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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북적북적]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36 :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우리가 옛날 영화를 보아야 할 다른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화는 옛날 영화예요."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는 오늘의 책은 흑백영화 시대부터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130년 영화사의 다양한 필름들을 종횡무진 오갑니다. 4월 4일 출간된 따끈한 신간, 구픽 출판사에서 내고 있는 이른바 '콤팩트 에세이: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시리즈의 영화 편입니다. 그것도 그냥 영화가 아니라 '옛날 영화'에 콕, 방점을 찍었습니다.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이주에 같이 읽고 싶습니다.

이 책을 쓴 듀나 님은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SF작가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2천년대 초반을 전후해 듀나 작가가 처음 필명을 떨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본명과 신분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펜네임과 글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작가는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신선한 존재였습니다. 듀나 작가가 에세이를 전개하는 방식도 그전까지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글 쓰는 방식과 많이 달랐습니다. 특유의 개성 있는 시각 뿐 아니라, 살짝 시니컬한 톤으로 구어적인 표현들을 자연스레 녹여내는 문체가 새로웠습니다. 그렇게 '이질적'인 인상을 주었던 듀나 작가도 어느 덧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자기 분야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듀나 작가처럼 그저 필명만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많을 뿐더러, 프로들의 글에서도 입말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문체는 심지어 더 익숙하고 일반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옛날 영화'란 무엇인가, 어째서 우리는 옛날 영화를 봐야 하고 그것이 왜 즐거운 경험인가를 논하는 이 책 작가의 그 커리어 역시 새삼 '옛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들을 하게 해줍니다.
 
"제가 자주 내는 퀴즈입니다. 이 대사는 어느 영화에서 나왔을까요?

"아버지예요? 아이 이제 들어왔는데 참 고와요."

한국어입니다. 그것도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고풍스러운 한국어. 그렇다면 옛날 한국 영화일까요? 일제 강점기 영화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이 대사엔 굳이 인용할 만한 대단한 의미가 없죠. 그렇다면 한국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일까요?

맞습니다. 이 대사는 H. 브루스 험버스턴이 감독한 1938년 영화 [호놀룰루의 찰리 챈 Charlie Chan in Honolulu]에 나옵니다. 워너 올란드가 죽은 뒤 찰리 챈의 자리를 물려받은 시드니 톨러가 출연한 첫 영화였지요. 대사는 찰리 챈이 모든 사건을 해결한 끝부분, 그러니까 한 시간 3분경에 나옵니다. 퍼블릭 도메인 영화이니 유튜브에서 확인해 보세요. 중국어여야 할 그 대사를 굳이 한국어로 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찰리 챈의 아들 윙푸로 나온 필립 안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미국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습니다. 이 동양인 배우가 어떤 언어로 말하는지 신경 쓴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다음 대사를 볼까요.

"사람의 젊은 생각은 자기가 죽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 것이다."

이 어색한 한국어 대사는 윌리엄 웰먼의 1954년작 [비상착륙 High and the Mighty]에 나옵니다. 1958년에 [진홍의 날개]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된 작품이지요. 존 웨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파일럿으로 나오는 항공 재난 영화입니다. [에어포트] 시리즈의 선례로 알려져 있지요.

옛날 한국 속담이라고 주장하는 이 대사는 한 시간 32분쯤에 나와요. 이를 읊는 사람은 도로시 첸이라는 승객입니다. ……(중략)…… 1950년대에 한국계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막 시작하고 있던 것이지요. 그 경력은 이 영화를 포함해서 단 두 편으로 끝나 버렸지만.

[비상착륙]은 그렇게까지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 속 도로시 첸을 보는 건 좀 안심되는 경험입니다. 동양 여자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선입견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도로시는 생각이 깊고 품위있는 사람입니다. 승객들과 승무원들도 이 동양인 여자에게 친절하고 낮추어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중이 꽤 돼요." (["아버지예요? 아이 이제 들어왔는데 참 고와요."] 中)

 
"그러니까 [상하이의 딸](1937년)은 보통 백인 배우들에게 넘어갔던 주연 자리를 모두 아시아 배우가 차지한 희귀한 할리우드 영화였던 것입니다. 이 간단한 전환만으로도 영화는 놀라운 차별성을 얻습니다. 당시 묘사의 한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두 주인공은 모두 용감하고 수완 좋고 민첩합니다. 그리고 백인들과 있을 때 전혀 안 꿀려요. 특히 안나 메이 웡은 키가 크고 위엄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인종 차별적인 시선을 보내면 가볍게 눌러 버립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당시 동양인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요부도 아니고 악당도 아닙니다. 그리고 영어가 유창합니다. 당연하지요. 두 사람 모두 미국인이니까요.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동양인의 정체성만큼이나 미국인의 정체성도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옐로 페이스, 그러니까 엉성하게 동양인으로 분장한 백인 배우가 안 나옵니다." ([상하이의 딸] 中)
 
