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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거기 권일용이 있다

[그사람]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거기 권일용이 있다

1. 악의 심연을 본 사람

2004년 20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구치소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비가 내렸다. 차를 세우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내가 돌아올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빠져든 느낌이었다. 남들에게 차마 전달할 수 없는 악의 세상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감을 그렇게 표현했다.

"내가 이런 말을 듣고도 앞으로 인간을 이전과 같이 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에는 인간이 아무리 악한 짓을 했어도 그래도 교화가 되겠지 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느낌이었죠. 이런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인간을 평가하는 감정은 더 이상 가질 수 없겠다라는 생각을 한 거죠."

유영철, 정남규, 이춘재, 강호순 같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악마들을 만나며 17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2017년 4월 퇴직하기까지 프로파일링 면담을 한 사람이 960명, 직접 눈으로 본 시신이 2천 구가 넘고 관여한 사건이 3천 건 정도 된다고 했다. 악마를 만나는 일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일까.

유영철
김길태

"이제 나의 삶은 그들의 흙탕물에 그냥 발을 담그고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뭐랄까 이젠 자연스러워진 거죠."

암흑의 심연을 본 사람, 거의 매일처럼 악마들의 얼굴을 보고 악마들의 마음을 살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악마들을 만나면 무섭지 않았느냐고, 아니 그런 악마들을 만나고도 어떻게 미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한 가지 단서라도 찾기 위해 6개월 동안 컴퓨터 바탕화면에 피해자 시신 사진을 올려 두고 아침부터 밤까지 틈나는 대로 봤다고 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과연 정상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악에 물들지 않았을까, 적어도 어느 구석 어딘가는 악의 냄새가 이 사람에게 배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제가 그들이 궁금해서, 그들의 서사가 궁금해서 그 사람들을 만났다면 그들을 닮아갔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제가 그들을 만나서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목표가 분명하잖아요. 그 목표는 뭐냐 하면 '너 같은 놈이 또 나왔을 때 내가 실수하지 않고 빨리 잡을 거야' 하는 목표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거죠."

경찰에서 은퇴한 지 벌써 5년, 연예인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데 이 사람에 대한 기사가 연일 쏟아진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몇 건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곳곳에서 이 사람을 찾고 이제는 전철을 타도, 식당에 가도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행동의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유명해졌다. 특히 이 사람을 모델로 한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된 이후 이 사람 인터뷰가 실리지 않은 매체를 찾기 어렵다. 고정 출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3개, 이제는 프로파일러 출신 방송인이라는 말을 듣고 있고 강연과 저술, 유튜브 활동 등으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맹활약 중이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의 배우 김남길 씨. 권일용 프로파일러가 모델이었다." data-captionyn="Y" id="i201658200"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20422/201658200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v_height="916" v_width="1616">
고졸 출신 말단 경찰관에서 시작해서 박사 학위를 가진 범죄 전문가로 입신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인간 승리 스토리지만 이 사람에게 요즘 쏟아지는 관심은 그 이상이다. '사이코 범죄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전사이자 천재 때로는 영웅'-미디어에 비친, 미디어가 그려내는 프로파일러의 이미지다.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라는 수식어를 훈장처럼 달고 살며 그런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심어준 사람이다. 악의 심연을 들여다본 이 사람이 마음먹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많을 듯했다. 프로파일러로서 겪은 이야기는 물론 악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11일 미사리 인근 스튜디오에서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겸임교수 권일용을 만났다.
 

2.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경찰

남다른 사명감이나 정의감이 있어 경찰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때 주어진 선택지가 경찰관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뒤 경찰관 시험을 준비했고 6개월 만에 순경 공채에 합격했다. 1989년 경찰종합학교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형사기동대에 배치되었다. 용문고등학교 동기 임종석이 전대협 의장으로 신출귀몰하며 경찰 수배망을 농락하던 시절이었다.

"경찰이 왜 됐냐,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을 가지려고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때가 굉장히 정치적으로 어지럽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속된 부서는 범죄와의 전쟁을 하기 위해 만든 형사기동대였어요. 그래서 시위 진압에 동원이 안 되고 강력범죄를 담당하는 형사기동대에 발령이 났어요."

