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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 함께 빛나는 18살!…《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북적북적]

SBS NEWS 북적북적 341회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북적북적 341 : 병과 함께 빛나는 18살!…《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집에 왔을 때, 완벽하진 않아도 나름의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아프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픈 순간에도 살아가는 것이다. 점점 갈 수 있는 곳과 할 수 있는 것을 늘려가는 것. 겁을 먹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 이 여름을 살아가고 있다. 힘겹더라도 온몸을 다해."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은 지난 4월말 세상에 나왔습니다. 작가가 2004년생입니다. 이제 만 나이로 18살을 바라보고 있는 신채윤 작가는 고등학생이고, 노란색과 그림 그리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학을 좋아한 적은 (별로) 없지만 열심히 공부해 왔고, 체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2019년 가을, 병을 진단받았습니다. '타카야수동맥염'이라는 희귀병. 주로 동양인/20대 미만/여성이 걸리는 병입니다.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병으로 보입니다. 원인도, 완치될 수 있을지 여부도 알 수 없고, 적절한 치료제도 모릅니다. 오늘의 책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는 신채윤 작가, 채윤 학생이 이 병을 진단받은 뒤 써온 일기가 한겨레21에 연재돼 온 것을 모은 에세이집입니다.
 
“병원에서 나와 자동차 창밖을 바라봤다. 검사하느라 약을 넣은 눈 속으로 색채가 분리된 것만 같은 풍경이 보였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잔상을 남기며 지나가는 나무들. 나는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루이 브라유, 헬렌 켈러, 심봉사, [초원의 집]에 나오는 메리 잉걸스… 어떡하지, 이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는 대단하지 않다. 그 사람들을 존경했지만 이렇게 찬란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세상을 포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처럼 약한 사람이 시신경에 의지해 보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 세상을, 나를? 
 
약은 줄었고, 아직은 볼 수 있다.”

작가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덜컥거리는 증상이며 진단들을 일상적으로 받아드는 십대 후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손쓸 수 없이 함께 찾아온 우울감에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울감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우울감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병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병이 있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기록하기를 매 순간 놓치지 않는 작가다운 작가의 자세로 써온 글들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부작용이 심한 약을 투약해야 하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그 부작용 때문에 꾸게 되는 희한한 꿈들의 세계에 다녀오면 모든 것이 한층 우습고 여유로워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게 신 작가의 방식입니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집어들었을 때는 막연히, 희귀병을 앓고 있는 10대 청소년을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겨갈수록, 참으로 염치없긴 하지만, 이 10대 작가에게 일종의 위로를 받는 어른인 스스로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염치는 없지만,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모든 작가다운 작가들이 달성해 내는 성과를 신채윤 작가도 달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이가 누구이든 그의 사적인 층위 어딘가에 가닿아 그 사람에게 적절한 이야기와 위로를 건네는 그 마법 같은 작가의 힘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북적북적] 가족 여러분께도 감히, 그 누가 읽든 언제 읽어도 뿌듯하게 차오르는 독서경험을 하실 수 있는 책일 거라고 권해드려 봅니다.
 
"아프면서 가끔 환자라는 위치가 참 편리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전에 느꼈던 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 때, 혼자가 아니어서 외롭지 않고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알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모두 아프다. 아픈 경험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대화는, 사람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공감은, 많이 아프고 상처받고 주저앉아 우는 고통을 나누는 데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고통을 예삿일로 여겨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렸던 건 뭐였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을 알아주기 위해서 사용할 때, 그때야 비로소 정말로 '공감'을 해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 책장을 넘길 때 막연히 흔치 않은 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신채윤 작가 본인의 표현마따나 "100만 명 중 2명 있을까 말까 한 병을 앓는, 희귀성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상황에 놓인 신 작가를 마주했을 때 제가 건넬 수 있는 제 나름 최선의 나눔은 무엇일지 (최소한 근사치로라도) 알고 있다는 자신이 없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일상성을 벗어나는 고통과 제대로 마주보는 (또는, 마주보자고 마음먹는 것은) 꽤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좋은 글들이 그렇듯이, 이 책의 에세이들은 한 가지의 정형화된 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채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먼저 알려줍니다. 정작 이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신채윤 학생 본인도, 매 순간 자신의 경험 안팎에서 떠오르는 마음과 감정을 성찰하고 그때마다 몇 걸음씩 더 나아가면서 그때그때의 답을 길어 올리는 과정에 있다고 말입니다. 항상 같은 대답, 항상 같은 상태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병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채윤 작가에게는 그 통찰들 속에서 병과 함께 성장하고 더 멋진 사람, 더 멋진 작가가 되어가는 하루하루가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럴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고정된 하나의 최선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돌리지 말고, 서로 공감해 주자고 넌지시 가르쳐 줍니다.
 
"지금은 병과 나를 분리하고 싶어 하지만, 언젠가는 아픈 나와 아프지 않은 나를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로 결심했다. '병을 가진 나'를 오롯한 나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 나로 죽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것처럼, '나만의 죽음'을 죽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 작가가 단호히 무례하다고 거부한 것은 이 책을 통틀어 단 한 사람. 너에게 큰 병이 있다니 "인생 망했네?"라고 막말한 동급생 한 명 뿐입니다. 병이 있다고 해서, '인생이 망했다'고 남의 인생을 멋대로 재단해 버린 그 태도 하나만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신 작가는 자신의 여러 개성과 상황들에 유달리 다루기 힘든 병 하나를 추가한 채로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사유들을 우리에게 나누어주면서.
 
"사람들은 낫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듯이 "넌 이겨낼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반항하게 된다. 병이 꼭 나아야 하나? 병에 걸려도 내가 이렇게 빛나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제 병은 안 나아요, 나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요" 하고 말해서 당황으로 얼룩진 그들의 얼굴을 구경하고 싶은 못된 마음이 고개를 든다. 단 한 마디의 응원으로도 잡생각이 꼬리를 문다. 수많은 생각이 바닷속으로 영영 가라앉아버리도록, 그 모든 것들을 파도가 쓸어가버리도록 한다."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

작가 본인이 쓴 것처럼, 병과 함께도 빛나는, 이제 18년째를 걸어왔을 뿐인 미지의 인생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 초입에 독자로서 함께 했다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리고 신채윤 작가가 앞으로도 멋진 글들을 쓰리라는 이 기대를 [북적북적] 가족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여름의 초입도 [북적북적]과 함께 해주세요.

*한겨레출판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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