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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혁신 성장' 외치면서도 '지식재산'은 실종…"앙꼬 빠진 110대 국정과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 발표회

지난 10일 윤석열 정부가 공식 출범했다.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 사는 국민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10대 국정과제를 제시한 윤석열 정부는 경제 분야 국정과제로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를 천명했다. 경제 체질 선진화와 혁신 성장을 통해 경제를 재도약시키겠다는 각오다. 지금까지의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이제 시장이 주도하는 혁신으로 성장을 이끌어내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혁신 성장'을 이끌어낼 윤석열 정부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국무총리와 장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가 파행하면서 정부 조직 개편은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다.

지금 산업 생태계는 기술과 문화, 소프트웨어(software)와 하드웨어(hardware)가 융합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로 표현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모방하고 추격하는 과거 행태에서 벗어나 선도적인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혁신을 주도하는 지식재산(IP: Intellectual Property)을 고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110대 과제를 요약한 제목 어디에도 특허나 디자인, 상표, 영업비밀, 저작권 등을 한마디로 일컫는 '지식재산'이라는 핵심 단어(key word)를 찾을 수 없다.

미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대패한 일본과 미국의 강력한 무역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등 선진국들은 지식재산입국을 선언하고, 지식재산 확보와 관련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가의 지식재산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를 만들고 국가 경쟁력의 핵심 지표가 된 지식재산 확보와 육성에 나선 것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산업생태계(GVC: Global Value Chain)에서 지식재산은 무역 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혁신을 선도하기보다는 스스로 혁신을 옥죄며, 민간의 혁신 의지를 억압하는 구태의연한 구조와 관행을 갖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혁신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집단의 텃세를 막고, 규제와 칸막이 제거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지혜가 융합해 시너지를 내도록 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지식재산'이라는 열쇠가 있지만, 관련 부처간 기득권 다툼에 혁신은 뒷전이라는 얘기다.

대한변호사협회가 회원들에게 보낸 변리사법 개정안 반대 촉구 공문

'밥그릇 싸움'에 스스로 '혁신의 숨통'을 조르는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발명가의 권익을 보호하고, 산업재산권 제도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변리사 제도를 두고 있다. 특허청 또는 법원에 대하여 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또는 상표에 대한 사항을 대리하고, 지식재산에 대한 감정과 그 밖의 사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변리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변리사가 발명자를 대신해 특허청에 특허나 상표 등의 출원을 하고, 침해가 발생할 때 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등을 함으로써 발명자의 권익을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특허 침해 시 법원에서 소송을 대리할 수 있는 '소송 대리권'이 변리사에게는 없다. 특허 침해 소송을 하려면 관련 특허를 출원하고, 등록을 대행한 변리사가 아니라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겨야 한다.

과학기술단체나 벤처업계, 변리사업계는 과학기술이나 특허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변호사만이 특허 소송을 대리할 수 있기 때문에 발명자들이 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변리사들은 "발명자의 권리를 규정한 특허명세서나 특허청구항이 무엇인지, 관련 기술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변호사들이 특허 침해 소송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변호사 시험에서 '특허법'을 선택 과목으로 정하는 응시자는 2020년 3%에 불과했다. 특허법을 선택한 변호사 시험 응시자들도 대부분 이미 변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로, 일반 변호사 시험 응시자들이 특허법을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허 업무를 아는 변호사가 적다 보니 발명자가 특허 침해 소송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대형 로펌에 의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형 법무법인에 소송을 의뢰할 경우 비용도 비용이지만, 대기업이 주요 고객인 대형 로펌의 법률 서비스가 대기업에 치우쳐 중소벤처기업은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특허를 잘 알지 못하는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소송을 대리하면서 변호사 뒤에서 변리사가 변론을 도와주는 '쪽지 변론'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지난 2006년부터 '변리사와 변호사가 공동으로 특허 침해 소송 대리를 할 수 있도록' 변리사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지만, 변리사법 개정안은 16년 동안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2006년 11월 17대 국회에서 처음 상정된 법안은 법사위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18대와 19대, 20대 국회에서도 변리사 공동 대리 법안은 상임위 계류 중에 자동 폐기됐다.