범죄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고 배운 게 많았던 모양이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 정의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먼저 이야기했다.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나 증오심을 드러내는 말은 거의 없었다. 3년의 형사기동대 생활을 마치고 서울 동부경찰서 관내 파출소에서 10개월 동안 근무했다. 파출소 시절 제복의 무게, 제복의 힘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형사기동대에서는 주로 사복을 입었으니까 사실 경찰이 된 지 3년만에 제복을 입은 셈인데 제복을 입은 사람이란 약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이 원할 때 같이 있어주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 전에는 몇 년 일해서 돈 모으면 경찰 그만두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더 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거죠."

동부경찰서 수사과에서 일하던 중 한 선배 경찰관이 감식 업무를 해보라고 권했고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그 일이 인생을 바꿨다. 범죄 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을 뜨고 족적을 확인하는 일이 업무가 되었다. 감식요원 교육 1주일, 나중에 심화 교육 2주를 받은 것이 교육의 전부였다. 제대로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지문 채증을 통해 범인을 잡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발로 뛰어 범인을 잡는 것만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어 범인을 잡는 것도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승부 근성이 강하지 않다고 했지만 어떤 일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집요함이 있다는 것을 본인도 몰랐던 모양이다. 감식 업무와 관련해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기 발로 찾아다니며 배웠다.

"비번인 날에는 관련 학회, 세미나를 찾아 다녔어요. 지방에서 한다고 하면 밤새고 아침에 세수만 하고 기차 타고 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뭘 하는지 보러 가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점차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내가 이걸 왜 알지 이러는 게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현장에 나가면 점차 자신이 생기는 거죠."

이렇게 노력을 하니 성과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4년부터 3년 동안 이 사람이 채증한 지문으로 검거한 범인 수가 전국 1위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경장으로 특진했다. 지문 채증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동부경찰서만이 아니라 서울경찰청 관내 사건 현장에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그 덕에 누구보다 사건 현장을 많이 경험했다.

한번 해볼까 해서 시작한 감식 업무, 그게 인생을 바꿨다.

3.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가 되다

새로운 천 년을 며칠 앞둔 1999년 12월 서울경찰청 감식계장 윤외출의 전화를 받았다. 윤외출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의 범죄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을 경찰에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려 200만 명이 넘는 경찰 인력을 동원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범죄자의 행동과 심리를 연구해서 현장에 적응하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윤외출은 권일용에게 프로파일러로 일할 것을 권했다.
 
"서울 시내 형사 2천500명 자료를 봤는데 아직 30대 중반인 권일용이 사건 현장 경험이 아주 많더라고요. 감식요원은 모든 현장에 불려 나갑니다. 화재 현장, 살인, 강간 현장. 그래서 감식요원들은 힘들어서 1-2년 하고 다시 범인을 잡는 외근 형사로 나가는데 권일용은 젊은 나이에 벌써 감식요원을 7-8년을 했더라고요. 이미 다양한 현장 경험이 있으니까 여기에 프로파일링 범죄 대상인 연쇄살인, 연쇄방화 같은 사이코패스형 범죄자들만 집중적으로 면담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윤외출 경무관/경남경찰청 수사부장

범인들 많이 검거해서 진급 빨리하고 형사반장 되는 게 꿈이었다. 프로파일링, 프로파일러 같은 낯선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영어도 못 해요"라는 말로 거절했지만 윤외출의 설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범인이 어디에 지문을 남기는지 알겠는데 왜 범죄 대상으로 이 집을 선택하고 범죄 현장에서 이런 동선으로 움직였는지 범죄자들의 심리가 궁금하던 차였다. 프로파일링은 그런 것을 연구하고 조사해서 범죄를 예방하고 범인을 잡는 거라는 윤외출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2000년 2월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분석팀에 부임했다. 팀원은 이 사람 포함 4명, 나머지 세 사람은 데이터 분석요원들이었다. 실제 범죄 분석을 하는 프로파일러는 이 사람 1명이었다. 2005년 말 프로파일러 전문요원 16명을 정식으로 채용하기 전까지 경찰 조직 안에서 단 1명의 프로파일러였다.
 
