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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것은 잔혹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일지도 모른다

국가의 하층민 감시 통제 네트워크 보고서 ①

[취재파일] 이것은 잔혹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하고 엄마하고 싸움해가지고 고모 집에 맡겨놨는데 고모님하고 창경원에 놀러 가자 이러더라고. 옛날에 창경원이 어린이대공원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놀러 갔다가 고모가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때 당시에 어리니까 안 오니까는 울고 이랬어요. 고모가 퍼떡 안 오니까는. 그래 울고 이러니까는 아가씨 세 분이 지나가면서 그때 당시에 양과자를 먹으면서 '왜 우느냐' 이러대. 그래서 '고모가 화장실 갔다 온댔는데 안 온다'고 이러니까 제 손을 이리 잡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그 경비실에 수위실에 맡겼어요. 그러니까는 그 수위실에서 뭐 전화하드만 조금 있다 보니까는 그 탑차 같은 게, 하얀 거. 그 시립아동보호소에서 나왔더라고요."

고모에게 맡겨진 대여섯 살의 김세근 씨가 고모에게도 버려지던 날. 창경원의 햇살은 맑았고, 고궁 담벼락의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고 합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기억하기도 싫은 일이다." 그로부터 50여 년 뒤의 어느 봄날. 자신의 과거사를 취재진에게 들려주기로 한 김세근 씨는 부산의 한 오래된 빌라 앞 벚꽃나무 아래, 유일한 가족인 강아지 한 마리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취재파일] 이것은 잔혹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일 수도 있다

혐오감을 해소하는 일

SBS 탐사보도부 '끝까지판다'팀은 정부가 연구진에 의뢰한 <집단시설 인권 침해 실태조사 연구용역 사업>의 최종 연구 결과를 단독으로 입수했습니다. 연구진은 195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정부 기록은 물론, 서울, 수도권, 강원권 11개 수용시설의 내부 기록 수만 페이지를 분석했습니다. 또 수용시설 경험자와 종사자 십수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오늘부터 연재되는 이후 <취재파일>에서 더 자세히 전달해드리겠지만, 연구 결과 드러난 집단 수용시설에서의 인권 침해 실태는 매우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이며 심각했습니다. 그동안 '형제복지원'이나 '선감학원' 등 잘 알려진 수용시설의 인권 침해 실태가 드러나긴 했지만, 몇몇 시설에 국한된 '사건'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8명의 교수와 박사급 연구진들이 9개월간 연구한 결과, 이들 수용시설의 인권 침해 실태는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물망과 같은 '구조'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지속적 학대의 시작은 보통 사람들의 '혐오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됐다는 겁니다.

[취재파일] 이것은 잔혹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일 수도 있다
"이들로 인한 국민의 혐오감을 해소함과 아울러, 외국 관광객에 대한 국가적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이들을 수시 단속하여 동시설에 수용·보호하고..."
-1982.2.8.일자 보건사회부 공문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지방의 국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드는 상황 속, 도시에서의 생존 투쟁에서 밀려난 하층 계급은 '보통 사람' 이상의 자리를 꿰찬 사람들이 보기에는 썩 좋지 않은 몰골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하다 다쳐 불구가 되거나, 일감이 없고 노동할 여력이 없을 땐 한 손엔 흙뭉치를 들고 구걸을 하러 돌아다녔습니다. 깨끗한 옷을 빼입은 신사가 동냥에 응하지 않을 땐 손에 든 흙뭉치로 신사의 옷을 더럽히는 일도 왕왕 있었다고 합니다.

[취재파일] 이것은 잔혹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일 수도 있다

민주적 정통성이 부족했던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은 이들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혐오감에 착안했습니다. 지저분하고 의심스러운 거리의 부랑아들을 대거 단속해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시의 보통 사람들에겐 '정화'를, 잡아들인 부랑아들에겐 '복지'를 명분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혐오감은 일종의 청량감으로 해소돼갔고, 그 사이다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은 정권이 강하고 효율적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과도 연결되었습니다.
 