지난 1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는 전체회의에서 특허 침해 소송에서 변리사의 공동 대리를 허용하는 내용의 변리사법 개정안을 의결했지만, 법안이 변호사들이 주축이 돼 있는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전체회의에서 최종 의결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대한변호사협회를 비롯한 변호사단체들은 법률을 모르는 변리사들에게 소송 대리를 맡기면 제대로된 법률 서비스를 받을 국민들의 권리가 침해된다며 '특허 소송 공동 대리'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변호사들은 법안 심사 상임위가 열리는 국회 사무실에 몰려가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변호사협회 주도로 관련 상임위 국회의원들에게 법안 개정에 반대하는 문자 폭탄을 보내기도 했다.

변호사들이 국회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일본은 이미 지난 2004년 변호사와 변리사의 특허 소송 공동 대리를 허용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했고, 유럽은 변호사와 변리사의 공동 대리가 아닌 변리사의 특허 소송 단독 대리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사실상 변리사에 해당하는 특허 전문변호사(Patent Attorney)를 두고, 특허 소송을 맡는다.

특허를 등록하고 특허 관련 소송의 상대방이 되는 특허청이 변리사에 대한 관리 감독을 하는 체계도 변리사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변리사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고 변리사 자격을 취소할 수 있는 특허청을 상대로 변리사들이 발명자들을 대신해 특허 무효 취소 소송 등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유명무실해진 '지식재산기본법'과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지난 2011년 이명박 정부는 지식재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식재산 분야의 헌법으로 통하는 지식재산기본법을 제정했다. 지식재산 관련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식재산 정책을 총괄할 컨트롤 타워로서 대통령실 소속으로 국가지식재산위원회도 만들었다. 지식재산의 창출, 보호, 활용을 촉진하고 그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정부의 기본 정책 추진 체계로서 지식재산위원회를 만들고, 그에 대한 세부사항을 지식재산기본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지식재산에 대한 인식은 갈수록 낮아졌고, 지식재산위원회의 사무를 관장하는 간사 부서 '지식재산전략기획단'은 국무총리실 소속기관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 기관으로 강등됐다.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식재산정책과 업무를 관장해야 할 지식재산위원회의 위상이 다른 부처보다 오히려 낮게 인식되다 보니 중요한 업무일수록 지식재산위원회가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해 추진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식재산 관련 업무에서 지식재산위원회가 이른바 '왕따' 신세가 된 셈이다.

정상조 국가지식재산위원장은 "지식재산위원회는 국무총리와 민간위원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13개 부처 장관을 위원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독자적인 조직과 인원, 예산, 권한이 부족하다. 파견 사원을 포함해 20명에 불과한 직원은 다른 부처에서 파견을 받아 수시로 바뀐다. 전문인력은 부족하고, 독립적인 의결 권한도 없다. 현실적으로 현안을 파악해 보고하는 수준이다. 지식재산 정책을 입안하고, 각 부처의 정책을 심의 조정하는 역할을 하려면 개인정보보호위원회처럼 의결권을 갖는 중앙행정위원회로 승격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2021년 특허 국제 출원(PCT) 순위

IP4에 걸맞는 지식재산거버넌스 확립, "연간 20조원 GDP 증대"

우리나라는 지난해에 모두 2만 678건의 특허를 국제 출원(PCT 출원)해 2년 연속 독일을 제치고 세계 4위를 기록했다. 국내에서 특허청에 등록해달라고 출원한 특허와 상표, 디자인 등 산업재산권은 모두 59만 건에 달했고, 이 가운데 34만 건이 등록됐다.