"다른 팀원이 없는 1인 팀으로 5년을 버틴 겁니다. 프로파일링이 필요하다는 전망과 인사이트는 윤외출이 제시했지만 그것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책무는 권일용이 짊어진 거잖아요. 본인이 동의해서 간 자리지만 미래가 불투명하고 본인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 일을 하는 건데 '그게 뭐하는 거냐, 그렇게 해서 범인 잡을 수 있는 거냐'라고 말하는 사람부터 낯설어 하거나 심지어는 반발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런 데서 혼자 5년을 보내면서 프로파일링 업무를 정착시킨 거죠."
고나무/팩트스토리 대표 겸 르포 작가

프로파일링은 범죄 현장에 남겨진 증거, 증인, 피해자들을 통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큰 잠재적 범죄자 집단을 추정하는 방법으로 수사 대상이 될 용의자 범위를 좁혀나가는 수사 기법이다. 프로파일러가 직접 범인을 잡는 것은 아니다. 수사팀에 체계적으로 분석한 정보를 주고 자문에 응하는 일이 프로파일러의 업무다. 그런 이야기라면 나도 당신보다 백 배나 잘 할 수 있고 그런 이야기 할 시간에 밖에 나가 범인 한 명이라도 더 잡아오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프로파일러의 위상을 세워나갔다. 경찰 조직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프로파일러라는 말을 정착시킨 것은 이 사람 공이 크다. 현재 전국 지방경찰청에 모두 31명의 프로파일러 요원들이 활약 중이다.
 
"학문적으로 엄격하게 훈련을 받은 분들은 있지만 이분처럼 프로파일링 이론을 현장에서 구현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프로파일러로서 권일용의 힘은 현장의 힘, 경험의 힘이죠. 의사로 말하자면 연구의라기보다 직접 칼을 들고 환자를 대하는 임상의라고 할 수 있죠."
고나무/팩트스토리 대표 겸 르포 작가

윤외출이 프로파일러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직제를 만들긴 했지만 이 사람에게 프로파일링을 가르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까지 범죄 행동 분석은 국내에서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미국 FBI에 관련 부서가 생긴 게 1972년이었지만 국내 대학에는 범죄심리학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영어사전 뒤적여가며 미국 FBI 사례를 참조 삼아 공부했다. 총기 사용이 허용되고 거주 유형이 우리와는 많이 다른 미국의 사례는 우리와는 맞지 않았다. 윤외출이 1960년대 이후 주요 강력사건을 데이터로 만들어둔 자료가 오히려 더 도움이 되었다. 그 자료를 보면서 강력범죄 특성을 익혀갔다. 강력사건이 터지면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현장으로 달려갔고 검거된 주요 범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정장을 입고 다녔다. 정장을 입으면 범죄자들이 상당히 대우받는 느낌을 받는지 면담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범죄자들이 프로파일러에게 순순히 이야기를 합니까?
"말을 하게 만드는 거죠. 수사관들은 추궁을 합니다. 프로파일러들은 질문을 합니다.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질문하는 거죠. '너 갔어, 안 갔어'를 추궁받던 범인들에게 저는 '왜 갔어'라고 물어보는 거죠. 질문이 다르죠. '왜 그랬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뭐가 있었니'라고 물어보는 거죠. 처음에는 조금 편한 이야기들로 시작해서 3시간, 4시간씩 이야기하는 거죠."

