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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적북적]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적북적]


북적북적 337: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봄이 훌쩍 달려갑니다. 머잖아 여름이 훅 들어올 듯합니다. 마침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다고 하니 드디어 맨살로 눈치 보지 않고 봄바람을 맞을 수 있게 됐습니다. 상상도 못 해 봤던 2년이 흘러갔는데 앞으로는 또 어떨까요. 

오늘의 책, 저는 읽다가 말다가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그 고비를 넘나드는 게 꼭 코로나 같기도 했는데 막상 넘어서니 주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반전인가 아닌가 싶은 반전, 처음부터 뭐든지 술술 풀려가는 것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게 마련이죠. 이 책은 제목부터 그랬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미국 공영라디오방송, NPR의 과학전문기자입니다. 오래전에 사망한 한 과학자를 알게 되고 그에게 매력을 느끼면서 여러 문헌 자료를 통해 그의 삶을 추적해갑니다. 그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위인이었는지를 차차 깨닫게 된다면, 그의 강철 같은 의지와 불굴의 삶을 발견해가기만 한다면... 재미는 좀 떨어지겠죠. 역시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 자신의 이름에 별을 더한 이 소년은,  어려서부터 자연을 관찰하고 수집하는 데 재미를 느꼈습니다. 한때는 밤하늘의 별에 몰두했다가 이를 졸업한 뒤 그의 관심은 지상으로 옮겨와 지도 만들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한 어머니에게 좌절당하자, 이번엔 꽃을 택했습니다. 무질서해뵈는 자연의 숨겨진 질서를 파악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희열을 느낀 그는, "자연 속에 신의 계획이 숨겨져 있고 신의 피조물을 모아 위계에 따라 잘 배열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믿는 학자 아가시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분류학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조던은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지치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이 모두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종들을 수천 종 낚아 올렸고, 각각의 종마다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그 이름을 반짝이는 주석 꼬리표에 펀치로 새기고, 에탄올이 담긴 유리단지에 표본과 함께 이름을 넣었다. 그렇게 자신이 발견한 어류 표본들을 높이 더 높이 쌓아갔다."-<프롤로그>에서
 

그렇게 쌓아 올려 간 업적 덕분에 젊은 나이에, 지금도 확고한 명성을 자랑하는 스탠퍼드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했던 그의 연구성과물이 엉망진창으로 박살 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 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이 올 자리다."-<박살>에서

여느 범인들 같으면 여기까지 오기도 어려웠겠으나 좌절의 늪에 빠지기 십상인 때에도 꺾이지 않아서 '위인'이겠죠. 조던은 굴하지 않고 다시는 이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늘로 물고기에 이름표를 부착하기 시작합니다.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매력을 느낄 만한 인물의 모습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려. 낮이나 밤이나."
해는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데이비드의 동료 두 사람은 고무 덧신을 신고서 물고기들의 살덩이를 향해 호스로 물을 뿌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굴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창밖에는 그들의 선지자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희부옇게 드리워 있으며, 이 난장판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가운 물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며 적어도 당장은 이것들을 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 -<박살>에서


책에서 이 대목과 그 이후까지는 그저 한 위대한 학자의 모습입니다만, 제가 간단히 적어놓은 조던의 성향에서 어떤 단서를 발견한 분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우생학의 옹호자였습니다. 나치 독일이 유태인 학살과 장애인 살해와 불임 정책의 근거로 삼았던 그 학문은, 미국에서도 20세기 초중반까지 지지자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던 거죠.

데이비드 조던에게 매혹돼 그의 삶을 쫓아온 작가에겐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을 테고 저를 포함해 독자들 상당수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사망한 지 90년이 지난 조던에게 뭔가 복수를 하거나 다른 걸 기대하기도 어렵고... 충격과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는데 책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반전입니다. 죽었던 조던이 살아 돌아온다거나 평행우주가 펼쳐진다거나 하는 설정은 아니지만, 꽤 놀랍습니다. 책을 직접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힌트라면 책의 제목(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 왜 저럴까 정도 말씀드립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사실 데이비드 조던 만은 아닙니다. 작가의 삶과 고민이 꽤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삶의 혼돈과 무질서에 크게 고민하고 좌절했던 작가가, 자신이 별로 좇았던 한 인물의 삶을 되짚어보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성찰하는 대목도 꽤 공감이 갑니다. 인내심을 갖고 차분하게 읽다 보면 빠져드는 책입니다.

*곰 출판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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