양동빨대, 대발랑, 중발랑, 소발랑

깨끗해진 도시의 거리 너머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거리에서 잡아들인 부랑인들의 수는 수용시설들의 수용 정원을 가뿐히 초과했습니다. 한정된 공간과 자원 속, 밀려드는 부랑아들을 통제하는 수용시설의 종사자들은 악으로 변질된 효율성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좁은 공간에 부랑아들은 머리와 다리가 포개진 채 칼잠을 자야 했습니다. 수용시설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시설 침실의 풍경은 18세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오가던 노예 무역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소대에 방이 네 개 있어요. 큰 방이 세 개 있고요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작은 방은 선생 방이라서 아무도 못 들어가고요. 그다음에 또 방 하나는 이제 통장이 자요. 그다음에 방 두 개 가지고 한 60명, 70명이 그 방에서 한 방에 30몇 명씩 자거든요. 방이 한 그때는 평소에 잘 몰랐는데 지금 대충 계산해보면은 한 네다섯 평 된 것 같아요. 방에. 그런데 거기에 35명, 40명씩 자거든요. 그러면 전부 다 칼잠을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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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 들어온 고아나 부랑아들을 일일이 교육하고 관리할 수 없었기에, 정부의 인가를 받은 시설들은 수용된 아이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감시하게 했습니다. '양동빨대'와 같은 기괴한 별명이 붙은 최정점의 '통장' 아래로, 잡혀 들어온 청소년과 아동들은 치열한 쟁탈 과정을 통해 '대발랑', '중발랑', '소발랑'과 같은 직책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유·무형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한창 2차 성징을 거치는 청소년기의 부랑아들에게 그 폭력의 양태는 동성 간 성폭행으로도 나타났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이 있다. 이래가 홀딱 벗겨 갖고 이리 하면서 보고 이제 몸 예쁘고 좀 성숙한 애들 좀 곱상한 애들이 통장에 데리고 가가 성생활하고."

수용된 부랑아들이 형성해놓은 폭력적 위계는 어떤 측면에서는 대량의 수용자들을 통제하는 데 요긴한 하나의 사슬 구조로 기능했습니다. 때문에 '보호와 교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시설들은 이를 사실상 그냥 방치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습니다.

[취재파일] 이것은 잔혹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일 수도 있다

"홀로코스트는 벽에 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


바우만(Z. Bauman)은 "홀로코스트가 벽에 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홀로코스트를 이제는 지나가버린 예외적 사건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숨은 가능성을 검사하는 드문, 그러나 의미 있고 신뢰할 만한 시금석"이자 "사회학적 실험실"로 간주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만약 홀로코스트처럼 형제복지원이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창문이라면, 우리는 이 창문을 통해 무엇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절멸과 갱생 사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 연구팀

햇살이 잘 들지 않는 피해자들의 구식 빌라 방 여기저기에는 정신과, 내과, 소화기관 질환 약 등이 그득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붙잡고 옛날 일을 물으면서 기자는 속으로 '진실을 정확히 그려내기 위해 과거의 기억들을 충실히 기록한다'는 변명을 해봤습니다만, 뇌리와 가슴, 온몸 곳곳에 과거의 악몽들이 길고 굵은 나사못처럼 돌려 박혀 있는 이들에게 그건 분명 또 한 번의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그려진 잔혹한 그림들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고어물처럼 전시되고 마는 것은 이들에게 더더욱 깊은 슬픔일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우리에게도, 그것은 더운 여름날 한 편의 납량특집 좀비 영화를 감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수용시설들에서 일어났던 이 일들을 하나의 그림이 아닌, 창문 밖에서 이어져온 일련의 풍경들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취재파일] 이것은 잔혹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일 수도 있다
소년법 제4조 제1항 제3호 '우범소년'의 정의
가.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성벽(性癖)이 있는 것

우리 사회의 시스템 한 켠에는 아직 모호한 정의만으로 아동을 '우범소년'이라 낙인찍을 수 있는 장치가 합법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점점 살기 힘든데, 이런저런 이유로 내 눈에 꼴 보기 싫은 것들을 좀 안 보이게 해달라'는 마음을 드러내는 건 점점 더 그리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빌런'들이 우글대는 1호선 지하철에 끼여가다 보면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이 고삐를 풀고 마음대로 날뛰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 고삐 풀린 마음들이 하나의 거대한 무리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과거의 일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화가 이말년 씨가 말했듯, 어떤 역사의 대목은 인류의 오답 노트이기도 합니다.

연구진이 보고서에 담아낸 과거사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SBS 탐사보도부 끝까지판다팀은 이어지는 보도를 통해 이 연구의 자세한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취재 : 원종진, 정반석, PD : 김도균, 영상취재 : 김태훈, VJ : 김준호, 제작 : D콘텐츠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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