서울 서남부 일대를 뒤집어놨었던 연쇄살인범 정남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 서남부 일대에서 13명을 연쇄살해한 정남규는 구속된 이후 몇 차례 이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 미치겠다는 편지 내용은 끔찍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이 사람에게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권일용은 삶의 애환이 몸 안에 녹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 따뜻한 친구예요. 따뜻해야만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고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거든요. 이게 프로파일러에게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것은 범죄 피해자, 가족은 물론이고 가해자들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따뜻하지 않으면 공감대 형성이 안 돼요."
윤외출 경무관/경남경찰청 수사부장

범죄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소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사이버대학에서 학사, 연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경찰에서 퇴직한 다음 해인 2018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찰 수사연구원에서 2년 동안 교수요원으로 근무하면서 한 강의까지 더하면 지금까지 1천 번이 넘는 강의를 했다. 동국대학교에서 대학원 강의를 하는데 수강생이 70명이 넘는다. 글보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부터 말솜씨가 좋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원래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말을 잘하기 위한 공부를 하거나 노력을 한 적도 없는데 프로파일러가 되고 난 뒤 체득된 거 같습니다. 일단은 범죄자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그들이 말을 하게 만들어야 했고요. 그 다음에는 수사팀에 브리핑을 할 때도 설득을 해야 되잖습니까. 범죄자 분석을 해서 그 결과를 수사팀이 받아들이도록 전달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4. 냄새로 남편이 하는 일을 안 아내

남편이 하는 일이 뭐였는지 잘 몰랐던 아내는 냄새로 이 사람이 하는 일을 알았던 모양이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몇 구씩 시신을 보고 만져야 했다. 그 냄새가 몸에 배고 옷에도 배었다. 그런 냄새를 묻힌 채 집으로 가곤 했다.

"예를 들면 시신이 물속에 있을 때는 수온 등으로 어느 정도 부패를 막아줍니다. 그런데 인양이 되면 20-30분 안에 금방 부패가 되고 냄새가 무지무지하게 많이 나요. 신원을 확인하려면 다 불어 터진 시신의 지문을 채취하고 사진도 찍고 그래야 됩니다. 옷에 냄새가 안 밸 수가 없죠. 시신 찾는다고 하수구 뒤지고 다니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냥 일이에요. 나한테 주어진 일인 거죠. 힘든 고통이 아니고 그냥 해야 될 일인 거죠."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트라우마가 안 생길 리 없는 극한의 일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살인도 안 해봤고 나는 성폭행도 저지른 적이 없어요. 누구를 때리거나 뭘 훔쳐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알겠냐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들어야 되고 그 사람처럼 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저를 소진시키는 원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퇴직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기자에게 그랬어요. '내가 맨날 범죄자로 살았는데 이제 나로 좀 살고 싶다' 그랬더니 기사 제목이 '나로 살고 싶다'로 나갔어요."

수시로 아팠고 몸과 마음이 방전되는 경험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면 성당에 가서 혼자 기도를 했고 사나흘씩 입원을 하기도 했다. 외가가 몇 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이고 학창 시절에 꽤 진지하게 사제가 되는 것을 고민했다. 사제복을 입어도 잘 어울릴 거 같은 인상이었다.

"왜 내가 이렇게 아프지 하는 순간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아침에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거죠. '아 내가 지금 소진됐구나' 느끼는 거죠.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자기를 지켜가는 힘이 있어요. 어떤 때 내가 지금 굉장히 우울하구나, 내가 지금 예민해서 아내의 말 한마디에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솟는구나 그런 거를 스스로 알고 저 자신과 대화를 하는 거죠."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자신이 악에 물들지 않게 붙잡아주고 중심을 잡고 버티게 해준 사람들이 범죄 피해자들이라는 것이다.

"저 역시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내가 이 자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지요. 그러지 않도록 저를 지켜주는 것은 피해자들입니다. 피해자들의 고통과 눈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슬픔을 제 눈으로 봤는데 제가 가해자들과 동화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건들을 사전에 빨리 차단하지 못했다는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제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해자분들이 그를 붙들어줬다.

5. 살기 위해 선택한 퇴직

2017년 4월, 경찰을 그만두었다. 경찰관으로 27년, 그 가운데 17년은 프로파일러로 살았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정치를 하기 위해 그만두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순전히 살기 위해 그만둔 것이라고 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직장에 종양이 있었고 최고 혈압은 200을 넘었다. 이대로 길에서 쓰러져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의 마음을 읽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자기 몸에서 보내는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도 남달랐다.

