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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수다] "위가 붓도록"…'헌트' 이정재가 밝힌 집념의 제작기

헌트

[SBS 연예뉴스 | (칸=프랑스)김지혜 기자] 배우 이정재가 산고에 가까운 고통을 겪으며 완성한 연출 데뷔작 '헌트'의 치열했던 제작기를 공개했다.

21일 오전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열리고 있는 프랑스 칸 팔 드 페스티벌 인터뷰룸에서 만난 이정재는 '헌트'에 매달렸던 지난 4년의 시간을 술회했다. 이정재가 '헌트'를 만나게 된 것은 한재림 감독을 통해서였다. 두 사람은 과거 '관상'을 통해 호흡을 맞춘 바 있다.

'헌트'의 원제는 '남산'이었다. 이른바 '남산 프로젝트'로 불렸던 이 영화는 한재림 감독, 이정재에 의해 4년 전에 일찌감치 가동됐지만 여러 현실적 난관에 부딪히며 표류했다. 이 매력적인 작품이 영화로 완성돼 칸영화제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감독이자 공동제작자인 이정재의 집념과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2016)을 찍고 있을 때였다. 한재림 감독이 어느 날 "선배님, 스파이 영화 좋아하세요?"라고 묻더라. 그래서 저는 "남자 배우 중에 스파이 영화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라고 반응했다. 그때 '남산'이라는 시나리오가 있다고 알려줬다. 당시는 원안자가 2,3고를 쓰고 있는 상태였다"고 언급했다.
TWO RIVALS, A HIDDEN TRUTH. FESTINALDECANNES LEE JUNG-JAE JUNG WOO-SUNG HUNT A FILM BY LEE JUNG-JAE

이정재는 판권을 구매할 시점이 다가오자 한재림 감독에게 "'남산' 시나리오가 주인을 찾고 있는데 내가 사도 되겠냐"라고 물었다. 이 말에는 한재림 감독에게 영화화 할 계획이 있냐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한재림 감독은 이야기 소재는 흥미롭지만 상업적으로 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고사했다.

이정재는 "내가 봤을 때는 시나리오를 잘 발전시키면 (상업적)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한 감독이 난색을 표하길래 '내가 한번 잘 고쳐볼게'라고 하며 일단 판권을 구매했다. 물론 그때는 그 시나리오를 내가 고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라고 말했다.

판권을 구매한 이정재는 '사랑니', '유열의 음악앨범' 등을 만든 정지우 감독을 찾아가 연출 제안을 했다. 이정재는 "정지우 감독이 시나리오를 잘 고치실 것 같아서 의뢰를 했다. 그런데 이 정도 예산이면 볼거리 위주의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 방향과는 안 맞을 것 같다고 고사하시더라. 감독님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재림 감독을 만나 '당신 때문에 (판권) 샀다가 골치 아파졌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니 한 감독이 '그럼 같이 하시죠' 하더라. 그리고는 한 석 달간 시나리오를 쓰더니 '도저히 안될 것 같다'라는 최종 답변을 받았다. 그때는 나 역시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지난한 과정을 밝혔다.

이정재는 연기 경력 29년 차의 베테랑 배우지만, 연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다. 연출은 물론이고 시나리오 작법도 배운 바 없다. 그런 그가 수많은 감독들이 난색을 표한 시나리오의 각색에 나선 것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헌트

'연출'이라는 당시로서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그는 "포기하기는 자존심 상하고, (시나리오를) 안 써주면 나라도 써야지 하면서 쓰기 시작했다"라고 답했다. 이어 "나는 시나리오를 써본 적도 없고, 컴퓨터 사용도 익숙지 않은 터라 초반엔 써놓은 내용을 몇 번이나 날려먹고 까무라치고를 반복했다"라고 작은 해프닝을 소개하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는 과정은 시간이 쌓이고 쌓여도 녹록지 않았다. 이정재는 "나는 긴장되면 위가 붓는다. 그런 고통을 겪으며 '내가 왜 이거를 써야하지'라고 자문하기도 했다"고 각본 집필 과정에서 느꼈던 창작의 고통을 토로했다.

