하지만 현실에선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급박한 위험'이라는 조항이 모호합니다. 노동자가 공정을 멈춰 세울 만한 위험이라고 판단해서 라인을 멈추면, 사측은 '라인을 멈출 만큼의 위험'은 아니라고 맞서는 식입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작업중지권을 행사했다가 소송 중인 박상호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에서는) '이 정도 가지고는 사람이 다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을 가동하셔야 된다'고 해요. 사람이 죽거나 다쳐야지 처벌을 하나싶기도 하거든요. 안전에 대한 위험 요소가 발생하면 누구나 라인을 정지하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거죠."
 

'법전'에만 존재하는 작업중지권, 영국은 근로감독관의 가장 강력한 무기

작업중지권을 행사했을 때 회사에 끼칠 손해를 걱정하는 상황과 뒤따르는 징계 및 소송까지 감안하면 개인이 행사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작업중지권을 더 정교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작업중지권은 일종의 긴급피난권과 비슷한 성격의 권리인데, 우리나라의 입법은 서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법조문 자체의 문제보다 그걸 실제로 행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와 차이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우리와 달리 영국에선 근로감독관이 적극적으로 작업중지권을 행사합니다. 노동자 개인의 작업중지권보다 근로감독관의 작업중지권 행사를 폭넓게 인정한다는 거죠. 현실적으로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작업중지권을 행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장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근로감독관의 작업중지권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구의역 김 군은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노동조합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닥친 위험은 더욱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구의역 김 군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하는 청년들은 작업중지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있다고 한들 말하기가 어렵죠. 20대 초반으로 근무하는 조합원이 많아요. 몸에 좋지 않은 화학약품을 쓰는 공정 때문에 피부에 뭐가 돋아나도 그걸 해결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대요. 참고 일하는 것들이 많죠. 여수의 현장실습생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뉴스에 나오지 않는 사고들이 더 많을 거예요. 일을 몇 년 하고 부당한 대우를 옴팡 당하고 나서 노동조합을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우리들 누구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대해 문제 제기해도 된다고, 그게 당연한 권리라는 걸 배운 적이 없어요. (특성화고 졸업 이후)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얘기하면 학교 선생님들이 '후배들 취업도 걱정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그 업체에 후배들이 취업 나가려면 참고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사회생활이라고…. 최서현/전국특성화고 노동조합위원장

구의역 추모

위험한 줄 알면서도 몸을 욱여넣어야 하는 현실

다시 구의역 사고로 돌아가볼까요. 사고 이후 서울시 구의역 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내놓은 조사 보고서를 보면, 구의역 사건은 김 군의 실수에 의한 단순 사고가 아니라 원청인 서울메트로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하청업체 직원 6명에게 48개 역을 맡도록 해 현실적으로 2인 1조 작업이 불가능한 상태로 내몬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되물어야 합니다. 쫓기며 홀로 일해야 하는 구조 속에 놓인 노동자의 '실수'가 죽음의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는지. 혹여 실수가 있다 한들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회사가 메울 수 있는 대책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을까. 구의역 사고 6년이 흐름 지금, 김 군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들 역시 위험의 징후를 애써 외면하거나 혼자 참고 있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기시감이 드는 사고들 앞에 고개 들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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