-퇴직하기 직전에 스트레스로 이가 빠지고 고혈압에 공황장애, 우울증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공황이 안 올 수가 없죠. 제가 그 상황을 잘 알아요. 퇴직 무렵 공황이 심해질 거 같더라고요. 그때 제가 가장 많이 한 말이 '길거리 가다가 내가 이유없이 쓰러져 죽을 거 같다'였어요. 이게 공황장애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 거든요. 그때 생각했죠. '이거 좀 멈춰야 되겠다' 그래서 퇴직을 결심한 겁니다. 공황장애가 경증에서 중증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 스스로 인식을 한 거죠.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니구나, 업무에서 내가 떠나려고 노력을 하자' 그렇게 해서 저 스스로를 지킨 거죠."

-그만두면서 고민은 하지 않았나요?
"아직 아이들이 학업을 마친 것도 아니고 모아 놓은 돈도 없었으니 엄청 고민을 많이 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어요."

경찰을 퇴직하고 제일 먼저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군에서 제대한 뒤 무엇을 할지 방황하는 아들에게 경찰관이 될 것을 권유하며 경찰 지원서를 내밀었던 분이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던 분이다.

"'아버님이 생전에 늘 강조하신 것처럼 필요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잘 살았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어서 그게 퇴직할 때 가장 행복이고 보람이었죠. 제 아이들에게도 공부해라 좋은 학교 가라는 말은 안 하고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죠."

경찰에 있는 동안 가족까지 신경 쓰고 돌볼 힘은 없었다고 했다. 일부러 가족을 돌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럴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정은 잠을 자거나 쉬는 곳이었을 뿐 가족들과 감정을 나누고 자녀들과 대화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공유하는 기억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한바탕 꿈을 꾸고 온 느낌이에요. 나 원래 이렇게 살던 사람이었잖아 이런 거죠. 범죄자와 면담하면서 미소 짓고 웃을 일이 없잖아요. 돈은 여전해요. 돈은 아무나 버는 게 아닌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은 웃을 일이 많아졌어요."

퇴직 이후 더 바빠졌고 더 유명해졌고 찾는 사람이 더 늘었다. 말은 안 했지만 보상도 더 커졌을 것이다. 범죄 현장을 이 사람만큼 많이 본 사람이 없다. 박사 학위까지 받았으니 범죄 분석 분야에서 이 사람을 능가할 만한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갖췄으니 미디어가 좋아할 조건은 다 갖춘 셈이다.
 
"본인이 나온 방송을 보고 그 내용이 마음에 안 들 수 있잖아요. 그런 게 있으면 교수님은 즉시 말씀을 하세요. 그런 거를 마음을 담아두지 않고 '나 그거 기분 나빴어,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이런 이야기를 바로바로 하시죠. 저희는 그런 점이 좋았어요. 전문가와 피디와의 관계라기보다 같이 일하는 동료 같은 느낌을 주시는 분이죠"
도준우/SBS <그것이 알고 싶다> PD

종종 예능프로그램에도 나와 사람들을 웃기고 자연스럽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만나보니 예능에서 보여준 다소 헐렁하고 허당끼 있는 모습은 실제와는 꽤 거리가 있어 보였다.

"프로파일러로서 그런 극단의 모습을 봤다는 것이 오히려 제 삶을 좀 여유롭게 내려놓는 계기가 된 거 같아요. 제가 방송에서 헛발질하고 넘어진다고 해서 저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얼마나 달라질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퇴직 이후 체중을 15kg 정도 줄였다. 아직도 간수치 등은 정상보다 높다고 했지만 연예인급 일정을 소화하는데 무리가 없다. 경찰에서 정년 퇴직을 하고 얼마 안 돼 화장실에서 갑자기 코피가 터졌다. 휴지 한 통을 다 써도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 가서야 겨우 피가 그쳤다. 혈관이 머리 안에서 터졌다면 큰일 났을 거라며 코피로 터진 게 천행이라는 게 의사의 말이었다. 어쩌면 악마들을 상대하면서 몸 안에 쌓였을 나쁜 기운들이 코피의 형태로 몸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겸임교수 그사람 인터뷰

6. 이 사람이 꿈꾸는 '자화상'

신부가 되고 싶었다는 말 때문일까, 악인도 자비로 대하는 사제 같은 모습이 엿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대화 도중에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흉악 범죄자들의 교화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범죄자들이 가볍게 처벌받는 것에 대해 선량한 피해자들이 분노하는 현실은 잘못된 거 아니냐고 했다. 범죄 자체가 달라지고 범죄자들의 유형도 달라지고 동기도 달라지고 있다며 새로운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범죄와 가장 최전선에서 싸워온 사람다운 생각이었다.

