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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그리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국가가 사과하는 법 ④ - 기록 찾아 삼만리

[취재파일] 그리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고문 피해 행정소송 관련 취재 김춘삼 씨
[김춘삼/납북귀환어부 피해자]
"먼저 당부하고 싶은 거는 저희 납북되신 분들이 이 일을 하다 보면 분명히 옆에서 누군가가 뭐라고 할 가능성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럴 때는 그냥 차분히 아무 말 없이 나의 의견을 소신껏 피력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 것을 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그분들과 의견충돌하시는 일이 없도록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난 1월 13일 속초 수협에서 열린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시민모임 간담회. 시민모임 창립자인 김춘삼 씨는 간담회를 시작하면서 계속 '낮은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지난 세월의 한을 성토하는 여느 피해자 모임의 풍경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50여년의 세월, 응어리진 억울함을 풀어보자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김춘삼 씨는 끊임없이 일종의 자기 검열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대공용의자로 낙인 찍힌 뒤, 평생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세월이 그의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진 것 같았습니다.
 

방사능 피해처럼 오래가는 상흔


50여년 전의 일이지만, 그 피해의 흔적은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뒤, 북한 당국의 인도대로 체제 선전용 시설들을 관람한 어부들은 고향에 돌아와 '국가보안법', '반공법'을 위반한 의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혹한 조사 뒤에도 A급, B급, C급으로 분류돼 가는 곳마다 경찰의 사찰을 받았습니다.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변변치 않은 것들이었고,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생활이 계속됐습니다. 막노동을 전전한 이영란 씨의 아버지는 딸들을 볼 때마다 '영어 단어를 외워라. 너희들은 공부해서 나처럼 살지마라'는 말만 되뇌었다고 합니다.

고문 피해자 관련 인터뷰 이영란 씨
[이영란/납북귀환어부 딸]
"지금 생각해 보니. 지금 하나하나 발자취를 찾아보니, 그때 당시 아버지의 한 말씀 한 말씀이 고문당하고 고통 당했던 그런 일들을 표현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그렇게 숨기고 살아오신 것 같고요.
'공부를 해라. 영어 한 단어라도 더 외워라'. 그때 당시에 저희 나이 때만 해도 공부를 못 가르쳐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 친구들이 되게 많았는데 '네가 공부를 많이 해서 정말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는 말을 계속 아버지가 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당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그런 뜻이었던 것 같아요."

국가 권력의 잘못된 발동은 피해자 본인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삶이 무너진 아버지들은 그 자식 세대들에게도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계층 이동의 기회는 그렇게 박탈됐습니다. 원전 사고나 원폭 피해가 세대를 이어가며 상처를 남기듯, 국가 폭력은 여러 세대에 걸친 상처를 남겼습니다. 납북 어부 사건은 흔히 '과거사'로 인식되지만, 이 일이 과거에만 머무는 게 아닌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할 수 없었다


글의 서두에서 본 김춘삼 씨처럼, 피해자들 상당수는 '피해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 합니다. 이는 이들이 십수년 세월 동안 반복적으로 겪었던 좌절에서 기인합니다. 13년 전,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반공법 위반, 수산업법 위반으로 선고된 1327명의 판결문을 전수조사한 결과 1028명에게서 간첩 조작 피해가 의심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들을 간첩으로 낙인찍어 보도했던 언론들도 태세를 전환해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춘삼 씨는 그 때를 "세상이 정말로 바뀐 것 같았었다"고 회상합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납북 어부 정보 공개 청구 화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어떤 절차를 밟아야하는지 친절히 안내해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어렵게 변호사를 선임해 본인 사건 기록을 구해보려 해도 돌아오는 답은 '정보 부존재'였습니다. '국가보안법 관련 기록은 영구 보존하게 돼 있다'는 법률 규정은 어부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기관이 '없다',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하던 기록은 국회의원이 요청하자 그제서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정의당 이은주 신임 원내대표 (사진=연합뉴스)
이은주/정의당 의원
"저희가 알아보니,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하고 국가기록원으로 넘긴 자료를 2기 진실화해위도 못 받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상임위를 통해서 행정안전부 장관한테도 여러 번 촉구하고 했는데, 국가기관도 국가기록원의 정보를 못 받고 있으니 일반 시민들은 과연 그 자료를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행정안전부를 비롯한 국가 기관이 과거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서 그런 자료들을 공개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된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필요할 땐 쉽게 소환되는 '사회적 약자'


최근 이른바 '검수완박' 법 개정 논란으로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이 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던 날 밤, 기자로서 현장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의원들은 고함을 질러댔는데, 개정을 추진하는 민주당은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몇 주 만에 만들어 통과시키려하는 법안을 살펴보며, 이 법안이 어떤 의미에서 약한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장애 아동을 변호해 온 변호사, 재심 사건을 전문으로 해 온 변호사들이 진영을 불문하고 내는 강한 반대 목소리에 더 수긍이 갔습니다. 잘못된 수사권의 발동으로 몇 세대에 걸쳐 삶이 망가진 이들을 취재한 터라,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형사사법체계를 바꿔버리는 무모함에 두려운 감정마저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퍼센트 넘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민주당이 급격하게 추진한 이 법안에 심정적 동조를 보내는 현상에 대해선 곱씹어봐야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찰 구성원들은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법안이 사회적 약자의 피해로 돌아올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논리적으로 온당하게 보이는 이 말이 더 많은 국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지려면 '말'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행동'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경찰이 수사권을 남용해 힘없고 약한 국민들의 삶을 짓밟을 때, 검찰이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국가 권력을 통제하는 공익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는지에 대해 상당수 국민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윗 세대가 저질러놓은 잘못을 아랫 세대의 구성원들이 모두 바로잡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조직이 사람들에게 과거와 다른 새로운 조직으로 인식되려면 이 '세대의 딜레마'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합니다. 지난 정부의 첫 검찰총장이 과거사 피해자들에 대해 직권 재심을 청구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습니다만, 납북어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수사 기록을 받는 것에서부터 여전히 애를 먹는 현실을 보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지난 3월 춘천지검 속초지청은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 진실규명 협력 TF'를 발족했습니다. 속초지청 관계자는 "관련 기록 열람·등사 등에 협력하고 재심 등의 절차에 체계적으로 준비하겠다"고 밝혔는데,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이런 인식과 노력이 검찰 조직 전반에 좀 더 확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납북어부 피해자의 딸 이영란 씨는 "금방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도 안다. 다만 안 되더라도, 살면서 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의미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공론장의 싸움이 벌어질 때 쉽게 소환되고는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바라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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