도전의식에 불을 붙인 건 '자존심'과 '책임감'이었다. 두 가지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여느 감독의 시나리오 작법 과정처럼 ▲ 주제 찾기 ▲ 캐릭터 구축 ▲ 플롯 구성 순으로 이어졌다.

"가장 첫 번째 숙제는 '주제 찾기'였다. 초고의 주제가 나하고는 맞지 않았다. 또한 평호의 원탑 영화라는 것도 상업영화로 풀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스파이 영화라 제작비가 상당히 투입될 수밖에 없는데 이 정도 사이즈의 영화면 투탑, 쓰리탑으로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호와 정도의 투탑 영화로 가려면 두 주인공이 움직이는 강력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이들의 명분을 만들어야 주제의식으로도 연결될 것 같았다."

오랜 고민의 결과 이정재 감독은 안기부에서 13년간 사명과 신념을 가지고 일해온 박평호와 군에 몸담았다가 안기부로 갓 들어온 김정도가 조직 내 스파이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심하다 갈등을 겪는 캐릭터 드라마로 완성했다. 이를 통해 이정재는 그릇된 신념이 빚어내는 비극과 파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인터뷰 내내 박평호와 김정도의 캐릭터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상징의 기능을 하는 취조실 매직미러 장면과 엔딩 폭파신의 연출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영화 헌트 스틸컷

"평호와 정도는 출신부터 다르다. 그러나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측면이 있다. 취조실의 매직미러 장면을 통해 두 캐릭터의 다르면서도 같은 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매직 미러는 밖에서는 안이 보이고, 안에서는 밖이 안보이지 않나. 매직미러를 통해 평호와 정도가 이야기를 하지만 마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개성을 투영한 장면을 설명하자 '타고난 감각'이라는 기자들의 반응이 나왔다. 이정재에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건 없다. 나는 배우를 좀 더 열심히 하고 싶다"라고 반응했다.

그가 이토록 손사래를 쳤던 것은 연출을 하는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위가 붓는 고통을 참아가며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던 이정재는 "어떤 정보들로 인해서 극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 있는데 시나리오로는 잘 풀리지 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한재림 감독도 안된다는데 내가 뭐라고 이걸 아집을 부리며 쓰고 있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시나리오 쓰기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더라 한 달 정도 지나니 다시 컴퓨터를 켜고 있더라. 그런 과정은 반복하며 한 줄 한 줄 써내려갔고, 촬영이 끝날 때 까지도 대사를 고쳐가며 영화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칸영화제의 공식 상영 이후 가장 기분 좋았던 외신의 평가를 말해달라는 질문에 이정재는 한 프랑스 기자와의 인터뷰를 언급하며 "'그릇된 신념에 의해서 분쟁하지 말자는 이야기죠?'라고 말씀하시는데 외국인이 제 연출 의도를 너무 잘 이해하셔서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라고 웃어 보였다.

제75회 칸국제영화제 이정재

뜨거운 화제와 스포트라이트 속에 열렸던 지난 19일 미드나잇 스크리닝 공식 상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특히 7분간 이어진 기립박수의 순간을 떠올리며 "태어나서 이렇게 긴 박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쑥스럽고 민망했지만 관객들에게 고맙고 감사했다"고 활짝 웃었다.

칸에서 성공적인 감독 신고식을 치른 이정재는 오는 8월 국내에서 관객과 만난다. 단순히 작품에 대한 평가와 영화에 관한 반응만을 느낄 수 있었던 칸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흥행 성적이라는 수치적 결과까지 마주하게 될 예정이라 감독으로서의 부담감이 적지 않을 터.

이정재는 '위드 코로나', '엔데믹'으로 해빙기를 맞은 최근의 극장 분위기에 기대감을 드러내며 "여기 있는 동안에 한국에서 '범죄도시2'의 흥행 소식을 접했다. 관객들이 다시 극장을 찾고 있다는 좋은 신호가 아닌가 싶다. 올여름에는 '헌트' 뿐만 아니라 다른 좋은 영화들도 많이 개봉하니 저 역시 여름이 기다려진다"라고 말했다.

감독이자 배우로 활약하는 이정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헌트'는 오는 8월 국내 극장에 개봉한다.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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