"묻지 마 범죄가 한 건만 발생해도 그 동네 사람들의 삶이 전체가 위축됩니다. 범죄라고 하는 것은 나한테 직접 일어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소수의 범죄라고 해도 적극적으로 예방하고 차단해야 된다고 봅니다."

경찰에 입문할 무렵 당시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직범죄, 마약, 인신매매 등 5대 범죄 단속에 총력을 쏟고 있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범죄로부터 더 안전해졌는지 물었다. CCTV 등 물리적 안전망 구축은 잘 돼 있다고 했다. 범죄가 온라인으로 넘어가는데 거기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경찰로서, 프로파일러로서 행복하셨습니까?
"그때는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좋은지, 힘든지, 잘하는지 이런 것을 몰랐어요. 내가 지금 이거를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고민은 있었지만 힘든 거는 몰랐어요.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까 그때 내가 힘들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바쁘시죠?
"요즘에 좀 바빠졌는데 바람처럼 지나가는 거겠죠. 제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예능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또 꿈처럼 한세월 지나가겠다 이런 생각이 들고 그러니까 더 소중하게 생각이 들고요"

-왜 이렇게 본인이 유명해졌다고 생각하세요?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것이 있을 때 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필요가 저를 이렇게 돋보이게 만드는 요인이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1970년대에 제가 프로파일링을 하겠다고 하면 그런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겠지요."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 사람이 그려내는 자화상이 어떨지 보고 싶었는데 자신을 보여주는 데 다소 인색했다. 어려운 집안의 4남매 중 장남이었다.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것도, 신부가 되는 꿈을 포기한 것도 가정 형편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기력, 꿈이 없던 시절이란 몇 마디 말로 경찰이 되기 전 시절을 뭉뚱그려 표현했다. 가족, 형제들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연쇄살인범 정남규의 방에서 자신의 인터뷰가 담긴 신문을 발견한 적이 있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이 사람의 다소 방어적인 태도는 강력범들을 상대하며 살아온 사람으로 만약에 있을 수 있는 위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 행동이라고 이해했다. 3시간 정도 만났는데 그 정도 만남으로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 긴 시간을 만난다고 해서 쉬이 마음을 열 것 같지도 않았다. 고나무, 윤외출 등 이 사람 지인들은 한결같이 이 사람을 담백하고 따뜻한 사람, 관계 맺기에 능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한두 번의 만남으로 쉽게 마음을 여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조직보다 개인이 부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때는 경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고, 자신을 '영웅'이나 '천재'로만 바라보면 또 다른 정신적 소진을 다시 겪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는 냉철해 보였다. 프로파일러들이 흉악범 검거와 범죄 예방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역할이 과장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프로파일러는 범죄가 만들고 미디어가 키워낸 '만들어진 영웅'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 말도 경청할 필요가 있지만 이 사람이 개척한 프로파일러 업무가 경찰의 역량을 한 단계 높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 한 귀퉁이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사랑은 지금도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란 책의 제작 과정을 설명하면서 악의 마음을 읽는 '자'가 아니라 '자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자신은 먼저 경험하고 먼저 퇴직한 사람일 뿐이고 아직 현직에서 악의 흙탕물에 발 담그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없는 길을 자신의 발자국으로 만들어온 노고를 굳이 강조하지 않으려는 이 사람에게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현·심희섭 (2015) <범죄자 프로파일링: 과학인가 과장인가>. 형사정책연구 103호, 안기남·김정석 (2020) <범죄자 프로파일링 효용성 논의에 대한 고찰>. 한국경호경비학회 제65 등이 이런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 권일용 교수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23일) 밤 9시 20분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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