하지만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출원하는 지식재산 창출 부문에서의 양적인 성장과 달리 지식재산을 보호하고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은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업부 산하 특허청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저작권위원회, 농림수산식품부, 해양수산부, 중소벤처기업부, 보건복지부, 공정거래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각 부처에서 각자 지식재산관련 업무를 수행해 부처 간의 업무 중복과 비효율, 부처 간 갈등이 심각하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IMD 평가 부문별 세계 혁신지수 GII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가 매년 발행하는 2021년 세계 경쟁력 연감(The Global Competitiveness Yearbook)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은 평가 대상 64개국 가운데 23위로 전년도와 동일한 순위를 유지했다. 정부의 비효율성 부분은 34위를 기록했다.

혁신지수(GII)는 세계 5위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지만, 인적자원 및 연구 지표가 세계 1위를 기록한 데 따른 착시로 분석되고 있다. 경제 규모 대비 연구개발비는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에 달했지만, 제도 부문 혁신은 28위에 그쳤다. 정부 효율성, 법의 지배, 창업 용이성(사업환경) 등은 모두 20위권 밖이었다. 혁신 성장과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산업 정책과 지식재산권 창출 및 보호 정책을 범부처 차원에서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대목이다.

2021년 세계 혁신지수 분석과 시사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지난해 11월 사단법인 지식재산포럼이 한국지식재산학회와 세계특허허브국가추진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지식재산정책 미래 비전 대 토론회'에서 인하대학교 법학연구소 이종호 박사는 지식재산정책 추진 체계를 효율적으로 개편하면 연간 8조 원의 행정 비용과 중복 투자 감축 효과를 올릴 수 있다고 추산했다.

또 생산성 증가와 기술료 수입 증대로 3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증가가 예상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에 저작권과 문화 콘텐츠 수출로 연간 10조 원 이상의 무역수지를 개선할 수 있고, 지식재산(IP) 서비스업의 수요 증가로 연간 5천 명 이상의 고용 증대 효과도 기대된다고 밝혔다.

지난달 6일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가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과 공동 주최한 '지식재산정책 거버넌스 어떻게 준비해야하나?' 컨퍼런스에서도 발표자와 참석자들은 "기술과 콘텐츠의 융합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부처별로 흩어진 지식재산 정책 기능을 통합한 강력한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전종학 한국지식단체총연합회 정책기획단장은 "지식재산 정책을 총괄할 컨트롤 타워로서 청와대에 지식재산비서관을 신설하고, 지식재산처를 신설하거나 지금의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의결권을 가진 중앙행정위원회로 격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식재산 정책 추진 체계 개편의 사회경제적 효과: 인하대학교 이종호 교수

발명가이기도 했던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은 "특허는 천재라는 불길에 경제적 이익이라는 기름을 붓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국가의 기업이나 발명자 개인이 축적한 지식재산권은 무역 분쟁에서 강력한 핵심 전략무기가 된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이 세계 최고의 기술 강국이라는 위치를 유지하는 것도 모두 강력한 지식재산 보호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융합과 초연결의 시대이다. 산업에서 분야별 경계가 무너지고, 서로 다른 분야의 기술 간 융복합은 물론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융복합 현상이 가속화한다. 이런 융복합은 한 분야의 혁신이 다른 분야에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는 만큼, 그 효과의 확산을 위해 범국가적 지식재산 정책이 필요하다.

AI와 빅데이터, NFT, 메타버스 등 신산업 분야에서는 특허와 같은 산업재산권과 저작권, 신지식재산권 등 여러 유형의 지식재산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각 부처가 각각의 법령에 따라 서로 다른 지식재산 정책을 추진한다면 비효율과 낭비로 오히려 불편과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미 응용미술 분야에서 저작권법과 디자인보호법의 중첩,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한 특허법과 저작권법의 중첩, 동일한 창작물에 대한 업무상 저작물과 직무발명규정 간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식재산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지식재산은 서로 연결하고 모을수록 큰 시너지 효과를 낸다. 복잡한 기술이 서로 얽혀 강력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4차 산업혁명시대, 막힌 혁신의 매듭을 푸는 고리로서 지식재산 거버넌스의 정립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연간 20조 원 이상의 경제적 부가가치 제고 효과와 고용을 창출하고, 국민들의 편익을 제고하는 지식재산 거버넌스의 재정립은 새 정부의 성공을 좌우할 혁신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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