2차 대전 전후 시기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당시로선 드물게 동양계 캐릭터를 '정당하게' 대우했던 경우들을 이 책에서 접하면서, 최근 히트했던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 몇 개가 떠올랐습니다. 한국계 남주인공과 베트남계 여주인공을 내세운 샌프란시스코 배경의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 Always Be My Maybe] 같은 영화들 말입니다. (남주인공은 도산 안창호의 아들인 배우 필립 안이 맡았던) [상하이의 딸] 주인공 커플에 대한 듀나 작가의 묘사와 2019년 넷플릭스 로맨스 동양계 주인공들의 입지가 놀랄 정도로 비슷합니다. 그나마 [상하이의 딸] 근처로 '돌아오기까지' 80여 년이 걸렸구나,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이제는 영화를 비롯해 한국의 대중문화가 그야말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시기입니다. 전에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넓게 보면 이건 비단 한류에 국한되는 현상만은 아니긴 합니다. 세계 어디서나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전세계 동시적인 플랫폼에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디어환경 속에서, 예전엔 그저 '변방'이라고 뭉뚱그려져 치부됐던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이 그야말로 전에 없던 양과 속도로 서로서로에게 가닿거나 와닿고 있습니다. 이런 전례 없는 변화의 시대에 이렇게 옛날 영화들을 짚어보는 건 더욱 쏠쏠한 재미를 줍니다. 수평적으로 세계 곳곳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도 활발해지고 있지만, 수직적으로도, 그러니까 과거의 작품들을 접하는 것도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옛날 우리 쇼프로그램이나 드라마 같은 걸 심심하면 문득 찾아볼 수 있는데 (유튜브에서 일종의 신드롬을 탔던 90년대 [SBS 인기가요] 같은 경우처럼 말입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듀나 작가 역시 이 책에서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젊은 한국 사람들이 (캐리) 그랜트의 외모에 심드렁할 가능성은 미국보다 높습니다. 왜냐고요?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미적 기준의 급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국 연예인들을 더 많이 소비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뀌었어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한국의 연예인을 소비하는 건 그렇게 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외모 기준은 또 어떻고요.

이 과정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한국 연예인에게 적용되는 기준을 할리우드의 유럽계 배우에게 적용합니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기준은 피부가 잡티 없이 맑고, 어려 보이고, 턱이 날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20세기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그레이스 켈리의 미모에 지적질을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 관객들도 켈리의 미모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아요. 저랑 같이 [이창]을 본 관객들도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켈리의 사각턱을 지적합니다. 전 이 기준이 그렇게까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 연예인들의 턱도 조금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보편을 주장하던 유럽계 사람들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건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랜트에게 감점을 줄 수도 있는 거죠." ([나쁜 남자들의 수명] 中")
 
이 책에 실린 듀나 작가의 에세이들은 '지금의 시선으로 돌아보는 옛날 영화들'에서 이렇게 흥미를 끌 만한 이모저모로 우리를 '유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옛 영화'들을 들여다보던 시선이 바로 오늘,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지점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갑니다. 여기 발췌인용한 에세이들이 어떻게 끝을 맺는지 뿐 아니라 다른 에세이들까지, 이 책을 직접 펼쳐 들어 읽어주십사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래서입니다. 옛날 영화들을 재미있게 돌아보다가 문득, 현재에 매몰되어 보지 못하기 쉬운 것들을 우리가 좀더 명징하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꾀어주는 글들입니다.
 
"정교한 과거의 재현으로 관객들을 경탄하게 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최근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그런 작품이었지요.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1990년대와 [그대 안의 블루]와 같은 진짜 90년대 영화가 보여주는 과거는 여전히 다릅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보여주는 과거는 21세기의 해석이 들어간 과거의 재현입니다. 세트만 그런 게 아니라 캐릭터도 그렇습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만든 사람들은 영화가 그리는 사건 직후 외환 위기가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대 안의 블루]를 만든 사람들은 몰랐지요. 이 두 차이는 엄청나고, 우리는 그 차이를 보면서 두 작품을 다른 식으로 감상합니다.

옛날 영화들은 과거의 정확한 재현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의 선입견이 개입되어 있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조작되어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후반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들은 당시 도시의 인종 비율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요. 수많은 영화는 편견의 범죄 증거입니다. 앞으로 여러 번 이야기할 텐데, 실제 세계와 이를 투영한 동시대 영화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돕니다. 이를 제대로 읽으려면 여러 시대, 여러 공간의 실제 작품들을 직접 보면서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어요. 간접 정보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결국 남의 눈이고 생각이니까요. 오독하고 실수하더라도 일단은 직접 보는 수밖에." ([모든 영화는 옛날 영화다] 중)
 
남의 기준이나 주류의 권위에도 기죽거나 매몰되지 말고, 옛날 영화를 나의 눈으로 자유롭게 탐방해 보라고 권해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펼쳐 드는 것으로 그 탐방의 첫 걸음을 시작해 본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봄이 절정입니다. 거리두기도 해제됩니다. 모든 면에서 그야말로 봄다운 봄이 되려나, 기대가 대기 중에 부풀어오르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주말에도 [북적북적]과 함께 해주시면 참 기쁘겠습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언제나 가슴 깊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구픽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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